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 밸리에서는 이렇게 디자이너를 뽑는다.
첫 인터뷰를 잊을 수 없다. 가고 싶었던 회사였기에, 잘하고 싶었고, 잘해야 했다.
스피커폰으로 할지, 이어폰을 끼고 할지 결정하는 것도 한참 걸렸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와 통화를 오분 이상 한 것도 오래전 일이다. 스피커폰과 이어폰. 둘 다 어색하여 결국 그냥 평소처럼 손으로 들고 전화를 받기로 했다. 전화를 기다리는데 긴장 탓에 손발이 차가워졌다.
그날따라 전화기는 유난히 지지직거렸고, 질문을 여럿 놓쳤다. 한 시간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삼십 분이 지나자 서로 할 말이 없어졌다. 수화기 너머로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전화를 끊고, 한동안 멍하게 벽을 바라봤다.
Unfortunately the team has decided to not move forward...
며칠 뒤 받은 메일 역시 차가웠다.
불과 몇십 분의 인터뷰를 망친 탓에 기회가 날아갔다고 생각하니 야속하게 느껴졌다. 물론 전화기만 탓할 수만은 없었다. 포트폴리오부터 다시 만들었다. 전화기가 지직 거려도, 대답을 엉망으로 해도 나를 더 궁금하게 만들어야 했다. 반복되는 질문과 대화의 흐름 역시 파악해보려 노력했다.
그동안 몸으로 겪으며 경험한 실리콘 밸리의 디자이너 인터뷰 프로세스를 공유해 볼까 한다.
첫 번째. 지원하기
각 회사들의 구인 사이트나, 링크드인 같은 구직 플랫폼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름이 알려진 실리콘밸리 회사라면 전 세계에서 이력서가 날라 온다. 수천, 수만의 지원자 중에 눈에 띄기 쉽지 않다.
보다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쇼케이스 하는 방법도 있다. 이곳 디자이너들도 많이 쓰는 Behance, Dribbble 등에 포트폴리오를 올리던가, Medium등에 작업기를 쓰는 것이 좋은 예. 가고 싶은 팀의 눈길을 끌게 될 경우 매우 유리하게 시작점을 가져갈 수 있다. 나의 경우 사이드 프로젝트로 만들었던 안드로이드 앱 패턴 사이트 androidux.com 이 개발자들 사이에서 꽤 유명해져서 도움을 받았다.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은 내부 직원의 추천을 받는 것이다. 추천을 받으면 쌓여있는 이력서 중 가장 먼저 검토 대상이 된다. 전 직장이었던 야후의 경우 임직원의 20%가 직원 추천을 통해 입사했을 정도. 미국에서도 인맥, 학맥의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하지만 그 사람과 꼭 잘 알아야 하고, 같은 학교를 다녔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포트폴리오가 일정 수준에 올라있고, 실력에 대한 충분한 교감이 있었다면 서로 추천해주기도 한다.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포트폴리오다.
인상적인 포트폴리오가 있어야 눈에 띄고, 회사에서 관심을 갖게 된다.
두 번째. 전화 인터뷰
첫 번째 단계를 넘어선다면 인사팀으로부터 곧 전화를 받는다.
구직자의 경력 사항과 열려있는 포지션을 비교하며 회사에 필요한 사람 인가를 서로 확인한다. 심각한 오해가 있지 않으면 이 단계에서는 합격/불합격이 결정되지는 않는다. 인사팀이 날짜를 잡아주는 다음 인터뷰부터가 진짜 인터뷰이다. 보통 함께 일하게 될 팀 동료 또는 바로 윗 상사와 전화 인터뷰를 하게 된다. 한 시간 정도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주로 온라인 포트폴리오를 같이 열어놓고 진행 과정이나 문제 해결 방법들을 토론하게 된다. 회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2-3번의 전화 인터뷰를 진행한다.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포트폴리오다. 전화 인터뷰가 진행되는 한 시간 내내 본인이 만든 포트폴리오를 기반으로 대화가 오간다.
세 번째. 실기 시험
회사에 따라 실기 시험을 보기도 한다. 비행기 티켓팅 과정을 리디자인 한다거나, 어린이를 위한 앱을 디자인하는 것 같이 예상 가능한 수준의 과제를 내준다. 시간은 유연하나 보통 일주일 정도 뒤에 제출하게 된다.
제출된 과제는 온라인에 올려져 있어야 하며, 링크가 관련 팀원들에게 공유되어 심사를 받는다. 짧은 시간에 작업되어야 하고 마찬가지로 짧은 시간에 심사가 이뤄지기 때문에 전략을 잘 세워 접근해야 한다. 지원자의 장점이 비주얼이라면, 비주얼을 신경 쓸 필요가 있고, Flow 설계에 강점이 있다면 그 부분을 디테일하게 파고들어야 한다. 정답은 없고, 정답을 낼 필요도 없다. 하지만 정답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자세히 보여줘야 한다.
네 번째. 온사이트 인터뷰
이제 까지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다면, 지원자를 회사로 불러서 인터뷰를 진행한다. 큰 회사라면 비행기, 호텔, 이동하는 택시비, 식사 비용 등 관련한 모든 비용을 제공해준다. 회사 입장에서도 이래저래 시간과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온사이트 부름을 받았다는 건 지원자에게 관심이 많다는 증거이다. 반나절에서 하루 종일 진행되며 처음 1시간은 포트폴리오 발표, 나머지는 한 명씩 작은 회의실에 함께 들어가 인터뷰를 하게 된다. 포트폴리오 발표 과정에서 궁금했던 것들 위주로 대화를 하기도 하고, 현장에서 내준 과제를 화이트보드에 그려 가며 문제 해결 능력을 보기도 한다. 지원자의 실력을 보기도 하지만, 팀에 잘 맞는 사람인지도 확인한다. 하루 종일 여러 명과 기싸움하다 보면 나중에는 목소리도 안 나올 정도로 체력이 고갈된다. 물과 초콜릿 등 비상식량?을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처음 만난 사람들 앞에서 하루 만에 본인의 장점을 다 보여줘야 하기에, 이 과정에서도 역시 포트폴리오가 중요하다. 잘 만들어진 포트폴리오만큼 좋은 분위기를 형성하게 하는 매개체는 없다.
다섯 번째. 연봉 협상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퍼를 받게 되면 연봉 협상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이곳의 연봉 시스템은 상당히 열려 있는 편이다. 하지만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에 먼저 대답하는 사람이 지는 것은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다. 프로 스포츠의 스토브 리그를 생각하면 딱 그것과 같다. 프로야구 선수처럼 계약금을 받고. 연봉을 줄다리기한다. 계약기간을 딱히 정하지는 않지만 주식을 기간에 나눠 받기로 함으로써 일정기간은 회사에 있어 달라는 인센티브를 준다. 물론 조금이라도 더 주는 다른 회사가 나타나면 그것이 협상 카드가 되기도 하고, 실제로 협상 중에 회사를 옮기기도 한다. 정서상 쉽지 않은 절차이지만, 자신의 능력을 평가받는 기회임에 틀림없다.
디자이너에게 디자인만큼 더 이상 중요한 것은 없다. 몇 번 강조했지만, 모든 절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포트폴리오다. 포트폴리오를 잘 만들어야 한다고 하니 무언가 대단한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큰 회사에서 멋진 프로젝트만 하며 경력을 쌓아 온 것만은 아니다. 결과물이 크던 작던 문제를 풀어온 방식과 과정을 잘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에서 잘 되었다고 평가받았던 디자인 프로젝트라면 이곳에서도 잘 통할 확률이 높다.
이곳에 많은 분들이 도전하고 정착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