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마음 - 세 가지 삶의 방식
Chapter 2 마음 성경공부 후 리뷰 겸 정리
<복음과 삶 성경공부/ 팀 켈러> 책자는, 총 8개의 소 챕터로 나누어진다. 각 챕터들은 다시 큰 5개의 파트들 안에 2-3개씩 묶여있는 구성이다.
Part 1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
Part 2 복음이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Part 3 복음이 '공동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Part 4 복음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Part 5 복음은 우리의 영원을 바꾼다.
5개의 파트는 위와 같이 세상, 복음, 마음, 공동체, 다시 세상, 영원의 프로세스로 진행된다. 오늘은 Part 2에 속한 마음 챕터를 가지고 지난 2주일간 진행한 홈 스터디, 소그룹 나눔을 통해 개인적으로 느낀 점 들과 배운 점들을 솔직하게 나누고 정리해보려고 한다.
먼저 팀 켈러 목사는, 이 챕터에서 '세 가지 삶의 방식'에 대해 핵심적이고 중점적으로 언급했는데, 그것은 '비종교인', '종교인' 그리고 '기독교인'이다. 그는 굉장히 현대 언어로 잘 쓰인, 그러니까 시대에서 동떨어지지 않은 요즘 언어로 종교인과 기독교인을 비교해놓았는데 생각을 정리하고 길을 잡는데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단 한 가지, '복음에 완전히 전복되었는가'를 수 십 가지의 방향으로 끊임없이 질문하고, 끌어내리고, 박살내고, 어르고 달래주기를 반복한다.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유용성을 높여준다. 모든 질문들과 예시들을 소화하지 않아도 단 한 가지 질문만 깊이 이해한다면 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캐치할 수 있기 때문에 부담 없이 다가오게 해주는 점이기도 하다.
다시 돌아가서, 종교인과 기독교인에 대해 생각해보자. 다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 문제는 구원 이후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흥미보단 분노가, 어쩌면 혼란이 일어나는 종류의, 영원히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였을 수 있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 대한 진정한 감사가 빠진 선행, 그 깨달음이 없는 삶은 종교인의 삶이다. 부인하지 않겠다. 문제는 종교인의 삶을 어떻게 종식시키고 기독교인의 삶으로 넘어가는지를 도무지 모르겠다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이미 여러 번 그 모습과 태도를 가졌던 것에 대해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져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나의 무너짐에 지쳤고, 논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쯤 되면 답이 없는 거 아닌가. 더 나아가서는 100% 다시 죄를 짓고 문제가 생길 거라면 차라리 비종교인이 되는 것이 더 현명한 일 아닌가. 서로 피차 힘들게 뭐하는 짓인가. 생각도 했었다. 특히 나는 습관을 성형하기 위해 상황을 만들어놓는 사람으로, 내 의지력에 의존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신앙이 아닌 나의 신앙을 가지게 되면서 더 철저하게 의심의 잣대를, 의문의 물음표를 던졌던 것 같다.(지금 이 문장을 과거형으로 쓰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정말 긴 터널이었다.) '믿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믿음. 그럼에도 선한 일을 하고 계시다는 믿음.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 내가 주님의 자녀라는 믿음. 더 나아가면, 이 사람도 사랑하신다는 믿음.
이런 믿음들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벼락을 때리시는 분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자유의지'가 없이는 불완전한 분 같았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마치 나에게 달려있는 것 같았고, 나는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 관계는 오리무중이었다. 마치 자유로운 내 두 손에 절대권력을 쥐어준 것과 같았고 그와 동시에 '내가 끝까지 감사를 배우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와 같은 질문이 둥둥 떠다녔다.
정말 감사한 점은, 나와는 다른 '시간'을 소유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무지한 나를 내치지 않으시고 내가 깨닫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셨다는 점이다. 지나간 20대, 그 1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나의 마음도 만지시고 자연스럽게 내 질문이 해결될 수 있게 기다려주셨다. 트럼펫을 배우고 싶으면 유능한 트럼펫 선생님을 찾으면 되는 논리로 설명될 수 없다. 나도 어떻게 나의 마음이 변화되었는지 설명 못하겠단 말이다. 그분은 수영을 하다가도 깨달음을 얻도록 말을 걸어오시기도 했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의 하루하루를 필름 영사기로 보는 영화가 되게 해 주시는 분이니까. 20대 후반의 편안함과 안정감을 버리고 인생의 새로운 한 챕터를 위해 다시 출발선에 섰던 나의 선택을 주님은 이렇게 사용해주셨다.
그래, 문제는 나였다. 염치없지만 나는 반복되는 죄스러움을 지고 싶지 않았다.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는 그 날까지 계속해야 하는 회개가 고행처럼 보였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보자. 모든 것을 탕진한 둘째 아들이 그의 아버지에게 돌아와 나를 아버지 집의 한 종과 같이 여겨달라고 말하기까지 그의 마음이 얼마나 눌렸을지 대강 생각해보아도 그 무게를 알 수 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이 더 이상 그렇게 찢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 이게도, 하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한 마음에서 나온 본능이었다.
책에서 말하는 '종교인'은 일이 잘못될 때 하나님이나 자신에게 분노한다고 말한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중요하기 때문에 비난을 받을 때 나의 자아상에 위협이 되는 모든 위협들은 없어져야 된다고 느낀단다. 또한 '기준'들에 부합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을 때는 자신이 없다고 쓰여있다.
도덕적 기준,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세상의 가치와 기준이 나를 얼마나 사로잡고 있었는지. 그 기준을 어기며 살아도 된다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다만, 모든 선행과 행동의 동기가 '착해 보여야 하는' 내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함인지를 헷갈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과 얼마나 다른가. 얼마나 비슷한 삶의 외형을 가지면서도 얼마나 완벽하게 다른지 깨닫게 되었다. 복음을 알지못해도 선한 사마리아인은 될수있다. 그러나 모든 선한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건 아니다.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거짓말할 수도 있다. 그래, 잘못을, 실수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잘못에 대한 회복과 화해를 위해 반성하고 노력하는 것, 거기까지다. 마치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서 회생이 불가한 사람처럼 짓눌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멀어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차차 주님과 친밀한 대화를 이어가며 그 복음의 선한 능력에 잠식될 때 진정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전에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값없는 사랑에 대한 진정한 회개, 진정한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내가 정말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는지, '칭의'의 의미를 뼈저리게 제대로 알고 있는 건지를 철저하게 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잘 안된다. 잘 안될 것이다. 이전에는 바로 이 지점까지 였다. 그래, 수련회든 기도회든 뭐가 되었든, 내 생각과 마음은 딱 여기까지 와서 잘 가다가 또 실패했구나, 회개를 드리고 돌아갔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늘의 나는 아니다. 나는 이제 나의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다시 드려야 함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것만이 내가 살 길임을 알게 되었다. 사람의 부족함, 공동체의 부족함, 나의 부족함, 없어질 수 없다. 영영히 사라질 수 없는 문제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유일한 답은 그리스도, 그 답을 내 삶으로 가져와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내가 겸손히 나아가는 길 뿐이다. 아무리 비판적으로 사고하며 지식을 쌓고 질문을 던져도 완벽한 공동체, 완벽한 사람은 존재할 수없다. 오직 유일한 길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행하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이런 마음 자세를 가질 때, 내가 다가가지 못할 공동체, 내가 사귀지 못할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그분도 나를 영원히, 이제 나도 그분을 영원히 놓지 않을 텐데. 지혜가 부족해도 말이다.
돌아오는 소그룹 시간까지 소챕터 3 우상숭배에 대해 홈 스터디를 하며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도할것이다. 그리고 하루 하루 내면에 귀기울이며 제대로된 회개와 용서가 이루어지는지를 점검하겠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