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약방서가 Feb 27. 2024

일을 좀 배울 수 있을까요?

생애 첫 문전박대의 경험

이름만 지방자치인 작은 나라에 살던 내가 연방정부 체제의 다양성을 알게 된 건 약사면허를 받을 때였다. 모두 알다시피 캐나다는 10개의 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상위 기관으로 연방정부가 있다. '약사' 면허는 연방정부가 주관한다 (=너는 캐다나에서 약사로 일해도 된다는 허가). 캐나다 전체를 관할하는 평가 기관의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대략 1년을 거기에 매달렸다. 시험만 붙으면 될 줄 알았지, 그 뒤에 주정부 면허라는 더 큰 산이 있을 줄이야. 해당 주에서 일을 하려면 주정부 면허를 받아야 하고, 이때 요구되는 조건은 주 정부 약사회에서 관할하며 주 별로 판이하게 달랐다 (=우리 주에서 일하려면 조건을 맞춰와라). 약사 시험에 다 합격했다 하더라도 주정부에 등록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 실제로는 주정부 단위에서 일해야 하니까.


온타리오주에는 별도로 정해진 인턴 기한은 없었다. 다만 Practice assessment라고 해서 약 300시간의 근무를 통해 내가 임상환경에서 근무할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지를 평가받아야 했다. (주정부 법규시험도 있으나 그건 공부해서 붙으면 되니 생략함) 근무해 보신 분들은 알 테지만 약사로 근무하기 위해 약학지식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일단 약국 전산 시스템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하고 각 환자마다, 상황마다 다른 보험 적용 범위를 파악하여 올바른 정보를 입력할 수 있어야 한다. 온타리오주는 경미한 질환에 대해 약사가 처방도 할 수 있고, 국가 필수 예방접종도 나누어 담당하며, 만성질환의 경우 타당한 사유가 있을 때 이전 처방을 renew 할 수 있는 등의 직능 차이도 명확했다. 현실적으로 어딘가에서 일을 배우지 않고서는 평가를 시작할 수도 없거니와 기세가 충만하여 시작을 한다 해도 합격은 요원할 것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이력서를 업데이트했다. 한국에서도 임상약사로 일한 경험이 없다시피 하였기에 어떻게든 없는 경험을 위로 끌어올려 있어 보이게 만드느라 꽤나 애를 썼다. 물론 미우니 고우니 해도 믿을 것은 한국 사람뿐이라고 무작정 찾아간 한국 약사님의 도움도 컸다. 필요도 없던 어시스턴트 자리를 만들어 이것저것 해보게 해 주셨기에 그 경험을 바탕으로 준비할 수 있었다. 이건 외노자로 느끼는 설움이기도 한데, 생각보다 북미가 완전 인맥사회다. 학력도 물론 중요하고 (온타리오주에 약대 두 개뿐이라 서로 다 알고 있음), 지인 인맥이 취업에 절대적이다. 오죽하면 "옆 집 아저씨한테 인사 잘하자"는 농담이 있을 정도. 그러니 학연, 지연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력서를 뽑아 들고 약국마다 방문해 보는 거였다.


"내가 PACE라는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너 혹시 그거 알아? 그러려면 학생으로 일을 좀 배워야 해. 너네 약국에서 배울 수 있을까? 나 이런 사람이야."


가슴이 뛰고 손에는 식은땀이 막 나는데 준비된 말을 마치고 얼굴을 보니 이미 잡상인을 보는 그 얼굴이다.


"어느 학교 나왔어?"


"아니 나는 인터내셔널.."


"우리 약국이 좁아서 사람 많은 거 싫어. 미안."


이런 대화를 수차례. 면전에서 내보내지니 애 둘 달린 아줌마요, 세상에 무서울 것 없는 아들 엄마인데 이깟 거절이 대수냐며 스스로를 다독여도 마음이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러다 누군가가 팁을 주었는데, 모든 약국 매니저는 자기 공식 이메일을 홈페이지에 적어둔다는 거였다. 이메일이야 수십 통 뿌려주지, 아무렴 문전박대보다야 낫겠지 싶었다. 일단 집에서 가까우면서도 아직 내쫓긴 적 없는 두 곳에 메일을 보냈는데 생각 외로 나이스하게 받아주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충분히 배워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덕담도 해주었다.


5월부터 7월까지 꼬박 세 달을 학생 인턴으로 보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도 자존감이 높아야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어떤 인간이 내 뒤에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일을 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실수할까 봐 신경이 곤두서겠지. 베트남계 캐나다인이라는 내 사수(?)는 흔들리지 않았다. 나의 질문 공세에도 유연하게 대처하고 보여달라고 하는 것은 다 보여주었다. 영어로 환자를 상대하는 것도 그때 많이 배웠다. 일단 그가 영어를 특별히 더 부드럽고 유창히 하는 편이었기에 그가 했던 표현을 되뇌며 똑같이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연습이 됐다. - 한국어를 특별히 더 잘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영어도 마찬가지다. 모국어를 유려하게 구사하는 것 또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 심지어 한 달 같이 지내고부터는 어시스턴트가 아닌 인턴 약사로 등록해 주어 본인이 나의 어시스턴트로 일하고 내가 약사인 척 시늉하게 해주기도 했다. 본인의 근무 시간에 있는 모든 일이 자기 책임인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좋은 사람. 일도 가르쳐주고 선물도 줬다.


학생 인턴을 보내고 내 운명을 가를 어세서를 만난 평가 첫날 내가 그녀로부터 들은 말은 "Thank you for considering this profession seriously. You're well prepared and well trained."였다. 내가 만난 도움닫기들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들. 어쩌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났을까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더 잘 해내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래서 내가 받은 것들을 다듬고 키워 다시 베풀며 살고 싶다고 마음먹는다. 매일매일.

매거진의 이전글 거기서 사니까 좋으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