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 석사 완수하기
뒤늦은 호주 생활 적응기 (1)
호주에서 통대 과정을 이수하는 교환 학생신분으로 지내고 있다. 이미 외국은 오래 나가 살아 봤으니 그만 나가도 된다고 생각했다. 나처럼 단순히 영어권만 있었다기보다 일본, 필리핀, 네팔 같은 아시아 영어권에 장기간 거주한 사람이 이렇게 또 호주에 오니 또 새로운 거 같으면서도 호주처럼 다인종이 많이 사는 국가에서 또다시 필리핀, 네팔, 인도인 그리고 중국, 일본인들을 자주 보니, 다양한 문화 경험의 총집합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다.
그냥 다른 국가들 살기 전에 호주 와서 살았다면 다문화를 한 번에 겪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주에는 호주 원주민들과 영국에서 건너온 호주인, 그리고 다양한 인종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고 있다. 중국, 한인 타운을 비롯하여 인도인들이 영역을 넓힌 파라마타 같은 지역도 어느새 저만의 색깔을 가지고 자리 잡아 이제는 멋진 타운의 모양새를 갖추었다고 한다.
같은 인종이고 문화 속에서도 수없이 다양한 캐릭터를 만날 수가 있는데 인종까지 다르니까 다양한 인간사를 경험하게 되는 거 같다. 단순히 학교만 본다 하여도, 수업의 교수님들도 단순히 호주인들일 거라 기대했지만 호주 교수님은 아직까지 한 번도 못 보았다. 아랍, 인도, 중국, 페르시아, 이탈리아, 아르헨티아 등등 정말 다양한 국가의 분들을 뵐 수가 있었다. 통번역학과의 특성상 영어와 한국어의 출발어, 도착어 통, 번역을 맡아주실 한국 교수님들도 상주해 계심은 물론이다.
통번역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통역이라는 분야도 생소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가르쳐 준다는 것인지 궁금했었다. 한국 통대에서 대부분의 통역 기술 부분과 다양한 소재를 다루던 경험들을 되살려 호주에서도 같은 내용을 공부할 줄 알았지만 매우 달랐다. 호주 대학원에서는 이론은 기본으로 탑재해야 한다는 주의인 듯 보였다. 통번역에 대한 이론이 이렇게 많은 지 몰랐다면 조금 부끄러운 것일지도..??
굉장히 많은 학자들의 이론 및 논문들을 쌓아두고 읽어야 했다. 몇 천자되는 에세이도 과목마다 써야 했고, 프레젠테이션도 과목마다 몇 번씩 있었던 것이 조금 예상 밖이긴 했으나 그래도 받아들이자는 심정으로 성실히 수행했다. 퀴즈나 실습도 5일씩 있었고, 상대 학생 번역을 검수하는 작업도 적지 않게 진행했다.
인터넷 백과사전 번역이나 자막 번역 등과 같은 일도 하고, Memo Q 같은 번역 기계를 다루는 법도 배웠다. 번역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법이라거나, 여러 가지 검수 방법을 습득했고 체화했다.
그런데 나는 이미 한국에서 인공지능 그러니까 chat GPT나 구글, 파파고, DeepL 등을 1년여간 검수했었고 호주 현지에서도 번역 대회에서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었기에 익숙했던 수업과정이었던 것 같다. 학생이라고 하여 해당 분야 경험이 전무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통대생 1학기 이후부터 1년도 안되어 여러 경험을 쌓아온 나이기에 통대 과정에 괴리감을 느낀 적도 있다.
그래도, 이론 및 논문을 다양하게 읽어볼 수 있었고, Intercultural Communication 과목과 Discourse Anaylsis 같은 담론 분석의 영역에 접근할 수 있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쁜 일이었다. 학사를 Mass Communication으로 공부했고, 여러 신기한 이론들을 배우면서 학문의 지평을 넓혔었다. 하지만 왠지 거기서 중단된 것 같았던 소통의 영역을 이번 학기를 통하여 다소 해소할 수 있었기에 개운했다.
더 일찍 석사를 해 볼 생각은 없었냐고 묻는다면, 30대엔 더 이상 공부는 하고 싶지 않았었다. 남들보다 뒤처진 거 같은 인생에서 남들처럼 살고 싶어졌었고, 결혼이 하고 싶어 졌었다. 친구, 지인들은 일찍 결혼하여 벌써 아이가 둘인데, 난 30이 넘는 나이지만 아직도 혼자라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연애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나였기에 호감을 보이는 이성들은 있었어도 쉽사리 마음을 열기가 어려웠다. 만남을 지속하기는 것조차 30대가 되면 쉽지 않았다. 여성의 30대는 남성의 30대와 조금 다른 거 같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남성은 연하를 만나니 딱히 나이의 제한이 없지만, 여자는 30이 넘게 되면 연상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고, 그렇다고 연하를 만나기도 애매해진다.
30이라는 나이가 그런 거 같다. 나때에는 여자 30살은 계란 한 판이라고 했었다. 갑자기 생각나는 건데, 여자 25살은 크리스마스 케이크이라고들 했다.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25일까지는 절찬리 판매 중인데 25일이 딱 넘어가면 떨이로 팔린다고들 놀리곤 했다. 이렇게 숫자를 가지고 여성을 나이로 가치를 매기는 문화도 우리 나라밖에 없지 않을까 싶지만 말이다. 남들이야 나이로 뭐라고 정의하던, 지금은 아예 앞자리가 바뀐 시점이라 해도, 이상하게도 나는 여전히 20살의 나 그대로인 거 같다. 변한 건 거의 없다. 단지 약간의 경험과, 약간의 실패와, 약간의 성취와, 약간의 회한이 버무려지긴 했지만 순수함은 잃지 않았다.
변한 건 자기소개글 한 줄이었다.
어쩌면 보다 쉽게 적을 수 있는 그 한 줄. 쌍둥이 엄마, 통번역사, 인권운동활동가.
내가 속한 사회가 나라는 사람을 쉽게 인지할 수 있는 정체성이 있다는 건 어쩌면 기뻐해야 하는 걸까?
20 살엔 나라는 사람을 뭐라 정의해야 할지 몰라서 싸이월드 글마다 한참 고민했던 것 같고, 이력서도 늘 며칠씩 고민하며 적었던 것 같으니. 그래서 20 살은 더 외적인 것에 집중했는지도 모른다. 옷과 헤어스타일, 화장에 관심을 가졌고 셀카를 많이 찍었다. 다른 사람이 찍어주면 그렇게 화가 났다. ㅋ 그냥 생긴 대로 찍힌 것일 텐데 더 이쁘게 못 찍어주냐며 다시 찍어달라는 말이 입에 붙었었다.
요즘 20 대 젊은이들도 다시 찍어달라는 말을 하는지 궁금하다.
그래도, 20 대에 유학도 하고, 네팔 안나푸르나 등반을 하고, 수없이 많은 밤 보라카이 해변을 거닐고 바다에서 헤엄쳤고 바다 한가운데에서 석양을 바라봤다. 인생은 그렇게 시시각각으로 내게 선물을 주었고, 매 순간이 최고의 순간이었다. 아직도 그때 보았던 광경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삶은 일련의 경험들이 한데 뭉쳐져서 어느 순간 꽃피는 것 같다.
그리고 정말 다양한 직업군에서 근무하면서 사회 경험을 쌓을 수 있었던 점도 감사하고 있다. 그때의 경험들이 없었다면 지금 통번역 대학원을 거친 통번역사로서 무리 없이 일정을 소화하고 일이 연결되는 건 상상도 못 했을 것 같다. 사실, 소개해주던 에이전시들도 놀라곤 했다.
누가 가도 어려워서 잘해야 본전이고 아니면 망하고 오는 자리로 준통번역사인 날 보내고는 잘되면 다행이고, 안되면 학생이라 그렇다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으니.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뭔가 서바이벌 같은 느낌이었다. 매 회차에 나는 대회에 출전했고, 반드시 그 경기를 무리없이 완수해야 했다.
국내 통대 학교를 휴학하고 전차를 제작하는 회사에서 기술 통역을 구한다는 연락을 에이전시로부터 받었았다. 전차 부품 등은 생소해서 내가 할 수 없을 거 같다며 여러 번 거절했지만 에이전시의 차장님께서 내가 하는 것이 좋겠다며 연거푸 부탁을 하셨다. 월급이 적지는 않았기에 결국 수락을 했다. 해당 기업의 부장님께서 직접 면접을 보시고, 통역 시험을 보셨다. 기술 통역은 자료를 주시고 학습을 좀 한 다음에 보도록 허락해 주셨다. 자료를 받았는데 단어들을 보고 적잖이 당황했었다. 기계 공학이라면 이전 회사에서도 해외영업직군에 있으면서 공부했었다. 그런데 이건.. 단순한 기계 공학이 아닌, 기계와 전기를 접목한 회사의 특허 기술 및 부품이었다. 전공자들도 쉽지 않다는 영역을 순식간에 공부해서 타인의 입을 통한 메시지를 마치 내가 다 이해하듯 또 다른 언어로 뽑아내야 하는 작업이다. 솔직히 나만 그렇진 않겠지만, 통역 자료 받고 속으로 욕 나오는 순간들이 있다. 난 못하겠다고 죄송하다는 전화를 드렸었다. 그런데 다 이해 못 해도 괜찮다고 부장님께서 많이 힘을 주셨고, 그래도 내가 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여러 명 면접과 통역 시험을 보았는데 내가 제일 나았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해당 기업에선 예상보다 인도 기술자들을 상대하기에 애로사항이 많았고, 멀리 왔으니 바라는 건 많은데 한국 기업에서도 고유 기술을 전수한다기보다는 전기 기초 기술을 전달하는 수준에 그친 것도 사실이었다. 한 달이 다 될무렵, 한국에 도착한 인도기술자들을 상대로 참 기술 통역 일정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인도기술자들이 무언가 기계를 앞에 두고 있었는데 물어보니 녹화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자 부장님께서 내 통역을 전부 녹화하자고 하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그건 당연히 안될 말이다.
나는 펄쩍 뛰었다.
통역사에게도 세계 통번역 협회가 정한 룰이 있다.
그중, 녹화를 할 시엔 기존 통역료의 100% 비용 추가, 음성만 녹음 시엔 50% 등의 규칙이 있다.
번역과 마찬가지로 통역도 저장이 되는 즉시 배포가 가능한 상품성을 가지기에 그렇다.
저작권을 인정받는 것이다.
더군다나 인도 회사에서 본 기술 통역 녹화자료를 보관하고 장차 직원 훈련 자료로 이용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계약서를 들이미는데, 그럼 기업과 통역사의 계약은? 왜 미리 해당 사항을 말하지 않았는지 의문이었고 녹화에 대한 내용이 담긴 계약은 언제 진행했는지 물어보니 내가 통역에 참여하기도 훨씬 전인 4월이었다. (나는 9월에 투입. )
다 알고도 내게 확실히 인지하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기업이 고용했다 하더라도 녹화에 관한 건 미리 언지를 해 주었어야 했다. 통역의 경우 녹화가 진행되면 기업과 또 다른 계약을 맺는다. 저작권 계약인 것이다. 이유라면 우리는 프리랜서이고 기업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더라도 계약 또는 파견으로 임무 수행을 하게되는 구조라 그렇다. 계약이 끝나면 기업과의 관계는 종료된다. 그렇다면, 개인사업자이고 프리랜서인 나는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 하고 보호해야한다. 솔직히 이 부분을 얼렁뚱땅 넘어가려 한 기업과 소개 에이전시에 화가 났다.
그래서 비용 추가를 요구했지만 기업은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렇게 내가 끝을 결정해야 했다.
순순히 응하거나, 피하거나.
하는 수 없이 해당회사에서 관련 기술 번역을 하는 중에, 타이밍좋게 다른 에이전시에서 불기 차게 연락이 왔다. 다른 기업에서 3PL 계약이 있는데 4일이고 액수가 컸다. 내가 꼭 해줬으면 한다며 부탁을 하셨다.
알겠다고 수락을 하고 바로 회사를 나왔다.
그다음 날 바로 서초에 있는 해당 기업으로 가서 하루종일 송수신기를 들고 다니며 마이크로 동시통역을 했다. 일반 비즈니스라 어렵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국내기업이 외국계 기업이라 영어는 다들 잘하셨지만 그래도 통역사를 고용하셨고, 사내 통역사가 있는데도 외부 통역사를 따로 고용하신 것이다. 자료는 없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는지 4일이었는데 5일 차를 또 부탁하셔서 마지막까지 완수하고 나왔다.
5일 차는 IT 통역이었고 이 부분은.. 할 말이 좀 있어서 다음 차에 다시 꺼내고 싶은 주제다.
옛날 생각을 하니 입가에 미소가 자연스레 지어졌다.
당시엔 힘들고 괴로운 거 같은 경험도 나중에 떠올리면 이렇게 미소가 지어진다.
내가 정말 그 일들을 해냈다고?
스스로도 믿어지지가 않을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통역의 순간을 서바이벌이라고 표현했나 보다.
언제나 긴장되고 거꾸로 솟는 듯한 아드레날린과 땀, 열정이 순간을 애워싸는 경험이다. 하지만 경기를 완수했을때의 그 스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짜릿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