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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Oct 31. 2021

"바쁜데 자리 비워서 미안해요"

하지 말았어야 할 말 04

10월 6일 수요일 화이자 2차 접종을 했다. 1차 접종 이후 나는 거의 3주간 편안한 일상을 누리지 못했다. 1차 접종 다음날은 잠이 쏟아져서 20시간 정도 잤고, 그다음 날부터는 몸살 증상에 계속 시달렸다. 나는 기초체온이 낮은 편이고, 아파도 열이 잘 안 난다. 열이 좀 있는 것 같다 싶어도 37.5도를 넘는 일은 잘 없다. 한 번은 몸살약을 사러 약국에 가서 "열은 없는데 으슬으슬 춥고 근육통이 심해요"라고 했더니 약사가 웃으며 "열이 나니까 으슬으슬한 거예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몇 년 전 A형 독감에 걸렸을 때도 열이 나지 않아 병원에서 독감 검사를 권하지 않았는데, 너무 낫질 않아 혹시나 하고 검사를 해보니 A형 독감이었다. 뒤늦게 타미플루를 처방받았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앓을 만큼 앓은 후에야 건강을 회복했다.


백신 1차 접종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좀 괜찮은 것 같다가도 한창 활동하고 오후 네다섯 시가 되면 슬슬 몸살 증상이 시작되는 것이 무려 3주 가까이 지속됐다. 퇴근하고, 저녁 먹고 약 먹고, 일찍 잠들면 다음날 아침에는 어! 오늘은 괜찮네 했다가 오후가 되면 다시 증상이 시작됐다. 


몸살뿐만이 아니었다. 백신 접종 직후부터 한쪽 눈이 너무 가려웠다. 며칠 참다가 약국 가서 안약을 사서 넣었고 3주가 지나도 낫질 않아 안과에 가서 처방약을 받았다. 비염도 다시 심해졌다. 평생 비염 때문에 고생하다가, 5년 전부터 3년 정도 하루 한 끼 샐러드를 먹은 후로 다 나았다고 할 만큼 좋아졌었는데 도루묵이 됐다. 소화불량도 심해졌고 어느 날은 명치가 너무 아팠다. 또 어느 날은 턱이 아파서 음식을 씹기 힘들었는데, 턱이 아플 때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났다. 정말 하다 하다 턱까지 아픈 건가, 참 골고루 한다 싶어서.


최근 몇 년 간 나는 꽤 건강한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픈 데가 많아서 학생 때는 종합병원이라는 별명도 있었고 잔병치레뿐만 아니라 큰 병도, 큰 수술도 겪었다. 30대 중반에 큰 수술을 하고 회복이 너무 더뎌서 결국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이후부터 운동을 꾸준히 하기 시작했다. 그때 마치 집 근처에 새로 문을 연 크로스핏에 덜컥 등록해 8개월 동안 평일엔 빠지지 않고 거의 매일 운동했다. 이후에도 스피닝, 요가, 필라테스 등 운동을 계속했고 마침내 스쿼시를 처음 접하며 이제는 스쿼시에 정착한 상태다. 코로나가 심각해져 모든 센터가 문을 닫았을 때는 한강에서 달리기를 했고, 서울을 떠나오기 전 마지막 한강변 달리기에서 10km를 1시간 5분 정도에 뛰며 체력을 끌어올렸다.


운동과 식단 조절도 병행했다. 스쿼시를 시작하던 무렵부터 매일 점심을 샐러드로 먹기 시작했다.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한 거였지만 야식과 술 때문에 특별히 체중이 줄진 않았다. 하지만 이걸 2년 정도 꾸준히 하고 나자, 10대 때부터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혀왔던 비염과 장염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걸 어, 그러고 보니! 하며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어, 그러고 보니 알레르기약 안 먹은 지 1년이 지났네? (플로리딘, 지르텍 안녕) 어, 그러고 보니 요즘은 차가운 거나 매운 거 먹어도 배탈이 잘 안 나네? 


처음엔 환절기에만 심해졌던 비염이 어느 순간 일상이 돼버려서 엄마는 내게 청소도 시키지 않을 정도로 심했던 비염이었다. 음식, 기온, 먼지 등 알레르기 유발인자가 너무 많았고, 비염이 심해지자 코뿐만 아니라 목이 너무너무 가려워서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목구멍이 가려울 땐 긁을 수도 없어서 나도 모르게 침을 계속 만들어내서 꿀꺽꿀꺽, 있는 힘껏 세게 삼키곤 했는데 그렇게 한다고 가려운 목이 가렵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엄마는 그걸 알았다. 내가 침을 세게 삼키고 있으면 또 목이 가렵냐고 바로 물어보곤 했다. 양약, 한약, 민간요법 등 안 해본 게 없었지만 비염은 점점 더 심해졌고 그나마 민간요법이 효과가 좀 길게 가서 엄마가 늘 약재 구해서 고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장염의 역사도 유구하다. 연애 초반 데이트 때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배가 아파서 함께 화장실을 찾아 뛰어다니다가 어느 절에 들어갔던 일은 (지금이니까) 귀여운 에피소드고, 뭘 먹었다 하면 배가 아파서 어느 순간부터는 배는 원래 아픈 것이고 설사를 하면 장이 비워지니까 좋은 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크게 탈이 나면 몸살이 오고 구토감을 동반했지만 그렇게 장염을 동반하며 살아왔다.


그랬던 비염과 장염이 이제 만성이 아니게 되었을 때 (경미한 역류성 식도염 정도는 현대인이라면 필수 질병이므로 치지 않는다) 나는 10대 이후 처음으로 스스로를 건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됐다. 매년 연말정산 때마다 병원비 비중이 굉장히 높았는데 작년인가, 재작년에 10만 원이 채 나오지 않은 때가 있었다. 그때는 정말로 건강해졌다는 것이 증명된 것 같아서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랬는데!


코로나 백신을 맞은 이후 과거에 나를 괴롭혔던 질병들이 모두 몰려온 거였다. 백신이 내 기저질환을 하나씩 하나씩 소환하는 듯했다. 꾸준히 했던 스쿼시를 하지 못했고, 기초체온을 올리기 위해 9월부터 전기장판을 켜서 매일 밤 땀을 내며 잤다.


다행히도 1차보다 부작용이 더 심하다던 2차를 맞은 지 6일째인 오늘,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2일 차, 3일 차는 모두 백신 휴가를 썼고, 4일 차와 5일 차는 주말이어서 마음 편히 쉬면서 몸이 많이 회복됐다. 지금은 몸살 기운은 없고, 두통과 위염 증상은 여전히 있다.


인생의 긴 시간을 잔병치레로, 그에 비하면 짧은 시간을 꽤 건강하게 살아온 내가 최근 자주 아프면서 새롭게 떠오른 감정이 있다. 미안함, 그리고 미안함을 느끼는 것에 대한 반발심.


최근 우리 팀을 꽤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일본의 푸드테크 서비스 개편 프로젝트에 참여해 내년 초에 그 결과물을 실제 서비스에 접목하게 되는데 지금은 한창 막바지 개발과 테스트가 진행 중인 시기다. 거의 모두가 백신 접종을 했지만 우리 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가장 긴 시간 부작용에 시달렸고(일본에서는 '부작용'이 아니라 '부반응'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내가 겪은 건 1차 땐 부작용, 2차 땐 (아직은) 부반응)인 듯하다), 휴가를 사용하거나 일찍 퇴근하거나 하는 경우도 근래 들어서 많아졌다. 


그리고 내가 다시 "다들 바쁜데 미안해요"라고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회사에서 주는 백신 휴가 이틀을 사용한 이후에는 매일 출근했지만, 그리고 대부분의 날들을 하루 9시간 일했지만, 야근하는 동료들에게 먼저 퇴근한다고 알리는 일이 편치 않았다.


회사원이라는 것이 되고부터 '아픈 것'은 '죄송하거나 미안한' 일이 되었다. 미안하니까 눈치가 보이고 마음이 편치 않게 된다. 아픈 건 미안한 일이 아니라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어쩐지 나도 모르게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누군가처럼 38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구토를 하고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픈 건 아닌데, 내가 엄살이 심한 걸까. 다들 나만큼은 아닌 것 같은데, 사실 참고 있는 걸까. 내가 문제일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문득문득 그랬다. 그래서 어느 날부턴가는 이제 좀 괜찮으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거짓말을 했다. 나도 지겨운데 저 사람들도 지겹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 정도로 아픈 것(쓰러질 정도도 아니고 일은 할 수 있을 만한 정도)은 아프다기보다 불편한 정도인 것 같았고, 이제는 괜찮다고 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내 마음 편하자고 내가 '(아파서) 미안하다'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이 정도 아픈 걸로 쉬어서) 미안하다'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본인이 아플 때, 죽을 만큼 아프지 않은데 일을 쉬게 될 때, 자기도 모르게 미안해하고, 미안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다른 사람이 미안하다고 하는 걸 자꾸 보고 들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걸 학습하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아픈 건 사람마다 느끼는 정도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고 일상생활이나 업무에 미치는 정도가 다른다. 그러니까 그건 각자 판단하는 거다. 누군가는 쓰러질 정도가 돼야 병원에 가고 아프다고 말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그렇지 조금만 아파도 병원에 가고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우리, 회사원에게는 주어진 휴가가 있다. 병가가 있지만 절차가 까다로워서 웬만하면 연차를 모두 소진한 후가 아닌 다음에야 연차를 쓴다. 미리 휴가를 내지 않았다고 미안할 필요도 없다. 내가 내일, 혹은 내일모레 아플지, 지금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제는 우리 팀 동료가 결혼식을 올렸다. 다음 한 주는 휴가다. 지난주 휴가 공지를 올리면서 그 또한 '한창 바쁠 때 자리 비워서 미안하다'고 했다. 결혼하는 것, 그로 인해 자리를 비우는 것 또한 미안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부터라도 이제는, 휴가를 사용할 때 어떤 이유로든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바빠서 고생할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어쩔 수 없이 들더라도 말로는 내뱉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 서로 그런 걸로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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