첫눈에 반하기는 힘들어

by 이재리

‘널 보기 전엔 믿었었지. 생각이 바뀌는 건 참 쉬운 걸, 난 어리석게 혼자였지.’ 하필이면 그런 노래를 듣고 있었다.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옆에서 앞 좌석에 고개를 기댄 채 자고 있는 이 남자를 깨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면서 말이다. 항공사에서 제공해 주는 샌드위치가 통밀로 만들어진 탓에 그 텁텁함을 해소하기 위해 콜라를 과도하게 마신 직후였다. 왜 내 방광은 이렇게 자극적일까.

그래도 맛있었던 샌드위치. 제로 콜라는 언제나 옳다!

내 옆자리에 앉은 남자는 브라질 사람이었다. 탑승 직후 짐 정리를 하며 살짝 보인 그의 여권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브라질에서 암스테르담을 거쳐 포르토로 향하는 모양이었는데, 그도 나만큼이나 긴 장거리 비행에 지쳤는지 이륙한 지 채 5분이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잠을 청했다. 그렇다 보니 그런 그를 흔들어 깨우기가 어려웠다. 그러는 사이 방광의 재촉은 점점 심해져만 갔다. 착륙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남짓. 어떻게 해도 방광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Excuse me?”


남자는 잠에서 불쾌하게 깬 사람 치고는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과는 상반되게 다소 무기력한 다리만 통로 쪽으로 빠졌고, 그의 얼굴을 지나가는 몸통이 민망했다. 돌아올 때도 절차를 한 번 더 거쳐야 했다. 그는 다시 온화하지만 무기력. 확실히 장시간 비행이란 가혹한 것이었다. 좁은 공간 안에 갇혀 십 수 시간을 꼼짝도 못 하고 있다 보면 없던 피로도 절로 만들어진다. 여행에서 가장 힘든 건 언제나 이동, 그리고 이동, 또다시 이동. 그나마 다행인 건 이 비행은 3시간이 채 안되었으며, 그 마저도 이제 포르토에 거의 다 도착했다는 점이었다.


포르토의 날씨는 암스테르담에 비해 훨씬 좋았다. 맑은 하늘 그 자체를 빛내고 있는 포르토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하자 마음이 놓였다.

“You look so happy? (행복해 보이네?)”

여태 죽은 듯이 자고 있던 옆 자리 브라질 남자가 착륙 직후 말을 걸어왔다.

“Yeah, the weather is super nice. (응, 날씨가 엄청 좋잖아)”


그러자 그는 암스테르담의 날씨와 비교하기 시작했고 나도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사람들이 짐을 꺼내고 나가는 와중에 우리도 적절히 해야 할 일들을 해가며 대화를 끊임없이 이어 나갔다. 그는 브라질에서 태어나긴 했으나 현재는 스페인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브라질에는 휴가 차원에서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앞으로 며칠 동안 포르토에 머물면서 일에 필요한 여러 가지 서류 처리를 마치고 자신의 직장이 위치한 도시로 이동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의 여러 이야기는 그다지 인상 깊지 않았다. 나같이 소심한 여행자의 마음에 남은 것은 공항 주차장에 자신의 차가 있으니 원하면 시티까지 태워주겠다는 그의 제안, 그리고 그의 잘생긴 얼굴뿐이었다. 여행 준비를 거의 해 오지 않아 시티로 가는 방법도 그냥 메트로를 타면 된다 정도만 알고 있던 터라 그의 제안이 꽤나 끌렸다. 그리고 그의 웃는 얼굴이 너무 매력적이라 계속해서 보고 싶었다. 나는 심지어 민낯이었는데, 보통 민낯 때라면 하지 않을 짓이면서도 계속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눈을 맞추고 있었다. 첫눈에 반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구나. 이제야 동방신기의 노래 ‘The way you are’의 가사를 이해했다.


사랑의 감정을 줄곧 정의 내리기 어려웠다. 남들이 쉽게 얘기하는 사랑은 무엇, 무엇이다 하는 식의 문장들도 내게는 한낱 겉치레에 불과했다. 몇 번의 연애 끝에 세상에 정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모두 그저 필요에 따라 사람을 만나고, 호르몬을 방출하고, 욕구를 충족하다 몸의 화학적 반응이 멈추면 종료되는 짧은 프로세스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어느 날엔 모든 연애 감정이 지겨웠다. ‘사랑놀음’이라는 표현이 더 와닿는 순간이 많았다. 내게 많은 것을 걸었던 전 인연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감정과 표현이 오히려 부담스러웠던 적이 많다. 그러다 동물에 관련된 다큐멘터리 방송이라도 보는 날엔 내 지난날의 과오가 겹쳐 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저 짐승에 불과한가? 인간은 도대체 뭐가 달랐길래 모든 짐승을 지배하고 먹이사슬의 최강자로 떠오른 것인가, 『사피엔스』니 『총, 균, 쇠』니 하는 것들을 읽어도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것이 그 짧은 시간, 몇 마디 대화만으로 단숨에 이해됐다. 심장이 뛰고 자꾸 웃음이 나온다는 건 이런 거구나. 왜 벌써 사랑에 빠지고 미래를 그릴 때 둘째 손주 얼굴까지 다 봤다고 하는지 알겠다. 이 짧은 순간에 나는 해외로 이주하고, 직장을 얻고, 아기를 낳는 과정을 상상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내 대답은 ‘괜찮다’였다. 정말로, 괜찮다고. 데려다주지 않아도 된다고, 충분히 혼자 메트로 타고 갈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좋은 맛집이나 카페가 있으면 그것만 좀 추천해 달라고 했다.


나는 첫눈에 반했다고 해서 모든 걸 걸고 뛰어들 만큼 어리숙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냐고 하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낯선 사람은 일단 경계하고 보는 본능에 더 가까웠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모르는 사람은 따라가는 거 아니야, 어른은 아이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 같은 것들은 내 피부 아래층 어느 곳엔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커서도 인신매매와 사이비 종교를 경계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너의 현실감이, 너의 실용성이 또 하나의 영화를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내 버렸다고 하면 그 또한 하는 수 없지만 말이다. 우리는 수화물을 기다리는 내내 맛집과 명소를 알려주고 그걸 받아 구글 맵에 표시하며 시간을 보냈고,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며 깔끔하게 헤어졌다. 나는 조용히 메트로 표를 끊는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며 생각했다. 앞으로 내 인생에 조금의 사랑이 침투할 여지가 생긴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을 말이다.


Trindade역의 풍경. 여기서 환승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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