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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서휘 Sep 25. 2024

소설_10화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됐으면

월요일의 말다툼이 있고,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민준은 혼자 집에 갔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청소 당번이기도 했고, 영이도 친구들과 볼일이 있어 보였으니까. 하지만 같이 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원래 같이 가자고 말하는 건 항상 영이였어. 난 그저 따라갔을 뿐이지. 그렇게 넘겨보려고 해도 민준은 잘 안다. 자기의 옹졸함을. 영이가 먼저 다가와 주길 바라는 거다. 


미안해서 사과하고 싶기도 하지만, 영이가 먼저 와서 살갑게 말 붙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더 크다. 그러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같이 집에 갈 텐데.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쌍쌍바를 사서 절반 똑 떼어줄 텐데.


오락가락하는 마음이 영 찜찜해서 빨리 털어버리고 싶은데, 영이는 쉬는 시간마다 태영을 비롯한 얼굴만 아는 몇몇 아이들에게 항상 둘러싸여 있다. 민준은 다음 시간에, 다음 시간에, 내일, 다음 시간에, 내일, 이렇게 어, 어, 어, 하는 사이 금요일까지 떠밀려 왔다.


이제 교실에서 민준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뒷산에 다녀온 이후로 장성웅과 최한결은 심각한 얼굴로 노트에 무언가를 끼적이기도 하고 속닥이며 의논을 나누기도 한다. 무언가를 공모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민준에게 손을 뻗지는 않는다.


석 달 전만 해도 이런 적적함이 좋았는데 지금은 무척 쓸쓸하게 느껴진다. 특히 영이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릴 때면 더욱 그러하다. 지금도 영이는 어떤 남자애들과 함께 있다. 한 남자아이가 영이에게 짓궂은 장난을 친다. 민준은 그놈의 목에 가상의 점 두 개를 찍고 피를 쭉쭉 빨아내는 상상을 하며 그놈을 혼내준다.


오늘도 영이에게 말 한마디 못 붙여 보고 수업이 다 끝났다. 민준은 느릿느릿 책가방을 싼다. 괜히 서랍 안쪽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기도 하고, 사물함도 열어본다. 하지만 영이는 집에 갈 생각이 없는지 애들과 깔깔대며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민준은 포기하고 뒷문을 나선다. 터벅터벅 복도를 걷는다.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신는다. 그때 누군가가 민준의 이름을 부른다. 너무나도 잘 아는, 반가운 목소리다. 속으로 삼 초를 세고, 고개를 돌린다. 


달려오는 영이가 보인다. 민준은 제자리에 서서 잠시 기다린다. 영이가 민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숨을 고른다. 마치 처음 만난 그날처럼.


“집에 같이 갈래?”


영이가 묻는다. 명령조가 아님에 민준은 놀란다. 하지만 어떤 말투든 대답은 같다.


학교 정문을 빠져나가면서 민준은 연신 영이의 눈치를 살핀다. 영이도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씹을 뿐 말이 없다. 몇십 번이나 같이 걸은 거리인데 오늘따라 길게 느껴진다. 


민준은 서먹함의 이유를 찾아본다. 말다툼 때문에 영이가 화난 걸까? 내가 먼저 사과하면 분위기가 좀 풀릴까? 아무래도 내가 잘못한 게 맞으니까. 고민 끝에 민준이 입을 떼려는 순간, 영이가 먼저 말한다.


“이거 줄게.”


영이가 손바닥보다 조금 큰 종이가방을 건넨다. 겉면에 화장품 회사의 로고가 박혀 있다. 얼굴만 쳐다보느라 영이의 손에 뭐가 들려 있는 것도 몰랐다.


“선크림이야. 지난번에 거의 다 썼다고 해서.”


절반이 남았다고 말했었다. 내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는 걸까? 민준은 약간 서운하다. 하지만 영이는 원래 종잡을 수 없는 아이다. 게다가 뭐든 챙겨주려 하고 있지 않은가. 그 마음이 고마워서 보답하고 싶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민준이 묻자, 영이가 좀 놀란 얼굴을 한다. 하지만 이내 풋, 하고 웃는다. 눈이 반달로 변한다. 그 달 위에서 미끄럼타듯 민준의 마음이 붕 뜬다.


편의점으로 가서 민준은 잽싸게 쌍쌍바를 집는다. 그러자 영이가 타박한다.


“또 쌍쌍바야? 맛있어?”

“응. 너도 먹어 봐.”


민준이 권하자 영이가 미심쩍은 얼굴로 쌍쌍바를 집는다. 민준은 영이가 하듯, 아이스크림을 낚아채 계산대로 간다.


“삼천 원입니다.”

“네?”


민준이 당황해하자, 갓 스물이나 된 듯한 아르바이트생이 귀엽다는 듯한 눈빛으로 민준을 내려다본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해도 백 원짜리 쌍쌍바가 천오백 원으로 바뀌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의 동요를 영이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떨떠름한 손길로 가방을 앞으로 돌려 메고 지퍼를 연다. 깊숙한 곳을 뒤져 천 원짜리 세 장을 꺼낸다.


“하나만 먹자.”


언제 들어왔는지 뒤에 서 있던 영이가 아이스크림 하나를 제자리에 갖다 둔다. 민준은 오백 원을 거슬러 받고 나온다. 창피하기 그지없다.


포장지를 뜯은 영이가 쌍쌍바의 막대기를 쥐고 짝 나눈다. 아이스크림이 정확히 절반으로 쪼개진다.


“봤어?”


영이가 우쭐해하며 쌍쌍바 반쪽을 건넨다. 그 모습이 귀여워 민준은 미소가 지어진다.


“우리 집에서 놀자.”


영이가 앞장선다. 원래의 말투로 돌아와 있다. 민준은 악몽에서 깨고 현실로 돌아온 듯한 안도감을 느낀다.

집에 가자 영이가 닌텐도 게임기를 두 개 꺼낸다. 민준에게 한 개 주면서 같이 집을 꾸미자고 한다. 


아기자기한 동물 캐릭터가 등장하는 게임이다. 어린애들이나 하는 유치한 게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민준은 꽤 몰입한다. 가상 세계에서도 영이는 민준을 집에 초대한다. 나무 책상과 러그 한 장뿐인 민준의 집에 비해 영이의 집은 아주 초호화다. 분홍색 침대, 노란색 책상, 하늘색 냉장고…… 온통 흰색인 제 방과 달리 총천연색으로 꾸며져 있다.


그렇게 두 시간을 놀았다. 영이네 집을 나선 민준은 붕붕 뜬 기분으로 언덕을 오른다. 언덕마루에서 호흡을 고르고 부리나케 언덕을 내려간다. 동네가 점점 어두워진다.


어느새 용추빌라 앞이다. 시커먼 계단 앞에서 들뜬 감정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현관문을 열자, 컴컴한 거실이 민준을 반긴다. 조금 들어가자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푸른빛으로 번쩍이는 안방에 흰 민소매 티를 입고 누워 있는 아버지가 보인다. 


민준은 그제야 ‘맞다, 이게 진짜지.’하고 현실을 자각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는 민준을 불러 세우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종말의 날이 미루어진 것처럼 안도한다.


영이와 다시 집에 같이 가게 됐다. 날이 부쩍 더워진 것 말고는 모든 게 평화로웠다. 일주일이 무사히 지나자 민준은 이젠 정말로 긴장의 끈을 놓아도 되나, 하고 조심스럽게 희망을 품는다.


오늘도 영이네 집에서 놀고 귀가하는 길이다. 평소처럼 해가 지기 전에 나가려고 했는데, 영이가 금요 철야인가 뭔가 때문에 그 여자가 늦게 온다고 하면서 민준을 붙잡았다. 영이네 집에서 나왔을 땐 전봇대에 달린 주황색 불이 모두 켜져 있었다.


민준은 룰루랄라 하며 언덕길을 내려간다.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몸이 근질근질해서 뜀박질을 하고 싶지만 자중한다. 잘못하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손에 든 닌텐도 게임기가 망가질 수도 있다. 게임 속 집이 너무 후지다며 집에 가서 좀 꾸며오라고 영이가 준 것이다.


집이 가까워진다. 민준은 평소와 다른 동네의 분위기를 감지한다. 핏물을 뿌린 듯 붉게 물드는 하늘에 개 짖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온 동네 개들이 서로 싸우듯 앞다투어 짖고 있다.


지영 해장국이 보인다. 불 들어온 간판이 하얗게 빛나고 있다. 그 아래에서 남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 명은 지영이고, 다른 한 명은 키가 크고 머리가 길다. 뒤태가 굉장히 훤칠하다. 조금 더 다가가자 남자의 옆얼굴이 보인다. 


아버지다! 민준은 공포에 질린다. 서둘러 닌텐도를 가방에 넣는다. 그다음 몸을 숨기려고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다가 지영과 눈이 마주친다. 지영이 머리 위로 손을 들어 반긴다.


“민준아!”


아버지도 고개를 돌린다. 민준을 발견하자 활짝 웃는다. 루마니아에서 보았던 그 미소를 지으며. 민준은 아버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달려가서 와락 안길 뻔한 걸 겨우 참은 거다. 저건 다 거짓인 걸 아니까. 한국에서는 먹이를 가져다줄 때가 아니면 저 미소를 보여준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 아들 왔구나!”


아버지가 손으로 민준의 머리를 흩트린다. 아주 사랑스럽다는 듯이.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민준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시체처럼 차가운 아버지의 팔이 목을 스친다. 민준은 목을 움츠린다.


“민준아,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어디에 갔다가 와?”


지영의 물음에 민준은 아버지의 눈치를 본다. 지영의 입을 틀어막고 싶다. 다행히 아버지는 크게 관심이 없는 듯 가게 안에 시선을 두고 있다. 민준은 조별 과제를 하고 왔다고 둘러댄다.


“저녁은 먹었어? 음식 좀 싸 가. 괜찮을까요?”


지영의 시선이 아버지에게로 향한다. 얼굴에 설렘이 가득하다. 아버지는 온화한 미소와 가볍게 끄덕이는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아버지, 제가 받아서 갈게요.”

민준도 명랑한 소년의 목소리를 꾸며낸다.


“그럴래?”


아버지가 한 벌밖에 없는 양복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 꺼내는 시늉을 한다. 동작이 아주 느린 걸로 보아 애초에 낼 생각이 없다. 낼 돈이 없을지도.


“아니에요, 민준 아버님. 오늘 단체 손님이 왔다가 취소해서 음식이 많이 남았지 뭐예요. 저희도 음식이 남으면 다 버려야 하거든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아빠 좋고, 딸 좋고, 어머!”


제 너스레에 놀란 지영이 입을 틀어막는다. 부끄러운지 황급히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문이 닫히자 아버지가 가게의 이름을 적어 붙인 시트지 사이로 지영을 눈으로 좇는다. 지영이 주방에 들어가자 지갑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아들. 영이라는 애 안 데리고 오면 다음은 쟤야.”


아버지가 고갯짓으로 지영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고는 용추빌라로 저벅저벅 걸어간다.


민준은 머리를 굴려 본다. 아버지가 지영을 먹어버리면 반드시 이곳을 떠야 할 것이다. 이 동네에서 지영 해장국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러면 영이는 안전해진다. 그렇게 되면 좋겠다.


그렇지?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찜찜한 거지?


지영이 가게 문을 어깨로 밀고 나온다. 양손에 상호명이 적힌 비닐봉지가 들려 있다. 비닐봉지 안에는 플라스틱 용기와 스티로폼 용기가 하나씩 들어 있다.


“하나는 집 가서 아버지랑 먹고, 하나는 얼렸다가 나중에 꺼내 먹어.”


지영이 비닐봉지를 건넨다. 민준은 받아 들면서 경고한다.


“아버지랑 이야기하지 마.”

“뭐?”

“죽고 싶지 않으면 아버지랑 이야기하지 마.”

“뭐야? 이 쬐깐한 게, 누나한테!”


지영이 주먹으로 알밤 먹이는 시늉을 한다. 그러더니 가게 안을 살피고 무언가 생각난 듯 민준에게 묻는다.


“민준아, 시간 좀 있어?”     


지영 해장국 안. 지영이 제 앞에는 술을 놓고 맞은편에 앉은 민준에게는 사이다를 건넨다.


“오늘 엄마는 저녁 장사 마치고 바로 계 모임 갔어.”


그러니 안심하라는 뜻인가? 민준은 딸깍하고 술병을 따는 지영을 한심해하는 얼굴로 쳐다본다. 집에 바로 들어가지 않아서 좋긴 하지만, 저 초록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짠!”


그걸 시작으로 지영은 빠른 속도로 술병을 비워나간다. 새로운 병을 가지고 올 땐 냉장고에서 꺼낸 순대와 김치도 함께 들고 온다.


“먹어. 난 보기만 해도 메슥거린다.”


민준 앞으로 순대를 담은 반찬통을 밀어 넣는다. 그러고 자신은 김치를 안주로 소주 한 잔을 또 들이켠다.


두 잔쯤 더 들이켰을 때 지영은 아주 익숙한 모습이 됐다. 반쯤 풀린 눈, 발그레한 볼, 또박또박 말하려고 애쓸수록 무너져 가는 발음. 두 팔 위에 얼굴을 올리고 눈만 치켜뜬 채 민준에게 묻는다.


“내가 네 아부지 좋아해서 삐쳤냐?”

“아뇨.”

“내가 네 아부지 안 좋아했으면 좋겠어? 근데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됐으면 나, 이혼도 안 했어.”


민준이 대답도 하기 전에 지영이 언성을 높인다.


“왜! 내가 이혼녀라서 너두 싫어? 내가 좋아서 이혼녀가 된 줄 알아? 그 새끼가 쓰레기라구. 내가 아니라.”


지영이 자기 가슴을 탕탕 치더니 풋, 하고 웃는다.


“아, 나 그 새끼가 쓰레기인 거 알았다. 근데 왜 결혼까지 했을까? 결혼하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지. 우리 엄마두 그랬어. 남자는 결혼하면 소속감이 생겨서 달라진다구. 그 새끼가 맨날 술에 취해서 들어오고 다른 여자 만날 때는 뭐라고 했냐면, 애 생기면 책임감 생겨서 달라진다구. 엄마도 아빠랑 이혼했으면서 말은 잘해. 낄낄. 아무튼! 그래서 내가 애 만들라구 뭔 짓까지 한 줄 알아?”


지영이 뭔가 말할 것처럼 몸을 기울이더니 이내 손을 휘휘 젓는다.


“아, 내가 애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무튼! 유산해서 다행이야. 그 새끼 애까지 뱄으면 내가 어떻게 사니. 아니지! 우리 민준이같이 귀여운 애 낳았으면 또 잘 살았겠지.”


지영이 민준의 양 볼을 잡더니 주욱 늘어뜨린다. 민준은 자신의 사분의 일 정도밖에 안 산 지영의 태도에 잔잔한 분노가 일지만 그대로 내버려 둔다. 경험상 초록병에 무너진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다.


지영이 눈꺼풀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껌뻑껌뻑하더니 결국 테이블에 엎드려 잠이 든다. 민준은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뿜는다. 등허리 뼈가 드러난 지영의 등 위로 혼잣말을 뱉는다.


“쓰레기 다음으로 찾은 남자가 우리 아버지라니. 남자 보는 눈이 지지리도 없네.”


이 여자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벽에 걸린 앞치마를 죄다 가져와서 지영의 등에 살포시 올려놓는다. 그러고는 가게의 등을 모두 끈다.


잠시 후, 지영 해장국을 나간 민준은 다시 들어와 주방 쪽 불만 켜고 다시 나간다.


표지: Image by Rabia029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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