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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Apr 27. 2016

나무는 아까 내린 비를 지금 떨구네

육주동안(逳住東顔) 동남아 여행 번외 편 #10 - 캄보디아 까엡

스물다섯에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을 시작해서
서른다섯에 다니던 스타트업을 그만둔 여자는
퇴사 18일째 되던 날 동남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그 여자가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를 두루 다니고(逳)
잠시나마 살면서(住)
동(東)남아의
낯(顔)을 마주하러 떠난
육주동안(逳住東顔)의 여행 이야기,
다음스토리펀딩 연재의 '번외 편'이다.


올리스플레이스의 좋은 점 또 하나는 그곳 리셉션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밥을 먹고 커피와 맥주를 마시는 것 말고도, 지역 투어 상품 예약도 해줬고 오토바이 대여도 대신해줬고 다른 지역으로 가는 버스를 예약하고 싶다고 하면 시간을 알려주고 예약을 해줬다. 리셉션에 말해두면 눈 앞에 밥과 커피와 맥주를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오토바이, 픽업 밴을 코 앞에 대령해줬다.


여자는 캄폿에서 가까운 까엡에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는 게을렀고 대개 정오를 넘겨가며 늦잠을 잤다. 비록 여행자 신분이긴 하지만 저절로 잠에서 깨지 않았는데 투어 예약 때문에 애써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 정도를 보내고 나니, 어느 순간 여자는 조금 민망해졌다.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먹고 자는 자신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여자 자신은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스스로를 다그치는 것은 오랜 습관이었으니까.


나흘째였던가, 닷새째였던가, 여자는 드디어 결심하고 PK에게 다음날 까엡행 미니밴 예약을 부탁했다. 9시 30분에 여자를 데리러 올 예정이었던 미니밴은 그러나 무려 20분 일찍 도착했다. 여자가 막 일어나 씻고 나온 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젖은 머리 그대로 미니밴에 탄 여자가 까엡으로 출발한 건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동남아에선 대부분의 숙소에서 투어나 버스를 예약할 수 있는데, 투어든 버스든 출발지는 정해져 있으므로 예약한 시각과 실제로 출발하는 시각은 언제나 달랐다. 여자는 그날 까엡으로 가기로 한 여행자들 중 가장 외진 곳에 묵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밴에 타고 여행사로 가서 무한정 기다려야 했다.



여행사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는 그 나이 때 캄보디아 여성들보다 훨씬 풍채가 좋았다. 여자는 저렇게까지 큰 소리로 시끄럽게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목소리가 크고 톤이 높았다. 미니밴에 처음 탄지 한 시간이 넘어서야 미니밴은 까엡으로 출발했는데, 캄폿 시내에서 까엡까지는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수없이 진동하며 비포장도로를 달린 미니밴은 까엡 해수욕장 주차장에 여행자들을 내려주고 2시에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까엡의 바다색은 동남아 유명 휴양지처럼 비현실적인 에메랄드 빛깔을 띠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모래가 새햐얬다. 햇볕은 피부를 그대로 통과해 오장육부까지 말릴 수 있을 것 같이 뜨거웠다. 수영복 대신 책이며 노트며 카메라를 챙겨간 여자는 잠시 그곳에서 무엇을 하면 좋을까 생각했다. 해변 그늘에 앉아 책이나 읽으려고 했지만 앉을 수 있는 낚시의자들은 모두 돈을 내야 하는 것이었고, 그걸 돈 내고 빌린다 해도 들어앉을 그늘이 충분히 보이지 않았다.



'저 모래 위에 앉았다가는 모래 알갱이들이 모두 피부를 뚫고 들어올 거야. 이런 데서 책을 읽는 것은 무리고,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이야.'라는 생각으로 일단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았을 때 여자는 반바지와 민소매 티를 입고 모래 위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는 젊은 여자를 발견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여자 역시 여행자인 것 같았다. 저 여자는 뜨겁지 않은 걸까. 뜨겁지만 참고 있는 걸까. 대체 어떻게 저기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을 수가 있는 걸까 조금 혼란스러울 정도로 뜨거운 날씨였다.



시간이 좀 이르긴 하지만 여자는 까엡 크랩 마켓에 가서 점심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방향감각이 좋다고 할 수 없었던 여자는 몇몇 사람들에게 길을 물었지만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모래 위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에게 크랩 마켓의 위치를 아느냐고 길을 물었는데, 그 젊은 여자는 흔쾌히 길을 알려줄 뿐 아니라 걸어서 가기엔 날이 너무 더우니 바이크로 태워주겠다고까지 했다. 여자는 그 호의를 예의상으로라도 절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젊은 여자가 바이크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여자의 까맣고 탄력 있는 다리에 가득 들러붙어있던 흰모래 알갱이들이 우르르 떨어져 나갔다.


이날까지만 해도 여자는 자신도 오토바이를 몰아보게 될 줄 몰랐기 때문에 바이크 뒤에 올라타고 그녀의 허리를 살짝 잡았을 때 조금 묘한 기분을 느꼈다. 멋있는 사람은 단지 뜨거운 모래 위에 아무렇지 않게 앉아있다가 낯선 누군가를 태워주려고 오토바이를 모는 짧은 순간으로도 자신이 멋있는 사람임을 설명하지 않고 아우라 같은 것으로 그냥 뿜어댄다. 크랩마켓은 생각보다 멀지 않아서 오토바이로는 금방이었다. 그 짧은 거리를 이동하면서 그녀가 큰 소리로 이름이며, 어디서 왔는지, 어디서 지내고 있는지 등을 물었다. 그녀는 벨기에 사람이었고, 이름은 샬롯이었다. 샬롯이 오토바이를 몰면서 앞을 보고 한 질문이 여자에게 도착할 수 있었던 건, 말을 뱉고 앞으로 나간 자리를 금세 뒤에 앉은 여자가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크랩마켓 앞에 내려줬을 때 여자는 샬롯에게 같이 점심을 먹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샬롯은 아침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며, 다시 보자고 했다. 오후에 다시 해변에서 만날 수 있거나, 캄폿으로 돌아가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여자는 샬롯과 언제 어떻게 만날지 특별한 약속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로 몇 시간 더 까엡에 머물고, 며칠을 더 캄폿에 머물렀지만 샬롯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여자는, 언제 밥 한 번 먹자, 라거나 곧 보자, 라는 모호한 제안은 같이 밥 안 먹어도 그만, 곧 못 봐도 그만일 경우에 하는 인사치레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 이후로 샬롯을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면서 여자는 모호한 인사에도 진심과 바람이 담겨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와 별개로 까엡의 특산물인 블루크랩은 맛있었다. 시기가 맞지 않아서인지 다리와 배부분이 새파래서 블루크랩이라는 이름을 가진 블루크랩의 다리와 배는 그리 파란빛을 띠고 있지 않았다. 푸른 빛깔은 불에 찌면 사라지는데, 굳이 방금까지 살아있던 게를 쪄서 먹을 거면서 블루크랩이 별로 파랗지 않아서 아쉽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 테이블에나 자리를 잡고 기다리면 게를 쪄서 가져다줬는데 그런 방식은 한국의 수산시장과 비슷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크지 않은 게들은 노란 고무줄로 꽁꽁 싸여있었다. 처음 먹는 게도 아닌데 여자는 고무줄에 꽁꽁 싸여있는 그 게들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랐다. 여자가 잡고 있던 게를 다시 내려놓았을 때 건너편에 앉아있던 아주머니 한 분이 말없이 다가와 잘 보라는 듯 여자의 눈앞에서 고무줄을 풀고 게를 뜯어보였다. 모자란 게 많은 여자도 그런 분들 덕분에 혼자서도 웬만큼 별 일 없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크지 않지만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시장에서 점심을 먹은 후에는 시장 옆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시장에 비해 부근 식당들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 여자는 그중에서도 가장 한가해서 손님이 하나도 없는 레스토랑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바다와 맞닿은 테라스가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여행이 시작된 후 그때까지 일관되게 해왔던 한량 놀이를 반복했다. 커피를 마시며 책도 보고 글도 쓰고 와이파이가 잡히니까 사진을 찍어서 인스타그램에도 좀 올리고 뭐 그런.



2시에 데리러 오겠다는 미니밴 기사에게 시간이 너무 짧으니 30분만 더 달라고 손짓 발짓으로 말해둔 터라 여자는 여유를 부리다가 2시가 넘어서야 샬롯이 태워준 방향과는 반대방향 해안도로를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도로에는 가족 단위로 휴가를 나와 돗자리를 펴고 음식을 나눠 먹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어렸을 때 가족들과 외가 식구들이 많은 부산 송정 해수욕장으로 갔던 때가 저절로 떠오르는 장면들이었다.



그렇게 걷는 동안 그렇게 쨍했던 하늘이 소나기를 뿌렸다. 바다 위엔 구름이 끼었어도 머리 위엔 구름이 없었다. 먹구름 하나 없이도 비가 내릴 수 있구나 싶은 그런 비였다. 그 비는 정말로 여자가 해안을 따라 걷는 그동안만 내리고 그쳤다. 소나기가 그치고 다시 아침에 내려준 그 장소에 도착했지만 여자가 타고 돌아갈 미니밴은 오지 않았다. 기다리며 두리번거리는 동안 괜한 호객꾼들만 말을 걸어올 뿐이었다. 버스가 오지 않는다면 도저히 걸어서 돌아갈 자신이 없는 그 길을 떠올리며 여자는 점점 초조해졌다. 30분을 기다려도 차는 오지 않았다.



점점 불안해진 여자는 혹시 하는 마음에 오전에 여행사 앞에서 출발을 기다리며 찍어둔 사진을 뒤졌다. 다행히 여행사 전화번호가 찍혀 있는 사진을 발견해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면서, 내가 누구라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대개는 자신들이 필요한 말 정도만 영어로 할 줄 아는 여행사 직원과 얘기가 잘 될까 초조했던 여자는 전화받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안심을 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왜 저렇게까지 시끄럽게 말해야 할까 생각했던 아침의 그 목소리가 분명했다. 그 목소리가 반가울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반가웠다. 그녀는 여전히 아주 큰 소리로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능숙하지 않은 영어였지만 하려는 말을 알아듣기가 오히려 쉬웠다.



여자는 주차장과 가까운 해변 나무 아래에 앉아 차를 기다렸다. 어디 멀리 갈 수도 없었지만, 어디 멀리 가지 않아도 해변 저 끝에서 이끝까지가 다 보였다. 앉아, 바다를 보며 한 번씩 뒤를 돌아 차가 왔는지 보는 것도 잊지 않으며 크랩마켓에서 사 온 과일을 먹었다. 그때 낮은 나무에서 굵은 빗방울이 몇 차례 후드득 떨어졌다. 다시 또 소나기인가 싶어 하늘을 보니, 그건 소나기가 아니었다. 아까 내린 비가 나뭇잎에 고여 있다가 그때 떨어진 것이었다.


아까 내린 비를, 나무가 지금 떨구고 있네.


그 문장만으로도 충분한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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