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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Nov 08. 2017

아이슬란드에서 프로포즈를

명동에서 2만 9천 원짜리 은반지 두 개를 샀다.

사이즈를 몰라 눈대중으로 어림잡아 고른 반지는 비행기를 세 번 갈아타고 도착한 아이슬란드 공항에서부터 내 양털 조끼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완벽한 타이밍을 위해 늘 지니고 다녀야 했으니까.


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받고 싶은 프로포즈를 상상한다.

50년이 될지 60년이 될지 모르는 남은 생을 같이 살아보자는 달콤하고도 무시무시한 말을 기대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펼치는 상상의 나래. 나도 이 남자를 만나고부터 그런 상상을 하다가 슬슬 받는 방법이 아닌 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몇 가지의 아이데이션

우리가 여행 할 아이슬란드는 상상 이상의 대자연일 테니 광활한 들판이나 큰 폭포 아래서 아무도 못 알아듣는 한국말로 소리를 지를까?
아 혹시나 주변에 한국사람이 있으면 눈코입이 사라질 거야.
자동차를 빌려서 여행 할 거니까 오락가락하는 날씨를 빌어 창문 결로위에 글씨를 써볼까?
아냐, 왠지 공포영화 같을지도 몰라.
텐트를 가져가는 캠핑여행이니까 텐트 안에 걸려있는 S고리에 반지를 걸어놓을까?
아 달랑거리다 발견하기도 전에 떨어지면 낭패지.



여행 준비를 하면서 틈틈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남자들의 고민을 십분 이해하는 지경까지 갔다.

내 프로포즈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놨다. 그중 빙하를 손가락 모양으로 깎아서 거기에 반지를 끼워주라는 정신 나간 아이디어를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두 명의 친구가 추천했다. 

이렇게 할 생각은 1도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1도 모른 채 그냥 하기로 한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허우대는 멀쩡하니 상처투성이로 자라 내 옆에 온 남자는 온전한 사랑이 필요했고, 애정력이 가득한 나는 그 사랑을 채워줄 자신이 있었다.

미래를 향한 내 고백으로 우리는 더 확고해질 거란 근거없는 확신이 있었다.


빙하에 반지. 한 번 끼워나 보자.



엄마와 아빠 입장에서 딸이 남자친구와 감히 먼 나라로, 하루 이상 여행을 떠나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가슴에 손을 얹은 척 하고 베프를 팔아먹으면서 다니는 국내여행 하루이틀은 여느 커플처럼 해봤다. 하지만 국경을 건너는 해외여행이란 참 쉽지가 않다. 늘 남자 쪽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물여덟 된 성인이 사랑과 여행을 결정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 어리지 않은 것 같지만, 딸 가진 부모 입장(엄마 왈)에서는 그렇지가 않다나 뭐라나? 내 얘긴 아닌 척.

감사하게도 '모든 선택은 자유롭게, 결과의 책임은 알아서, 부모는 조언만'을 모토로 삼는 우리 집은 쓴소리 두 번 정도로 여행을 허락해주셨다. 땡큐.



다정한 오빠는 서른 살, 틱틱거리는 나는 스물여덟 살

정식으로 만난 지 1년 반이 되었고, 서로를 알아온지 6년 정도 되었고, 내가 이 남자와 결혼이라는 걸 어렴풋이 결심하게 된 지 대강 2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 우리는 아이슬란드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해 렌터카를 찾으러 주차장을 걸어가는데 우연히 올려다 본 하늘에 청푸른 띠 두어 개가 있었다.

색이 선명하거나 모양이 또렷하진 않았는데 하늘에 둥둥 떠있는 저건 뭔가? 

딱 2초 정도 고민하다가 창피하게도 괴성을 질렀다. 손뼉 짝짝 쳐가면서.

이번 여행운은 여기서 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도착하자마자 오로라를 보다니.


순간 확 반지를 줘버릴까 싶은 충동이 아주 잠깐 일었지만 침착하기로 했다.


침착해 침착해 그저 오로라일 뿐이야.

세상에, 아니 그래도 우리의 첫 오로라잖아. 태어나서 처음 본 오로라.

하늘에 저런색이 있다니-




아이슬란드의 첫날밤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더 영화 같은 장면들이, 꿈같은 시간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장면이 나타나면, 그런 시간이 선물처럼 주어지면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야겠다고도.



아이슬란드의 첫날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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