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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타인의 의견을 나의 현실로 만들 필요는 없다.

'이제 어떡할 거야!'


갑자기 호텔 로비가 떠내려가라 고성이 들렸지만 높은 천장 탓인지 금세 소음에 흩어졌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행사 기획팀 매니저가 우리 통역 중 한 명에게 마구 화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소리를 아무리 지른다고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 이미 엎어진 물이다.


3일간의 긴 여정이었다. 매일 새벽에 출근했고 밤 11시가 넘어서야 녹초가 되어 집에 들어갔다.

잡음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계획이 틀어진 적도 있고, 마음 같지 않았던 일들도 있었다.  행사팀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통역사가 일을 제대로 못해서 벌어진 사고들로 원활하지 않게 진행되자, 저렇게 쥐 잡듯 잡는 모습을 보니 통역사가 너무 안 돼 보였다. 심지어 나이도 많으신 분이었는데 저렇게 사람들 앞에서..


아프리카 8개 국의 사절단이 각 나라의 장관님들과 한국 농업부와 MOU 협약을 맺기 위하여 방문한 일정이었다.  호텔 숙소 비용은 한국에서 부담하지만, 호텔방에 구비된 모든 사재 및 간식 술 음료 등은 불포함 내역이었다.


숙소 들어가기 전 우리는 그 점을 반드시 미리 고지하라고 언질을 받았었다. 12명 정도 되었던 것 같다. 리에종 통역사들 중 통대를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아프리카는 나라마다 언어가 달라서 각 언어에 익숙한 사람들이 모였다.

 

 다들 사전에 분명히 고지를 했을 텐데 어찌하여 각 국가 사절단 중 한 사람도 제대로 인지를 못하여, 호텔 방마다 물건과 식음료를 사용하였는지 알 수 없다. 국가별  백만 원씩 비용이 부담되었다는 소식을 호텔 측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호텔도, 농업부도, 행사기획팀도 비상이 걸려버렸다. 예상보다 비용이 훨씬 많이 나와 버렸고 어림잡아도 이건 감당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 와중에, 호텔 측에선 내가 맡았던 국가만 깔끔하게 아무 문제도 없었다며 엄지를 척 들어 보여주셨다. 


 자기네 국가 사절단 중 엄청난 부자가 있어서 자기네 사절단 방 전체 비용을 다 부담하겠다고 했다며 잘 리 했다고 자랑하듯 말하는 타대 통대졸업생도 있었다.


애초에 제대로 고지를 하지 못한 통역사가 너무 많아서 행사팀도 추후 문책을 면치 못했다. 마지막에 공항에서 사절단 환송을 마치자마자 관계자 분들께 둘러싸여 비난을 받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날도 오전 일찍부터 일하고 밤 12시가 넘어서야 집에 오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호텔에서 무언가 열심히 전달을 하던 통역사들은 보았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래도 언어 소통에 있었던 듯하다. 영어를 한다고는 하나 듣는 청자 입장에선 도무지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 언어라면 소통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나는 현재 호주에서 통번역 석사 과정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호주 이전에도 영어권 국가인 필리핀 5년, 그리고 네팔 등 다양한 국가에 거주했었다.  각 언어마다 영어를 하더라도 특색이 있고, 사용하는 방법도 단어도 경우에 따라 달라서 영어도 같은 영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에 따라 영어도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아시아 국가인 중국, 일본, 한국 등의 국민이 사용하면 아시아 영어라고 한다. 아시아 특유의 악센트가 있어서이다. 문제는 외국인들이 아시아 영어가 매우 알아듣기 힘들다고 말한다는 사실이다. 어딜 가나 동일한 문제로 외국인들의 하소연을 듣곤 한다. 아시아인들은 영어를 이상하게 한다거나 악센트를 못 알아듣겠다.. 왜 아시아 국가는 영어를 가르치면서 어려운 단어만 외우게 하고 생활 대화 훈련은 뒷전인지 모르겠다고 최근엔 호주인 한 분이 말씀하셨던 경험도 함께 적어본다.


십 년 전, 한국에서 외국인들만 대상으로 하는 외국인 예배에 한참 다닌 적이 있었다. 대부분 미국인 혹은 한국어를 잘 못하는 한국인 교포 3세들이지만 영어를 사용하고 싶어서 미국 등지에서 유학했던 유학생들도 더러 외국인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한 언니가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왔고 영어로 대화를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 번은 교포들끼리 대화 중에, 언니의 발음을 지적하는 걸 들은 적 있다.  미국에서 공부했지만 영어발음이 좋지 못하다고 말하는 내용이었다.


거의 이런 대화였다.


" 나는 00 이가 하는 영어는 진짜 못 알아듣겠어. 넌 알아듣겠어?"

" 아니, 나도 마찬가지야. 무슨 소리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


한국인들은 스스로 토익 성적이 높으니까 다들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난 유학을 다녀왔으니 영어를 잘하는 사람인 거야'. '외국 대학을 졸업했으니 영어를 잘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하지만, 영어도 어디까지나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고 소통되지 않는 언어는 언어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사실 의사소통 자체가 허들로 가득하다.  


통번역 대학원에 오고 나서 과거 내가 배운 Mass Communication 학문의 이론들을 이어서 공부할 수 있었다. 여기선 출발어와 도착 어를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상황들을 연구한 이론들이 가득한 논문들을 공부한다. 문화적, 민족적, 인종, 종교, 젠더, 세대 등 각종 습속화된 특질뿐 아니라, 상황적, 문맥적 다른 해석과 언어적 그리고 비언어적 메시지 이해의 온도차가 소통의 성공을 좌우한다는 사실도 대학에서 배워 알고는 있었지만 이론들을 대입하고 나니 역시 더 잘 이해가 되었다.


수많은 역사학자, 인류학자, 사회언어학자들.


인간사를 연구하는 모든 석학들의 노력 덕택에 현재 통번역사는 언어를 더 잘 옮길 수 있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분들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현장에선 통역에 대한 이해가 적은 사람들이 통역사라는 이름표를 달고 활동을 하고 있는 사실에, 속이 상하는 것도 사실이다. 만족하지 못한 고객은 '통역사 고용했더니 별거 없더라'. '일을 잘하지 못한다', '혹은 비용대비 과대평가 되었다'는 등의 판단을 내린다.


하지만 그러한 고객들이라 하여도 진정 통역사들이 얼마나 노력하는지 아신다면 속단은 내리지 않으실 거라 생각한다.


통역 일정이 잡히면 보안을 위해서 일정 최소 3일 전에나 회의 관련 자료를 받을 수 있고, 하루 전에 받거나 아예 못 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한 상황에서 아무런 정보 및 배경지식 없이 현장에서 마치 나는 지금까지의 회의 내용을 다 꿰뚫고 있다는 듯이 업계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언어로 풀어내는 통역사를 보신다면 비록 실수가 있더라도 수고 많다고 토닥거려 주시면 좋겠다.


에이전시는 소개를 해주지만, 통번역을 공부한 사람들이 아니라서 이러한 속사정에 대하여 고객에게 제대로 고지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통역사는 20년, 30년 경력이 있는 정말 잘하는 실력가라도 실수를 한다. 통역의 상황, 체력, 컨디션 등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갑자기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단어를 통달한 백과사전도 아니다.


통역사는 사실 마술사나 마찬가지다.

특히나 한국어처럼 단어는 많이 안 쓰는데 엄청난 의미를 담는 대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언어를 통역하는 경우에는 언어를 옮기는 것보다는 의중을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해지니 그렇지 않을까 싶다.


 오늘도 법률 통역 실습에 참가하면서 호주 법대생들과 joint 해서 통역을 제공했다. 장차 변호사가 될 그들은 통역사에 대한 emphathy 가 절로 생긴다고 말했다. 어떻게 법률 문맥과 용어를 알아서 통역이 가능한지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그 기술을 배우는 곳이 바로 통번역대학원이다.


물론 우리는 훨씬 더 많은 영역을 배우고 훈련하고 있다. 통역 번역기술은 너무 당연하고, 이외에도 통역사가 지켜야 할 매너와 수많은 원칙, 신념과 가치관 및 고객과 동료를 향한 존중 등 너무 많다.


다 언급을 할 수 없지만 한가지는 확실하다.

통역업은 제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을 해도 결코 넘볼 수 없는 영역임은 분명하다.


앞에 언급했던 아프리카 리에종 통역 3일 과정을 마치는 마지막 날에 농업부의 가장 높으신 분이 내가 서 있던 곳까지 걸어오시더니 옆에 서시면서 감비아 담당 리에종이 누구인지 한번 보고싶어 왔다며 날 확인하시고 가셨다. 속으로 내가 뭘 잘했던 건지 곰곰히 생각해보면서 기분은 좋았었다.  


하지만, 거의 일년이 지나도 여전히 나의 기억 언저리에서 떠나지 않는 그 한 사람. 이름도 모르지만 행사 당일 호텔 로비에서 너무나 수치스러운 모욕을 당하셨던 통역사 분.


그분의 마음을 직접 들어보지 않았더라도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비록 3일간의 노력이 실수 하나로 전부 헛것이 되버리는 허탈감이 드셨더라도 금방 털어내시고 업무에 잘 복귀하셨기를 바란다.


우리는 오늘 타인의 의견을 구태여 나의 현실로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이상으로 고객과 에이전시 그리고 통번역사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오늘도 끄적이고 잠에 들련다.


Good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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