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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피아노 Oct 19. 2023

수줍은 피아니스트

올해 열두 살인 지우를 처음 만난 건 4년 전이다. 처음 만난 날 나는 지우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많이 했는데 그 모든 질문에 지우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한 박자 쉰 후 느릿하고 신중하게 답했다. 어린이를 가르칠 때는 나도 모르게 평소보다 한 톤 올라간 목소리로 빠르게 말하게 되는데 지우와 있다 보니 내 목소리도 점점 낮아지고 말도 느려지는 것 같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본 지 벌써 4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지우는 모든 말에 한 박자 쉬고 답한다. "이번 주 연습 잘했어?"라는 간단한 질문에도 꼭 몇 초간의 침묵을 가진 후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음...... 네" 하고 느릿하게 답한다. 몇 초의 정적동안 지우의 흔들리는 큰 눈망울은 마치 '이번 주 연습을 하긴 했는데 월요일에는 숙제가 많아서 못했고, 어제도 조금밖에 못했는데... 내가 연습 많이 했다고 하면 선생님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겠지? 그래도 하긴 했으니까 잘했다고 말해야겠다'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이 정말 중요한 말인 것처럼 듣는 지우 앞에서는 나도 한 박자 쉬고 말하게 된다.


쉽게 쑥스러운 지우가 무대에 서는 게 괜찮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객석에 앉아 지우의 첫 연주 차례를 기다렸다. 검정 벨벳 드레스를 입은 지우는 자기 차례가 되자 평소처럼 신중한 걸음으로 무대로 걸어가 공손한 인사를 정성스럽게 하고 조심스럽게 피아노 의자에 앉아 모든 관중을 숨죽이게 했다. 지우는 수줍었지만 긴장하지 않았다. 오늘 연주하는 모든 곡 중 자신이 연주할 곡이 가장 중요하다는 눈빛으로 위풍당당하게 연주했다.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연주를 마친 후 다시 수줍은 얼굴로 천천히 일어나 천천히 인사하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지우가 학교에서는 어떤 모습일까, 친구들과 있을 때는 어떤 표정과 목소리로 말할까, 집에서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지우의 부모님도 쑥스러운 분들인 걸로 보아 아마 내 앞에서 보이는 모습과 집에서의 모습은 비슷할 것 같지만 짐작일 뿐이다. 어쩌면 친구들과 있을 때는 무대에서의 모습처럼 반전이 있을 수도 있지만 잘 상상은 안된다.


지우는 작년까지 어둡고 슬픈 느낌의 단조 곡만 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또래와는 남다른 음악 취향이 내심 걱정 됐지만 치고 싶은 곡을 치라했다. 지우는 여전히 느리고 자주 침묵했지만 그 미소는 누구보다 밝았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올해 여름 방학이 끝나고 오랜만에 다시 본 지우는 몇 달 사이 키가 좀 컸고 늘 유지하던 허리까지 오던 긴 머리는 어깨 기장으로 산뜻하게 자른 채 레슨실로 들어왔다.


"방학 잘 보냈어?"

"..... 음... 어.... 네!"

"방학 동안 연습은 열심히 했고?"

"..... 음... 어.... (힘주어서) 네!"


모든 말이 진심인 지우가 힘주어서 말할 때는 정말 연습을 열심히 했다는 뜻이다.


"이번 학기에는 어떤 스타일의 곡 치고 싶어?"

"....... 음..."

"선생님이 몇 곡 앞부분만 쳐볼 테니까 듣고 네가 좋은 걸 골라봐."

".... 네.."

"이 곡은 어때? 저번 학기에 치던 곡이랑 비슷한 스타일로 단조에 서정적인 느낌의 곡이야."

"..... 좋아요."

"그래, 몇 곡 더 쳐줄게. 지금 칠 곡은 너 스타일은 아닐 것 같지만 이런 빠르고 경쾌한 곡도 한번 쳐보면 좋으니까 한번 들어봐."

"..... 이 곡도 좋아요."

"그래? 이 곡도 좋았어? 둘 중에 어떤 곡이 더 좋았어?"

"..... 두 번째 곡이요.."


의외의 대답에 조금 놀랐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지우는 이전에 친 곡이 단조곡이라 좋아한 게 아니라 그냥 그 곡이 좋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얼마나 입체적인 사람인데 나에 대해 쉽게 단정 짓는 어른들이  미웠으면서 나도 그런 어른이 되어버렸다. 지우의 침묵은 사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기 때문인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어설픈 오지랖으로 걱정했다.


나는 지우보다도 더 긴장을 많이 하는 아이였다. 새 학년 첫날에는 집에서부터 배가 아팠고 경직됐다. 그러면서도 주목받고 싶어 내가 피아노를 잘 친다는 걸 말 많은 친구들에게 은근히 흘렸다. 그러다가 막상 주목을 받게 되면 얼굴이 빨개지고 숨고 싶었다. 충분한 연습 후에 서는 피아노 무대는 긴장되지 않았지만 점심시간에 교실에 있는 피아노 한번 쳐달라는 친구들의 요청에는 심장이 빨리 뛰었다. 피아노 선생님 앞에서  한 주간 열심히 연습한 곡을 치는 건 괜찮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는 쩔쩔매고 오래 침묵했다.

   

그 오랜 침묵의 이유를 안다는 이유만으로 지우를 나의 어릴 적과 비슷하다고 쉽게 단정 지었다. 쑥스러운 아이와 쑥스럽지 않은 아이, 이렇게 반으로 쪼개기엔 우리는 나이를 불문하고 입체적이며 매 순간 변화한다. 빠르고 경쾌한 곡을 치기 시작한 지우는 여전히 느리게 걷지만 손놀림은 누구보다 빠르고 경쾌하다. 큰 소리를 낼 때는 지우의 숨겨진 괴력을 눈치채기도 했다. 더 이상 지우에 대해 한 문장으로만 설명하기 힘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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