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이 빌라촌 초입에서 내려달라고 말한다. 잠시 후 고급스러운 승용차가 멈춰 서고 민준은 조수석에서 내린다. 영이와 영이의 엄마가 뒷좌석에서 손을 흔든다. 민준은 오직 영이만을 위해 손을 흔든다.
승용차의 빨간 후미등이 점점 멀어진다. 그러자 영이에 대한 걱정과 함께 헛헛함이 불쑥 솟아난다.
용추빌라로 걸어가는 길에 사위가 점점 어두워진다. 띄엄띄엄 세워진 가로등이 모두 켜졌지만, 거리는 여전히 어둡다. 가로등 아래에는 약속이나 한 듯 초록색 쓰레기봉투가 서너 개씩 나와 있고, 개중에는 길고양이가 뒤적였는지 뜯어진 것도 있다.
집 앞에서 팔뚝에 코를 묻고 킁킁댄다. 영이의 집에서 맡은 적 있는 특유의 꽃향기가 엷게 날 뿐, 다행히도 교회의 기운은 묻어 있지 않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십 분 정도 밖에 서 있다가 들어간다.
집에 아버지가 없기를 바라며 현관문을 연다. 그러나 현관에 아버지의 갈색 구두가 떡하니 놓여 있다. 잠시나마 품었던 기대가 곤두박질친다.
확인 사살하듯 텔레비전 소리가 들린다. 살금살금 걸어가서 고개만 빼꼼 내밀어 안방을 확인한다. 아버지가 이불도 덮지 않고 자고 있다. 머리맡에는 초록색 술병 세 개가 일렬로 늘어서 있고, 아버지가 입은 흰 민소매 티는 텔레비전 불빛에 반사되어 여러 가지 빛깔로 물들고 있다.
민준은 조심스럽게 자기 방문을 연다. 그러자 안방에 “이제 왔냐.”하는 말소리가 들린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취기든 잠결이든 아버지가 민준을 부른 게 아니길 기대하면서 잠시 상황을 지켜본다.
“너 이리 와 봐라.”
또다시 기대가 무너진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면서 표정을 밝게 꾸민다.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는다. 아버지가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더니 혀 꼬부라진 소리로 묻는다.
“너 뭐 하고 다니는데 이렇게 늦게 오냐, 엉?”
“영이네 엄마가 초대해서 그 집에 다녀왔어요.”
거짓말이 술술 나온다. 하지만 조만간 그렇게 될 거니 완벽한 거짓말은 아니다.
“언제쯤 영이를 데리고 올 거냐?”
아버지가 영이를 콕 집어 말한다. 일부러 영이의 엄마만 언급해서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했는데 통하지 않는다. 왕년에 한번 점 찍은 먹이는 절대 놓치지 않았다는 아버지의 소문이 거짓은 아닌 듯하다.
“영이보다 엄마 쪽을 데리고 오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러면서 아버지의 눈치를 살핀다. 아버지가 반쯤 덮인 눈시울을 들고 민준을 쳐다본다. 언젠가는 따스했던 눈빛에 이제는 분노만 담겨 있다.
“무슨 소리냐? 둘 다 데리고 와. 모조리 물어 뜯어주겠어. 스읍.”
눈앞에 있기라도 한 듯 아버지가 침을 게걸스럽게 들이킨다.
민준은 안녕히 주무시라고 꾸벅 인사한 뒤 제 방으로 들어간다. 매트리스 위에 주저앉아 이마를 문지르며 고민한다. 둘 다 데리고 오려면 영이네가 전도하러 동네를 돌 때를 노리는 게 좋다.
영이는 일요일에 돈다고 말했다. 다음 주에도 같이 교회에 갔다가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일요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불뚝 솟아난다.
다음 날, 영이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 시선의 끝에는 구름이 뭉게뭉게 뜬 푸르른 하늘과 잎이 초록색으로 물든 은행나무가 있다. 민준의 눈은 영이의 하얀 목선에 고정되어 있다.
그곳이 아버지의 송곳니에 콱 물리는 상상을 한다. 영이의 괴로워하는 얼굴, 방안에 낭자한 피……. 상상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진다.
“한민준.”
성웅의 부름에 민준은 현실로 돌아온다. 오늘도 산을 타고 왔는지 성웅에게서 땀 냄새가 훅 끼쳐온다. 민준은 고개를 조금 내뺐으나 성웅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더 밀착한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더니 조그만 목소리로 말한다.
“오늘 학교 끝나고 같이 뒷산에 가자.”
그제야 잊고 있던 일이 떠오른다. 지난주 도덕 시간에도 조별 과제를 했는데, 그땐 호강 탐정단인가 뭔가를 언급하지 않길래 포기한 줄 알았다. 열네 살 중학생의 관심사는 시도 때도 없이 바뀌니까. 하지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안 가.”
민준이 단호하게 거절한다.
“왜? 관심 있잖아?”
성웅이 예상치 못했다는 듯 화들짝 놀란다.
“관심 있다고 한 적 없어.”
“가면 관심이 생길 거야, 그치?”
성웅이 옆에 선 한결에게 동의를 구하자, 한결이 날렵한 턱을 서너 번 끄덕인다.
“관심 없어.”
“그러지 말고 너도 우리랑 함께…….”
“아, 관심 없다니까!”
민준이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다. 이 자식들을 잡아다가 아버지 방에 던져 넣고 싶다. 최한결은 비쩍 말라서 별 볼 일 없겠지만 장성웅은 토실토실한 게 피도 많겠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자만 원한다. 그게 어머니의 일로 생겨난 복수심임을 모르지 않는다.
“너희들 무슨 일이야?”
영이가 걸어온다. 민준은 고성을 낸 걸 금세 후회한다.
“아니야.”
민준이 모르쇠로 나오자 영이가 성웅에게 묻는다.
“무슨 일인데?”
“아무것도 아니다. 너는 몰라도 된다.”
성웅의 말투가 로봇처럼 딱딱해서 누가 봐도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 같다. 영이가 눈을 샐쭉 뜨고는 이번엔 한결에게 묻는다.
“한결아, 너는 말해 줄 수 있지? 응?”
한결이 입을 오물오물하더니 괴로운 얼굴로 결국 털어놓는다.
“우린 승모 죽음의 원인을 추적하고 있어.”
민준에게는 비밀이라더니 한번 열린 한결의 입은 도통 멈출 줄 모른다. 성웅까지 가세해서 자신들의 계획을 죄다 쏟아낸다. 처음에는 흥미 없게 듣던 영이는 시체가 잔뜩 쪼그라들었다는 부분에서 눈을 반짝인다. 능수능란한 솜씨로 둘의 이야기를 모두 끄집어낸 영이가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나도 같이 갈래.”
학교를 마치고 민준은 뒷산을 오른다. 영이가 뒷산에 꼭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탓이다. 자신은 영이와 집에 가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동행한 것뿐이다.
뒷산은 산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낮다. 등산로에는 야자매트가 깔려 있고, 계단마다 나무판자를 대 놓아서 오르기 어렵지도 않다. 중간중간에 설치된 운동 기구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운동을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시체가 내던져 있을 장소로는 전혀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성웅은 거대한 몸뚱이에 비해 날렵한 움직임으로 산을 오르더니 갑자기 우뚝 멈춰 선다. 아이들이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고는 산책로 옆에 난 샛길로 앞장서서 걸어간다.
뒤따라온 민준도 헉헉대며 경사진 길을 내려간다. 우거진 나무를 헤치고 들어가자 움푹 팬 곳이 나타난다. 성웅이 그곳을 가리킨다.
“여기가 시체가 있던 곳이래.”
얽힌 나뭇가지가 시야를 차단하고 있어서 무언가를 몰래 투기하기에 적당해 보인다.
“시체의 일부나 핏자국은 없었어?”
숨을 고르면서 한결이 묻는다. 성웅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둘씩 짝을 지어 삼십 분 정도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다. 결국 아무 소득 없이 모임은 파한다. 그러자 민준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앞으로 성웅과 한결이 호강 탐정단인지 뭔지 하면서 자신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뱀파이어의 존재가 들킬 염려도 없을 것이다. 영이를 따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성웅과 한결은 산을 넘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민준과 영이는 학교 쪽으로 돌아와 다시 집으로 향한다. 산에서 내려올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던 영이가 큰길에 들어서자 묻는다.
“승모라는 애, 너네가 한 짓이야?”
평소와 같은 말투지만 민준에게는 비난하는 것처럼 들린다.
“왜, 그러면 안 돼?”
민준이 날을 세운다. 영이에게는 처음 보이는 태도다. 아니라고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도 되는데 ‘너네’라고 구분 짓는 말과 ‘짓’이라고 비하하는 태도가 민준을 가시 돋게 만들었다.
“뭐?”
영이의 얼굴이 잔뜩 구겨진다. 뒤이어 혐오의 빛이 떠오른다.
“아무렇지도 않아?”
“어때야 하는데?”
민준이 냉랭한 시선으로 되묻는다. 영이의 목소리가 격해진다.
“사람이 죽었는데 미안하다든가, 잘못했다든가, 그래야 정상 아냐?”
“정상? 정상적인 게 뭔데?”
인간은 뱀파이어를 이해 못 한다. 뱀파이어도 마찬가지다. 피차일반이니까 적당히 무시하면 된다. 그런데 왠지 영이를 설득하고 싶다. 영이에게만큼은 이해받고 싶다. 민준은 항변한다.
“너네는 돼지 잡아먹잖아. 소도, 닭도 잡아먹잖아. 그럴 때 죄책감 느껴?”
“그거랑은 다르잖아.”
“맞아 달라. 너희가 동물을 잡아먹는 게 당연한 것처럼, 인간의 피를 마시는 건 우리한텐 당연한 일이야. 그저 다를 뿐이라고.”
“넌 안 그러잖아. 넌 인간을 죽이지 않지?”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영이가 민준을 끈덕지게 응시한다. 그 눈빛은 민준에게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28년 전, 그러니까 민준이 세 번째로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때였다.
‘너희 집에 놀러 가자.’
‘싫다니까!
‘아이, 가서 놀자.’
만두가 끈덕지게 들러붙었다. 하얀 두 볼이 포동포동하게 쪄서 별명이 만두였다. 귀찮게 구는 여자애를 밀어내면서도 민준은 내심 반가웠다.
만두와 노는데 아버지가 귀가했다. 술 냄새가 옅게 나긴 했지만 아버지는 여느 아버지처럼 그 애를 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의사인 친척에게 인간의 피를 얻어 연명했다. 그마저도 없으면 숲속에 들어가 동물을 사냥해서 피를 구했다. 그래서 방심하고 말았다.
갑자기 아버지가 과자를 사 오라며 민준에게 돈을 쥐여줬다. 만두와 같이 가려고 하자, 아버지는 만두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며 혼자 다녀오라고 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친절한 태도에 민준은 홀린 듯 집을 나섰다.
슈퍼에서 나온 민준은 과자가 한가득 담긴 비닐봉지를 신나게 흔들며 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비극이 일어나고 있는 줄은 전혀 모른 채.
현관문을 열자, 만두의 목덜미를 물고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만두는 괴상하게 목이 꺾인 채 저항도 못 하고 그대로 피를 내어주고 있었다. 민준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의심하며 현관에 들어섰다.
그 순간 만두와 눈이 마주쳤다. 공포에 물들어 있던 만두의 눈이 희망을 발견한 것처럼 잠시 반짝였다. 하지만 민준은 아버지를 말리기는커녕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멀뚱히 서 있었다. 그러자 만두의 눈동자 위에 원망의 빛이 스몄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그 빛마저 꺼지고 만두는 거죽만 남았다. 뱀파이어로 변할 수도 없었다. 변하려면 피가 삼분의 일이라도 남아 있어야 하는데, 아버지는 그마저도 남기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아버지가 와인을 마신 듯 검붉게 물든 입가를 손바닥으로 스윽 닦았다. 만족스러웠는지 함박웃음을 짓는 아버지의 잇새로 만두의 피가 흘러내렸다. 그걸 본 민준은 후회와 상실감으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민준을 아버지는 꼭 안아주었다.
민준은 영이의 촉촉해진 눈시울을 바라본다. 그간 아버지 방에 여러 인간을 던졌다. 민준이 제 입으로 내뱉은 것처럼 인간과 뱀파이어가 그저 다를 뿐이라면 떳떳해야 한다. 영이에게 내가 이렇게 했노라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말이 영이를 실망시킬 걸 안다. 영이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다. 차라리 과거에 저지른 일들이 없던 일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야, 한민준! 말해봐! 넌 사람을 죽이지 않잖아. 그러면 안 된다는 거 알잖아!”
영이가 절망이 깃든 목소리로 다그친다.
‘아니? 죽는다는 걸 알면서 집으로 초대해. 이게 나야.’
민준은 속말을 털어놓으려 했다. 그렇게 하면 차라리 홀가분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튀어나온 말은 고작 이런 것이다.
“너도 애들 전도해서 교회 데리고 가는 거, 죄책감 느끼지 않잖아?”
당황해하는 영이에게 쐐기를 박는다.
“너도, 그러면 안 된다는 거 알잖아?”
영이의 두 눈동자가 흔들린다. 정곡을 찌른 모양인데 승리감보다 후회가 밀려온다. 영이가 등을 돌리고 손등으로 눈가를 훔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민준도 울어버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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