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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서휘 Sep 20. 2024

연재소설_8화 너 왜 나한테는 가자고 안 해?

시끌벅적한 교실 안. 민준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어 있다. 영이의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영이와 태영이다. 태영이 무슨 말을 던지자 영이가 까르르 웃는다. 입 안이 훤히 보일 정도로 크게. 민준이 아닌 태영 앞에서 그 미소를 보여준다는 게 적잖이 신경 쓰인다.


노트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부욱 찢어 꾸깃꾸깃 뭉친다. 그걸 들고 아주 느린 걸음으로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쓰레기통에 가까워지자 영이와 태영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린다.


“영이야, 너희 어머니가 주신 그릇 세트 있잖아, 그거 엄마가 엄청 좋아하는 미국 브랜드래.”


“정말? 우리 엄마 말로는 너희 집에 딱 어울릴 거라고 그러던데, 어때?”


“맞아. 맛있는 요리 해서 그 그릇에 대접한다고 엄마가 너 데리고 오래. 너희 엄마랑 같이 와.”


“꺄악! 너희 집에 초대해 주는 거야?”


영이가 어쩔 줄 모르겠다는 식으로 환호를 지른다. 저 반응이 다 거짓이라는 걸 태영은 모를 것이다. 민준은 우월감에 젖는다.


“맞다! 이번 주 일요일에 올 거지?”

영이가 묻는다.


“응! 나는 엄마 따라서 갈 테니까 거기서 만나.”

태영이 대답한다.


“그래! 새로 온 친구한테 문화상품권 주거든? 근데 이번 주에 오면 두 배로 준대!”


“아, 정말? 좋아. 꼭 갈게. 약속!”


태영이 영이의 새끼손가락에 자기 새끼손가락을 건다. 민준은 그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


“민준아!”


갑자기 영이가 민준을 부른다.


“어? 왜?”

“우리한테 볼일 있어?”

“아니, 왜?”

“계속 거기 서 있길래.”


민준은 그제야 자신이 쓰레기통 근처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는 걸 깨닫는다. 당황한 기색을 숨기고 자리로 돌아온다.     


***


하교하는 길. 민준은 입술이 삐죽 튀어나와 있다. 영이는 기분이 좋은 듯 신이 나서 어제 본 드라마에 대해서 떠들고 있지만, 민준은 하나도 즐겁지 않다.


“남자 주인공이 거기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 ……야! 내 이야기 듣고 있어?”

“어. 말해.”

“야!”


영이가 걸음을 멈추더니 민준의 등짝을 한 대 친다. 영이의 관심이 반가우면서도 민준은 삐친 태도를 풀지 않는다.


“왜.”

“너 왜 그래?”

“뭐가.”

“내 말에 대꾸도 안 하고, 듣는 둥 마는 둥. 내가 귀찮아?”

“아니.”

“근데 왜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배 속부터 기어 올라와 목구멍을 간질인다. 말을 꺼내자면 속이 좁아 보일 것 같고, 안 하자니 속이 터질 것 같다. 고민 끝에 결국 입을 연다.


“너 왜 나한테는 가자고 안 해?”

“어딜?”


영이는 아주 모르는 눈치다. 태영이와의 대화를 엿들어서 알게 된 것을 밝히지 않고서는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없을 듯하다.


“일요일에 어디 간다며…….”

“아…….”


궁금증으로 가득했던 영이의 얼굴이 금세 시큰둥해진다.


“넌 오지 마.”

“왜? 내가 가난해서?”


영이가 놀란 듯 두 눈을 들썩인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다시 뚱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응. 넌 뽑아 먹을 게 없잖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민준의 가슴을 두들겨 팬다.


민준과 영이는 말없이 나란히 걷는다. 이제 곧 영이의 집에 도착한다. 민준은 영이의 옆모습을 곁눈질한다. 분홍색으로 반들거리는 입술이 도저히 열릴 생각을 안 한다. 침묵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괜히 어리광 부려서 이런 상황을 만든 자신이 바보 같다. 말을 꺼내기 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다.


철문 앞에서도 영이는 말이 없다. 민준은 조급해진다. 뭐라도 말을 붙여서 꽝꽝 언 분위기를 녹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르겠다.


거대한 문이 저절로 열린다. 그걸 보자 이대로 영이를 들여보내면 안 된다는 조바심이 극에 달해 발을 가만히 놔둘 수가 없다. 뭐라도 말하려고 입술을 옴짝달싹하는데 영이가 먼저 말을 꺼낸다.


“뱀파이어들은 종교가 있어?”

“없어.”

민준이 재빠르게 대답한다.

“오히려 무서워하지. 특히 십자가…….”


말을 하다가 아차 싶다. 영이의 집이 온통 십자가투성이였던 게 떠오른 것이다. 상황을 수습하려 성마르게 떠들어댄다.


“십자가라고 다 무서워하는 건 아냐. 은으로만 되어 있지 않으면, 또 요즘은 불순물이 많이 섞여서 덜 강력한 거 같기도 하고…….”


“넌 사람을 잘 믿어?”

민준의 말을 자르고 영이가 묻는다.


“아니.”

민준은 고개를 서너 번 젓는다. 엄마가 죽은 후로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그럼 뭘 믿어?”


민준은 잠시 떠올려 본다. 민준이 믿는 것……. 긴 세월을 사는 뱀파이어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 아버지도 그럴 것이라는 것…….


민준이 대답이 없자 영이가 귀찮다는 듯이 말한다.


“아무튼 귀가 얇진 않은 거지? 그럼 됐어. 가고 싶으면 일요일에 같이 가.”


그러고는 집으로 들어간다. 돌계단을 올라가는 영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민준은 생각한다.


‘어찌 됐든 같이 가자는 거지?’


그 순간 마음이 둥실 떠오르면서 흐뭇한 미소가 비어져 나온다.



일요일 아침. 민준은 온몸이 땀 범벅이다. 옷을 꺼내 입었다 벗었다 하는 일이 생각보다 고역이다. 덜덜거리는 선풍기 하나로는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막을 수 없다.


고심 끝에 제일 깔끔해 보이는 하얀색 긴팔 면티와 청바지를 입고 집을 나선다. 오늘은 일요일마다 가던 놀이터와 반대 방향으로 걷는다. 영이의 집이 있는 쪽으로.


영이의 집 앞에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시동을 건 채 서 있다. 민준이 가까이 가자 뒷좌석 창문이 스르륵 내려간다. 양 볼을 주황색으로 칠한 영이가 얼굴을 빼꼼 내민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는 둥근 챙이 달린 하얀 천 모자를 쓰고 있다. 민준은 제 티를 본다. 맞춰 입은 느낌이 나서 괜히 멋쩍다.


“타.”


영이가 짤막하게 명령한다. 민준은 영이의 옆에 탄다. 미리 켜둔 에어컨 바람이 불에 댄 듯 뜨거운 피부를 식힌다. 백미러로 민준의 거동을 지켜보던 정장 입은 남자가 핸들을 돌린다.


“필요할 거야. 저번에 우리 집에 왔을 때 주려고 했는데 못 줬네.”


영이가 종이봉투 하나를 건넨다. 안에는 캡 모자와 후드 티셔츠가 들어 있다. 민준이 이게 뭐냐고 묻듯 영이의 얼굴을 쳐다보지만, 영이는 무심하게 창밖으로 시선을 던질 뿐 말이 없다.


도로로 나간 자동차는 잠깐 달리더니 이내 어떤 건물 지하로 들어간다. 주차장 규모가 어마어마한데 차들이 빼곡하게 주차되어 있다.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민준은 입고 온 티 위에 영이가 준 옷을 덧입고 후드까지 덮어쓴다. 그 위에 캡 모자를 푹 눌러 썼는데도 몸의 떨림은 멈출 줄 모른다.


“누가 보면 연예인인 줄 알겠다.”


영이가 키득댄다. 민준은 그제야 움츠렸던 몸을 편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자신이 영이를 웃게 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올라간다. 어디서 모여들었는지 의아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같은 방향으로 이동한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부부부터 아이를 안고 가는 젊은 부부, 파릇파릇한 청춘 남녀까지 다양하다.


그 무리에는 엄마 손을 잡고 걸어가는 영이 또래의 아이도 있다. 민준은 자기 집에 방문한 영이의 모습이 저랬겠거니, 하며 떠올려 본다.


행렬에 떠밀려 가다 보니 어느새 예배당 안이다. 긴 의자가 정면을 향해 부채꼴 모양으로 늘어서 있는데, 자리가 지정되어 있는지 사람들이 알아서 퍼져 나간다. 단상으로 향하는 영이를 뒤따르다가 민준은 휘청한다. 공연장을 방불케하는 넓은 무대 위에 오 미터 크기의 십자가가 굳건하게 서 있다. 나무로 되어 있지만 위압적이다.


“괜찮아? 그니까 오지 말라니까.”


영이가 민준의 팔을 잡아 부축한다. 영이의 따스한 손 덕분에 한기가 좀 가신다.


영이가 가는 곳이 교회일 것은 예상했다. 십자가가 있을 것도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거대한 게 있으리라곤 예상 못 했다.


교회는 민준이 있어서는 안 될 곳이다. 이곳의 기운을 집에 가지고 가면 아버지는 금세 알아차릴 거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있다면 얼마나 길길이 날뛸지 상상도 하기 싫다. 그런데도 여기에 굳이 왔다는 사실에 자신도 어이가 없다. 그러나 후회하진 않는다. 


둘은 맨 앞에서 두 번째 줄로 가서 앉는다. 먼저 앉아 있던 남자아이 둘과 여자아이 둘이 밝은 얼굴로 영이에게 인사를 건네지만, 영이는 무심하게 “응.”하고 답할 뿐 전혀 웃지 않는다.


영이의 표정이 풀어진 건 태영이 온 후다. 자연스럽게 민준의 옆에 앉은 태영이 반갑다며 영이의 손을 잡고 흔든다. 영이도 그 손을 거부하지 않고 학교에서만 짓는 미소로 화답한다. 


민준은 셔츠에 재킷까지 차려입고 온 태영을 흘겨본다. 왠지 모르게 이 애가 꼴 보기 싫다. 태영의 재킷 가슴팍 주머니에 꽂힌 행커치프를 뽑아 그의 얼굴에 던지고 싶다.


갑자기 실내가 암전된다. 어두워지자 민준의 붉은 눈이 빛난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러자 태영이 당황한 듯 고개를 사방으로 두리번댄다. 


영이는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는데, 갑자기 영이의 오른손이 민준의 왼손을 덮는다. 그리고 영이가 민준을 향해 몸을 기울더니 “너도 일어나.”하고 속삭인다. 영이의 입에서 나온 공기가 귀를 간지럽힌다. 민준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때 단상 위로 사람들이 줄줄이 올라온다.


갑자기 불이 켜진다. 민준은 눈을 잔뜩 찡그린 채 단상 위에 네 줄로 선 사람들을 쳐다본다. 한 줄에 열 명씩 모두 마흔 명이다. 빛에 적응되자 맨 앞줄 여섯 번째에 서 있는 영이의 엄마가 보인다. 모두 배에 십자가가 그려진 새하얀 가운을 맞춰 입고 있다. 


잠시 후 피아노의 낮은음만 치는 듯한 선율이 흐르면서 웅장한 노래가 예배당에 울려 퍼진다. 그러자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상체를 수그려 두 팔을 축 내려뜨리고 좌우로 천천히 흔든다. 그걸 신호로 교회 안의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머리 위로 두 팔을 뻗는다. 단상에 선 사람들이 선창한다.


“재앙이 멀지 않았네. 모두 회개하라.”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몸을 살랑살랑 흔들며 따라 부른다. 민준은 무언가에 홀린 듯 합창하는 사람들을 이맛살을 찌푸린 채 둘러본다. 음침한 노래를 따라 부르며 통일된 동작을 하는 모습이 기괴하게 느껴진다.


“너도 해.”


양팔을 들고 있던 영이가 오른손만 내려 민준의 손을 잡고는 머리 위로 올린다. 영 탐탁지 않지만 민준은 영이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한다.


노래가 끝나고 정장 위에 흰 가운을 입은 나이 지긋한 남자가 올라와 설교를 시작한다. 설교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이어진다. 민준은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몇 번이나 꾸벅 졸다가 깬다.


설교가 끝나자 흰 양복을 입은 남자와 흰 투피스 정장을 입은 여자가 통로마다 선다. 손에는 러시아에서 쓰는 모자를 뒤집어 놓은 듯한 모양의 통을 들고 있다. 그것을 맨 앞사람에게 넘긴다. 사람들이 통에 손을 집어넣었다 빼고는 옆 사람에게 건넨다. 


통이 태영에게 전해진다. 어떻게 알았는지 태영이 만 원짜리 지폐를 안에 넣는다. 민준은 준비한 돈이 없어서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살핀다. 다들 정면에 설치된 스크린에 뜬 찬송가를 따라 부르는 데 여념이 없다. 통을 그대로 옆으로 넘긴다.


영이의 차례다. 영이의 행동을 지켜보던 민준은 제 눈을 의심한다. 통에 넣었다가 빼는 작은 손에 지폐가 한 줌 딸려 나온 것이다. 좌우를 살피던 영이가 민준과 눈이 마주치자 설핏 웃더니 그대로 민준이 입은 후드 티의 배 쪽에 달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다. 주머니에서 빠져나가는 손에는 아무것도 없다.


민준이 걱정과 놀람이 섞인 얼굴로 바라보자, 영이는 입술 가운데에 검지를 세우고 입 모양으로 쉿, 한다. 그러면서 눈을 반달 모양을 하고는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순간 민준의 심장이 철렁한다. 자기가 훔친 것도 아닌데 은 십자가에 몸이 닿은 것처럼 입술조차도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러니 목격한 걸 묵인하는 수밖에.


예배가 끝나자 영이 엄마가 다가온다. 흰 가운을 벗고 하얀 원피스 차림이다. 훤히 드러난 팔뚝이 하얀 몽둥이처럼 말랐다.


“태영이 왔구나.”


영이의 엄마가 반긴다. 목소리가 지난번 스마트폰 너머로 들은 목소리와 아예 딴판으로 부드럽다.


“우리 민준이도 왔구나! 너무 기쁘다.”


민준을 발견하고는 민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지독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러 민준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혀 손길을 피한다. 그것마저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영이의 엄마가 환하게 웃는다. 그러자 두 눈이 반달 모양으로 변한다. 민준은 영이의 아름다운 미소가 엄마에게 물려받았다는 걸 알아챈다.


“영아, 친구들한테 선물로 주렴.”


영이의 엄마가 가죽이 번들거리는 핸드백에서 봉투 두 장을 꺼낸다. 영이가 “감사합니다.”하고 깍듯이 인사하고는 민준과 태영에게 각각 건넨다. 민준이 받아 들자, 영이의 엄마가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고는 말한다.


“민준아, 다음에는 부모님하고 같이 와.”


민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속으로만 콧방귀를 뀐다.


‘당신이 우리 집에 와야지. 안 그래?’


표지 Image by Vicki Hamilton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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