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아빠에 대한 글이 쓰고 싶어졌다.
브런치를 시작한 이후로 엄마에 관한 글은 몇 번 썼었는데, 이상하게도 아빠에 대해서는 한 번도 글을 쓴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와 나는 사람들이 으레 상상하는 따뜻한 부녀 사이와 거리가 멀 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통화에서 아빠는 "밥 먹었냐?", "뭐 하냐?"라는 원초적인 질문만 묻는다.
요새 회사 생활은 어떤지, 주말 계획에 대해 묻는다던지 그 이상의 안부는 묻지 않는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아빠가 밥을 잘 드셨는지, 무탈하신지 그저 궁금해할 뿐이다. 보통의 부녀는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도 모르겠다.
아빠와 나 사이에는 함께한 추억이 얄팍하다. 아주 어렸을 때 빼고는 가족끼리 다 같이 여행을 가거나 그 흔한 놀이공원에서의 추억도 없다. 심지어 영화관에 간 적도 없다. 아빠는 어두컴컴한 데를 뭐 하러 돈 내고 가느냐며 한사코 거부하셨다.
아빠는 우리 가족이 굶지 않게, 따뜻한 집에서 살 수 있게, 교육도 부족하지 않게 받을 수 있게 가장으로서 노릇은 제대로 하셨지만, 그 외적으로 가족 간의 정을 나누는 데는 무심한 사람이었다.
속마음과 다른 말을 툭툭 내뱉는 아빠의 화법 때문에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다. 고등학생 시절 일화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아빠 나 늦었는데 학교까지 태워다 주면 안 돼?"
"싫어"
"그럼 나 학교 늦으면 어떡해?"
"네가 준비를 늦게 해서 늦었으면서 왜 아빠한테 태워달라고 해? 알아서 가“
아니 세상에 이런 매정한 아빠가 다 있나. 몇 번을 애원해도 들려오는 거절에 서운함과 배신감이 몰려들었다. 화가 잔뜩 나서 씩씩 거리면서 문을 쾅 닫고 집을 나섰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저 멀리 익숙한 아빠의 파란 트럭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어차피 태워줄 거면서 왜 감정 낭비를 하게 만든 걸까. 태워줘서 고맙긴커녕 아빠가 너무 미웠다. 학교 가는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일화가 일일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수두룩하다.
내 나이 서른 중반이 가까워진 지금은 “아빠 또 진심과 다르게 이야기하시네"하며 여유롭게 응수하는 법을 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는 다정한 말과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 아빠가 그저 원망스러웠고, 나 또한 마음을 서서히 닫았던 것 같다.
사춘기를 겪던 질풍노도의 시기, 아빠와의 갈등은 깊어졌다. 아빠는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서 술주정을 부릴 때마다 나는 거칠게 반항했고 화가 난 아빠는 디지털카메라, 휴대폰 등 내가 아끼는 물건을 부쉈다.
그러다 한 번은 아빠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을 쏟아내면서 반항을 심하게 했던 적이 있었다. ‘차라리 아빠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류의 가시 돋친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독한 말을 말을 쏟아낸 순간 아빠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고 그대로 집을 뛰쳐나가셨다.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아빠의 눈물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아빠도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감정 표현을 잘하지 않아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줄 알았나 보다.
아빠가 소통에 이리도 서툰 건 한평생 조직에서 사회생활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시골 농부라는 직업 특성이 클 것이다. 농부는 남의 말 신경 쓸 필요 없이 예측 불가능한 자연을 상대하며 사계절의 변화별 명확히 나눠진 일을 그저 묵묵히 할 뿐이다. 줏대와 고집은 농업이라는 업의 특성상 필수이자, 오랜 세월에 걸쳐 길러진 태도였을 것이다.
우리 아빠는 대를 이어 한평생 벼농사를 지으셨다. 덕분에 우리 집은 쌀은 돈 주고 사 먹은 적이 없다. 텃밭 덕분에 양파, 감자, 고구마, 고추, 가지, 호박, 오이 등등 수많은 채소들은 자급자족이다.
결혼 후 집들이 겸 부모님이 우리 집에 오셨는데 양파, 감자, 가지, 오이, 애호박 등 직접 농사지은 각종 채소를 바리바리 싸 오셨다.
"네 아빠가 딸내미 줘야 한다면서 며칠 전부터 챙기라고 언질을 주고, 오늘도 딸 줄 거 잘 챙겼냐고 계속 묻더라며" 엄마가 질렸다는 듯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게 아빠만의 사랑 표현이구나
순간 아빠의 사랑이 눈에 보였다. 비로소 결혼을 하고 서른 중반의 나이가 되어서야 아빠와 마음을 주고받는 법을 익히고 있달까.
요즘 결혼식에 가면 신랑과 함께 입장하거나, 혼자서 입장하는 신부가 종종 보인다. 하지만 나는 결혼식에서 꼭 아빠의 손을 잡고 입장하고 싶었다.
다 자란 딸을 품에서 떠나보내는 아버지의 마지막 배웅. 그 의식의 뭉클한 순간을 몸소 체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 속에 오래 남을 아빠와 나만의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슬쩍 아빠에게 의견을 물었다.
“아빠, 나 아빠 손 잡고 같이 입장할까?”
“왜 내 손을 잡고 가? 신랑이랑 같이 입장해”
역시나 또 특유의 반대로 말하기가 발동했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방송인 이경규도 그의 수필에서 언급한 것처럼 겉으로는 싫다고 해도 내심 아빠도 나와 같이 입장하는 순간을 원하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결혼식에서 신부가 혼자 입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신부의 손을 잡고 식장에 함께 걸어 들어가는 전통은 유지되었으면 한다. 초등학교 때 등교하는 아이의 가방을 들어주고, 결혼식 때 드레스 자락을 들어주는, 그 모든 순간이 아버지에게는 잊지 못할 특별한 추억이 된다. 그마저도 못 해준다면, 그것마저도 할 수 없다면···. 가부장제나 남성우월주의 때문이 아니다. 그저 자식이 부모의 품을 떠나는 예식에서, 부녀가 서로를 신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은 의식일 뿐이다. -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 by 이경규 -
결국 나는 아빠의 손을 잡고 입장했고, 아빠는 축사까지 하시며 평생 기억할 우리만의 추억을 만들었다.
많은 하객들을 울리고 웃겼던 아빠의 축사를 옮겨 적으며 사랑하는 아빠에게 바치는 이 글을 마친다.
제가 농사꾼이라 말 주변도 없고 이런 자리에 서는 것이 쑥스럽지만 그래도 자식의 결혼이라는 결실을 맺고 OO를 우리 가족으로 맞이하는 자리에 덕담 한마디 꼭 해달라고 해서 아버지로서 한마디는 해야겠다 싶어서 염치 불구하고 몇 자 적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딸아, 어렸을 때 골목대장에서 (엄마를 닮아서) 노는 걸 워낙 좋아해서 중학교 때까지 공부엔 영 관심이 없더니만 고등학교 들어가서 갑자기 정신 차리고 공부에 매진하더니 그래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턱 붙더라. 내색은 안 했지만 참으로 기뻤어.
아빠는 주도적인 태도로 삶을 대하고 성장해 가는 우리 딸이 참 많이 자랑스러웠어. 평생 시골 큰 구석에서만 자란 아빠 대학 가더니 집짓기 봉사, 교환학생으로 유럽 미국을 누비고 세상 참 넓다는 걸 보고 다니더라. 그때 돈 많이 들어가서 엄마 힘들었다는 걸 잊지 말아라(웃음).
졸업을 앞두고는 갑자기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나라 아프리카 말라위에 1년간 봉사활동 떠난다기에 저러다 사윗감으로 흑인 데려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솔직히 했었다(웃음).
사위야, 어느 날 우리 딸이 집수리 안 하면 안 데려온다고 해서 거금 들여서 집 리모델링 한 거 알지?(웃음)그만큼 너는 보석 같은 존재야.
고깃집에서 처음 만난 너는 참 듬직하더라. 너라면 내 딸을 평생 잘 지켜주겠구나 싶어서 마음이 놓였어. 우리 딸을 사랑해 주고 인생을 함께해 줘서 고마워.
둘이 다정히 손잡고 한걸음 한걸음 가다 보면 못 넘을 일은 없다. 서로 의지하고, 믿고 또 웃으면서 살아가길 바란다. 그러면 즐거운 날이 더 많을 거야. 내 딸 반품은 안 되니 이 점 명심하고 고쳐 쓰길 바란다(웃음).
늘 두 사람을 응원하고 속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내가 살아보니 인생 별거 없더라. 싸우지 말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의 편이 되어주면서 오래오래 잘 살아라.
내 딸 OO아, 그리고 든든한 사위야,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