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경고가 있고 또 이 주일이 지났다. 잔잔한 호수처럼 흐르는 날들을 민준은 불안해하며 보냈다.
장마전선이 몰려와 며칠째 흐린 날이 이어지고 있다. 찔끔 내리는 비는 놀리듯 불쾌지수만 올린다. 차라리 장대비가 쏟아지면 좋겠다는 말이 교실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이제 시작할 때야.”
슬그머니 다가온 장성웅이 비장하게 말한다. 마치 비밀결사대라도 된 것처럼 연신 사방을 주시한다.
“저기 봐.”
성웅이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곳엔 태영이 앉아 있다. 두 눈이 퀭하다. 민준에게 처음 말 걸 때의 당찬 기운은 찾아볼 수 없다. 안 그래도 요새 영이와 어울리지 않아 궁금한 참이었다. 어디 아픈 게 아닐까 싶어 괜히 고소하다.
“뭘 시작하는데?”
“이것 봐!”
성웅이 갑자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민준에게 들이민다.
“흐익!”
민준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눈앞에 은 십자가가 있다. 손바닥만 한 크기밖에 안 되지만 너무 가깝다.
“왜, 왜 그래?”
성웅이 민준의 어깨를 감싼다. 그 탓에 성웅의 손에 들린 십자가가 민준의 볼에 닿는다.
“악!”
민준이 십자가를 탁 쳐낸다. 십자가가 나동그라지면서 교실 바닥에 뒹군다.
민준은 제 볼을 쓰다듬는다. 십자가에 닿은 부위가 드라이아이스를 덴 것처럼 소름 돋게 차갑고 또 뜨겁다. 그러다가 시선을 느낀다. 몇몇 아이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민준을 지켜보고 있다. 민준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아이, 깜짝이야. 벌레인 줄 알았잖아.”
“한민준, 보기보다 겁이 많구나.”
성웅이 씩 웃는다. 왠지 자기를 귀여워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지만 정체를 들키느니 어리숙한 취급을 당하는 게 낫다.
성웅의 옆에 섰던 한결이 민준의 옆으로 다가온다. 상체를 숙이고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조그맣게 속삭인다.
“뱀파이어들은 마늘하고 십자가를 싫어한대. 그래서 방금 민준이 너처럼 반응한다는 거야. 우린 이걸 들고 돌아다니면서 반응을 지켜볼 거야.”
“동네 사람들 모두?”
민준이 의문을 제기하자 한결이 바로 꼬리를 내린다.
“아, 그건 좀 그런가? 그럼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자. 예를 들면 우리 교실부터. 범인은 피해자 주변을 맴도는 법이지.”
한결이 명탐정이라도 된 것처럼 굴면서 검지로 안경테를 쓰윽 올린다.
“성웅아, 한결아. 내 의견 좀 들어봐.”
어디선가 나타난 영이가 의견을 낸다.
“승모라는 애 체격이 좀 있었다며. 그런 애를 단숨에 제압해서 피까지 빨아먹으려면 1학년은 절대 못 할 거야. 안 그래?”
동의하는 듯 성웅과 한결이 고개를 끄덕인다.
“1학년 교실부터 도는 건 의미가 없어. 시간 절약을 위해 3학년 선배들부터 찾는 게 좋겠어.”
“좋아. 그럼 방과 후에 마늘하고 십자가를 사서 3학년 교실에 넣어 보자. 분명 반응이 있을 거야.”
한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민준은 볼을 문지르며 감탄한 눈으로 영이를 바라본다. 말재간이 여간 뛰어난 게 아니다. 그 순간 영이가 민준을 향해 남몰래 윙크를 던진다. 민준은 볼을 문지르던 손을 아래로 떨어뜨린다. 둘만의 비밀을 공유한 듯한 짜릿한 느낌에 아픔이 싹 가신다.
“나도 끼워 줘.”
어느새 태영이 옆에 와 있다. 푸석한 얼굴은 그대로지만 퀭했던 두 눈이 예리하게 빛난다.
“뭐…… 뭘?”
성웅이 티 나게 당황한다.
“찾고 싶어, 그 자식들. 찾아서 죽이고 싶어.”
태영이 말한다. ‘찾아서 죽이고 싶다’는 말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말해서 민준의 귀에만 들린 듯하다.
민준은 태영의 목덜미를 노려본다. 인간 주제에, 감히 뱀파이어를?
“우리가 무슨 말만 하면 뭐라 하더니 인제 와서 무슨 일이야?”
한결이 소곤대며 묻는다. 그러자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려는 듯 태영이 의자를 가지고 와서 앉는다. 상체를 한껏 숙이고 말한다.
“승모가 그렇게 되고, 나도 누구의 소행인지 조사하고 있었어. 그런데 너희들이 먼저 알아낸 것 같더라고. 승모를 그렇게 만든 게 뱀파이어놈들이라며?”
“어, 어떻게 알았어?”
성웅이 제법 큰 소리로 되묻는다. 조금만 귀 기울이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난 복수를 위해 힘을 기르고 있어. 함께 하자.”
태웅의 눈빛이 잘 벼른 칼날처럼 날카로워진다.
“그럼 준비가 되면 말할게. 다들 용돈 두둑이 준비해, 알겠지?”
한결이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그렇게 비밀결사대의 회의가 끝나고 다들 제자리로 돌아간다. 민준은 이 어린아이들의 엉뚱한 사고방식과 엄청난 행동력에 질려버린다.
영이와 하교하는 길. 윙크를 던지던 영이는 온데간데없고 민준의 옆에는 먹구름이 잔뜩 낀 영이가 있다. 일주일에 다섯 번은 오가는 길을 헤매지 않나, 파란불로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멍하니 서 있질 않나. 어딘가 혼이 나가 있는 듯한 영이를 유심히 살피면서 민준은 살짝 뒤에서 걷는다.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비죽 솟는다.
영이의 집에서 한 블록 떨어진 길. 오늘은 어서 영이를 보내고 싶다. 거죽뿐인 영이와 걷는 건 혼자일 때보다 괴롭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골목에서 자동차가 튀어나온다. 영이는 그것도 알아채지 못한 듯 저벅저벅 걷고 있다.
“영이야!”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순발력으로 영이의 팔을 낚아챈다. 천천히 고개 돌리는 영이는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도 모르는 눈치다.
“어, 왜?”
“조심해.”
“아……. 그래.”
그러곤 또 걷는다. 민준은 당황한다. 화내는 영이, 짜증 내는 영이, 명령하는 영이, 다 겪어봤지만 넋이 나간 영이는 처음이다.
영이의 집 앞. 철문이 열리고 영이가 들어가려 한다. 민준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영이의 뒷모습을 좇을 뿐 아무 대응도 할 수가 없다. 아까 솟았던 용기가 다시 솟으면 좋겠다고 빌어보지만 바보처럼 가만히 서 있는다.
“민준아.”
영이가 돌아선다. 그러고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잠시 고민하더니, 무언가를 결심한 듯 말한다.
“애들이 너의 정체를 알아내면 어떻게 하지?”
영이가 땅만 바라보던 눈을 들어 민준을 바라본다. 눈동자에 두려움이 감돌고 있다.
아, 뭐야. 고작 그것 때문이었어? 민준은 웃음보가 터질 뻔한 걸 겨우 참는다. 뭐 대단한 걱정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난 괜찮아.”
“성웅이나 한결이만 있으면 모르는데 태영이까지 있어서…….”
사고 친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영이가 귀여워 죽겠다. 민준은 영이의 팔목을 잡고 영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한다.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제야 영이의 표정이 조금 밝아진다. 자신감을 얻은 듯 불쑥 말을 꺼낸다.
“나 너한테 사과할게. 그러면 안 됐어. 미안해. 함부로 정상이 아니라느니,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느니, 주제넘은 소리를 했어.”
민준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잠시 미간을 모은다. 그러다가 생각이 난다. 영이가 민준에게 했던 말들이 굉장히 어렴풋하게. 되려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민준이 내뱉은 칼 같은 말들이다. 다시금 미안해진다.
“난 괜찮아.”
그렇게 말하고 민준은 픽, 웃는다. 그간 영이 덕분에 즐겁고 마음 편한 날들을 보냈다. 그것도 모르고 마음 졸였을 영이를 생각하니까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애들이 네가 뱀파이어인 걸 알게 되면, 승모의 일도 네가 했다고 의심할 거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미안해.”
영이가 다시 사과한다. 민준은 그 일에 대해 가타부타 말한 적이 없다. 영이의 의심이 언제, 왜 걷혔는지 알 수 없다. 자기를 향한 믿음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도.
“난 괜찮아.”
민준이 진심을 담아 말한다. 하지만 영이의 표정이 풀어지지 않는다. 민준은 영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진짜야. 오히려 미안한 건 나지.”
“왜?”
“너한테 나쁘게 말했잖아.”
“아냐. 나 그 말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어.”
“미안해.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아니야. 그리고 고마워.”
영이가 고개를 푹 숙인다. 묶지 않은 머리칼이 얼굴을 가린다. 민준은 고개를 꺾어 영이의 얼굴을 살핀다. 턱 끝에 맺힌 눈물이 아스팔트 위로 떨어진다. 민준은 내심 놀란다. 영이의 심적 고통이 이 정도로 컸으리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 순간 영이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한다. 민준은 안절부절못하다가 문득 민준이 울 때마다 엄마가 해줬던 방법이 떠오른다. 두 팔을 벌려 영이를 안는다. 영이의 심장 소리인지, 자기의 심장 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민준의 품에서 잠시 흐느끼던 영이가 울음이 잦아들자 두 손으로 민준의 가슴을 슬쩍 민다. 민준은 그제야 영이의 어깨를 감쌌던 팔을 푼다. 영이가 물기 가득한 눈으로 민준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자 폭소를 터뜨린다. 그 웃음이 전염되어 민준도 따라 웃는다.
활기를 되찾은 영이가 당차게 외친다.
“내가 바래다줄게!”
“아니야. 들어가서 쉬어.”
“아니야. 하고 싶은 말이 남아서 그래.”
둘은 언덕을 오른다. 최대한 천천히 걷는데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온다. 끈적해진 민준의 손등이 걸을 때마다 영이의 손등과 쩍 붙었다가 떨어진다. 그런데도 민준은 전혀 불쾌하지가 않다.
“너 태영이 얼굴 봤어?”
영이가 묻는다.
“응. 왜?”
“아주 초췌하잖아. 왜 그런 줄 알아?”
“왜 그러는데?”
“걔네 엄마가 우리 종교에 완전 빠졌어. 전도하려고 눈에 핏발이 잔뜩 섰더라니깐. 전도하면 브론즈에서 실버 레벨로 승급하는데, 전도하기 가장 쉬운 게 누구겠어. 자기 자식이지. 교회에 데리고 가는 거로는 성에 안 찰 거야. 미션이 따로 있는데 성경 공부하기, 암송하기부터 시작해서 교회 청소 봉사하기, 금식 기도하기까지 다양해.”
“넌 다 한 거야?”
“이 주 만에 끝냈지.”
식은 죽 먹기라는 말투다. 영이는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 민준은 왠지 모르게 영이가 안쓰럽다.
“아마 태영이도 초반에 할 수 있는 건 거의 다했을 거야. 더한 일을 겪기 전에 빠져나오게 하고 싶어.”
“그 뒤엔 뭐가 더 있는데?”
“나처럼 되는 거.”
아차 싶어서 민준은 재빨리 말을 돌린다.
“어떻게 빠져나오게 할 수 있을까?”
“걔네 집에 찾아가서 사실대로 다 말할 거야. 그다음엔 걔네 엄마를 설득해야지.”
그러더니 결연한 말투로 민준에게 부탁한다.
“같이 가 줘.”
“알았어.”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한다. 사실 태영이 어찌 되든 관심 없다. 거절하지 않은 건 순전히 영이의 부탁이라서다.
아무리 걸음 속도를 늦추어도 기어코 용추빌라에 도착한다. 민준은 들어가려다 말고 뒤돌아선다.
“내가 바래다줄게.”
“그럼 내가 바래다준 의미가 없잖아.”
“괜찮아. 가자.”
다시 영이네 집으로 향한다. 걸으면서 민준이 묻는다.
“근데 있잖아. 내가 너희 집 처음 갔을 때 기억나?”
“응.”
“왜 다신 오지 말라 그랬어?”
“가난하니까.”
영이가 단 일 초도 고민하지 않고 답한다. 민준은 뜨끔 한다. 영이의 직설화법에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다.
“그 여자가 가장 탐내는 게 가난한 집이거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영이가 비열한 사기꾼 같은 표정을 짓는다.
“헌금도 많이 못 낼 텐데 왜?”
“내 경험상 가난한 사람들이 사이비에 더 잘 빠지거든. 더 광적이고.”
“왜 그럴까?”
“나도 몰라?”
영이가 정말 모른다는 듯한 얼굴을 한다. 민준은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팍팍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기댈 곳이 필요하기 때문이리라. 궁궐 같은 집에 사는 영이는 절대 모를 것이다.
“근데 너는 전도 많이 하면 좋은 거 아냐?”
민준이 묻는다. 영이가 썩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가난한데 사이비에까지 빠지면 좀 그렇잖아. 그래서 내가 너희 집에 안 가려고 버티다가 고생 좀 했지.”
영이가 뿌듯한 얼굴로 민준은 바라본다. 민준의 머릿속에 영이의 뺨이 유독 부었던 날이 떠오른다. 민준은 그저 웃는다.
집에 도착한 영이가 할 말이 남았다며 다시 민준의 집으로 걷자고 한다. 민준은 빌라 앞에서 또다시 발걸음을 돌려 영이를 바래다준다. 이제는 정말 들어가야 한다며 영이가 손을 흔든다.
민준은 다짜고짜 영이를 와락 안는다. 달래려는 의도는 아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영이를 들여보내고, 민준은 자기 집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쉬지 않고 달리다가 언덕마루에 다다라서야 두 무릎을 짚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얼굴에서 흐른 땀이 후두둑 떨어져 아스팔트에 번진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뛴다.
폐가 찌그러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지만 입에선 자꾸 웃음이 삐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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