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복귀 비행기가 필요 없는 삶
2021년 설날, 코로나 19로 가족도 5인 이상 모일 수가 없는 상황. 시어른들과 우리 가족만 조촐하게 모여 차례상을 지내게 되었다. 다 모이면 42명 (몇 년 전 숙부님이 돌아가셔 인원이 줄었다)인 시댁 식구들의 아침, 점심, 저녁상을 이틀 내내 차리면 겨우 끝났던 명절 행사가 설날 당일, 반나절만에 끝났다.
남은 3일의 연휴를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느닷없이 제주도를 가자고 했다. 늘 그래 왔듯이 흔쾌히 동의했고 남편은 제빠르게 비행기와 숙소 예약을 완료했다. 이럴 때만큼은 완전 빠름빠름빠름이다. 우리 가족의 여행은남편이 모든 일정과 교통편, 숙소를 검색해서 정하고 예약을 한다. 나는 아이들 스케줄과 컨디션을 잘 체크하고, 빠르게 짐을 싸면 된다. 나름 분업이 잘 되어있는 구조.
코로나19로 길어졌던 집콕 생활의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겠다는 행복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2021년 올해 첫번째 여행, 제주여행이 시작되었다.
토요일 오전 10시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도착했다. 내가 사는 경기도는 입춘이 지났는데도 눈이 내리고 한파 주의보가 발효되는데 제주는 봄이다. 두꺼운 겉옷이 필요 없을 정도로 포근한 날씨.
이번 숙소는 제주신화월드 메리어트 리조트관이다. 2년 전 시부모님과 함께 왔을 때는 제주신화월드 써머셋을 숙소로 예약했지만 이번엔 급하게 숙소를 잡기도 했고, 취사가 필요 없어 호텔 객실을 예약했다. 깔끔하게 침대 2개가 놓여있고, 테라스도 있고, 아이들을 편하게 씻길 수 있는 욕조도 있다. 2일간 잘 쉬다 갈 수 있는 깨끗한 숙소.
코로나 19로 학교는커녕, 집 앞 놀이터에도 자유롭게 나갈 수 없는 아이들은 간만의 여행에 신이 났다. 수영장에서 실컷 놀고, 놀이동산도 가고, 유채꽃도 보고, 해안가 산책도 했다. 시장 구경도 하고, 호떡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과자도 먹고, 맛있는 밥도 먹으며 하루종일 투닥거리는 남매의 모습을 보니 행복하다.
직장인일 때의 여행은 연차나 휴가를 잘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비서로 오랫동안 일했던 나는 휴가를 내기는커녕, 주말을 반납하고 경조사에 참석하는 일들이 많았다. 여행은커녕, 쓸 수 있는 연차도 못 챙겨 먹고살았던 빡빡한 날들이었다. 어쩌다 일정이 비는 주말이 생기면 금요일 회사 업무가 끝난 후 버스나 비행기를 타고 여행지로 이동해 토요일 늦은 밤이나 일요일 이른 아침에 복귀하곤 했다. 1박 2일, 혹은 2박 3일의 짧은 여행.
제대로 쉬고 온다는 느낌보다는 여행의 흉내만 내고 온다는 느낌이랄까. 늘 시간이 부족했고,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런데 지금은 구하기 힘든 금요일 밤 교통편을 예약할 필요도 없고, 일요일 아침에 복귀할 필요도 없다. 해야 할 일이 있지만 아이패드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프리랜서 맘이기 때문이다.
여행의 마지막 날 월요일 아침, 출근을 해야 하는 남편은 아침 6시에 일어나 공항으로 먼저 떠났고, 나와 아이들 둘은 아침 9시에 느긋하게 일어나 30분간 침대에서 뒹굴거린 후 느릿느릿 조식을 먹으러 이동했다. 식사 중에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던 태블릿 PC를 챙겨가 아이들도 보고 싶은 영상을 보며 식사를 했고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앞에 놓고 이 생각, 저 생각하며 편안한 식사를 했다.
빨리 먹어라, 빨리 씹어라, 시간이 없다, 어서 가야 한다 같은 재촉 없는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 풍경. 식당에 투숙객들이 거의 없어질 때 즈음 일어나 객실로 돌아가 천천히 짐 정리를 하고, 30분 전에 렌터카 반납을 하고, 비행시간 2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해 아이들과 자장면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면세점 아이쇼핑을 하고 (딱히 필요한 게 없어 안 샀음) 14시 35분 탑승시간에 맞춰 게이트 앞에 도착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복귀 여정. 캐리어를 들고 뛸 일도 없었고, 화장실이 급하다는 아이에게 짜증을 낼 필요도 없었고, 늘 시간이 없어 들어가 보지도 못했던 면세점 구경을 못해 서운할 일도 없었다. 시간은 남았고, 마음은 편안했다. 여행의 여유로움만 남은 제주여행.
직장이 없는 삶이 불안했던 적이 많았다.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직장에 다니는 것과 같은 의미인 줄 알고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직장이 없어도 나는 일을 하고, 돈을 벌고, 돈을 더 벌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고민한다. 거기에 엄마의 역할도 충실하게 하고 있다. 나의 시간을 누군가에게 내어주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고 있다.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권리를 이제서야 누려본다.
요즘의 나는 무엇 하나 부대끼는 것이 없다. 여행도, 휴식도, 일도, 육아도, 살림 모두 나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 비교적 아름다운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일상을 산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일요일 복귀 비행기 표를 구하지 못해 여행을 포기해야 하는 일 따윈 이젠 없다. 다 늦은 월요일 오후에 집에 돌아오는 여행의 끝은 여유로움으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