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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Connecting the dot

경험은 연결된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

" When life is giving you a lemon, make lemonade."

요즘 인기가 넘치는 드라마 "폭삭 속았어요"가 넷플릭스에선 영어 타이틀은 "When life gives you a tangerine.."이다. 위의 영어 문장과 같은 뜻이다.


인생이 시련을 주면 시련을 활용해서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나가라는 말이다.

보다 유연한 사고가 필요한 순간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사고하는지, 알 수 있다.




겨우 두어 달 남짓의 취업기간이었지만 나이가 많아서, 경력 단절이 있어서, 그리고 어린 자녀들 양육 문제 등 직원을 뽑을 때 걸리는 요소가 많은 나는 넘치는 인재풀에서 그다지 끌리는 사람은 아닐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반면에, 내 통역을 아예 안 들어보신 분들은 계셔도, 한 번만 들으시는 분들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내 통역을 찾고, 연락을 주시는 고객들이 계시기에.


아예 일이 생길 때마다 나에게 연락을 주시는 회사도 있고, 최근에는 2023년에 함께 작업했던 기관에서 다시 연락을 주셨다. 너무 반가웠다.


머릿속으로 어떻게 잘들 지내시나? 하고 궁금해한 적은 있었지만 잊지 않고 1년이 지나 연락을 주시면 정말 감격스럽다. 집 떠나 10년 만에 돌아온 형제를 다시 만난 듯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통역일이 생겼는데 내가 생각나서 연락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잊지 않고 연락을 다시 주시면 나같이 강철 같아 보여도 속은 정 많고 마음 여린 통역사는 고마운 마음에 간 쓸개 다 빼 줄 생각도 한다. ㅜㅜ


오전에 잠깐 하는 통역인데 한참 밑 지방에 위치한 기관이라 오고 가기는 쉽지 않은 곳이지만, 그래도 달려가야겠다고 결심한 참이었다. 온라인 통역도 가능하다 말씀드렸지만 구태여 오라고 숙박비, 교통비 다 지불하니 시간 내 달라고 하셔서 일정을 달력에 기록했다.


일정이 되어 전날 내려가서 숙소를 잡고 다음날 진행될 통역 자료를 공부하다 잠이 들었다.


낯설지만 너무나 익숙한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자연의 전경을 감상하며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해외에 체류한 시간이 10년 남짓인 본인은 한국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다. 외국 나가면 애국자 된다더니, 나가보니 한국이 더 그립고 내 나라가 제일이더라.


다음 날, 새벽에 알람 없이도 자연히 눈이 떠졌다.


그리고 숙소 앞으로 마중 나오신 과장님 차량을 얻어 타고 통역 장소로 향했다.


통역 이전에 사전 회의도 있었고, 통역 테스트도 진행을 마친 상태였기에 바로 시작하면 되었고 전날 미국에 한번 전화 걸어 시간 확인만 했다.


통역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막히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두어 번 생소한 단어가 나오면 옆에 계신 직원분들이 알려주셨다.


통역을 마치자, 연사분이 회의를 갑자기 하셔서 외부인이지만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있었다.


끝나고 악수를 청하셨다.


잘했다고, 그리고 과거에 함께 일한 적 있다고 옆에서 과장님이 언급해 주시니 아 그러냐며 한번 더 악수하자고 하시며 웃으셨다.


숙소까지 차로 데려다주시면서 통역을 나 이후로 여러 통역사들을 고용했고, 통역료가 비싼 경력 많은 통역사, 교수급 통역도 고용해 보셨다고 말씀하시면서 제 통역이 괜찮은 통역이라고 거듭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른 곳에 소개도 해주시겠다고 하셨다.


기관장님이 통역이 맘에 안 드시면 끝나고 저 통역은 못 쓰겠다며 다시는 부르지 말라고 하신다면서.


나를 또 불러주신 걸 보면 나쁘지는 않으셨던 것 같다.


영어이기 때문에 더 잘해야 한다. 다른 언어는 현장에도 거의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으니


잘하는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을 수도 있으나 영어는 한국에서 다들 배우는 언어고


듣기 훈련도 많이 했기에 못하면 바로 티가 난다.


그래서 더 잘해야만 한다.


나는 통역사니까.





인하우스 취업이 겨우 두 달이지만, 생각만큼 수월하지 않았고 좌절되자 나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통번역전문대학원 석사를 국내와 해외에서 이수를 하였나? 하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하지만 호주 유학에서 이론 공부를 통하여 내가 하고 싶은 연구 분야를 찾을 수 있었기에 호주 유학은 정말 내가 잘했다 생각하는 일 중에 하나가 되었다.


아주 오래전이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커뮤니케이션 학에서 배운 소통에 대한 이론과 문화 차이와 언어 차이를 경험하면서 여러 가지 의문점을 가졌고, 실 생활에서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문화권을 계속 접하면서 계속 쌓여가는 의문과 호기심.


탐구하고 싶은 영역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 쫓기다 보니 금세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갔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양한 언어를 배웠고, 인종과 교류하고 다른 문화권에 거주하면서 나는 이 모든 상황들을 깊게 탐구하고 싶은 지적 호기심을 가슴속에서부터 느끼고 있었다.


워낙에 배우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언어는 내가 잘해서 인정받고 싶은 분야이기도 했으니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호주에서의 이론 공부는 과거의 지적 탐구와 호기심을 이어주는 연결점인 것이었다.


connecting the dot.


스티브 잡스가 했던 유명한 말.


지금은 내가 하는 일이 장래에 어떤 도움이 안 될 것처럼 보이는 공부, 경력이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당시는 아주 상관없을 것 같이 보이던 배움이나 경험도 다 나중에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되었다.


이래서 버리는 경험은 없다는 말이 있나 보다.


유학도 했지만, 한국에서 다시 법학 학사를 졸업하고 통번역 석사를 전공했고 더 공부하고 싶은 갈급함을 느끼는 걸 보면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나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 거 같다.


AI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통, 번역 업계가 많이 위축된 건 사실이다.


게다가 최근엔 ai 스마트 안경까지 출시된다는 뉴스를 접했다.


뉴스 앵커는 통번역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며.. (속으로 그 말만은 하지 말아 줘..)

라고 내심 바라기는 했건만.


통번역 업계의 타격을 전혀 고려 안 하는 저 앵커가 야속했다.


물론 기계의 발전이 훨씬 사람의 삶을 윤택하고 편리하게 하지만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터에나 밀려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기계의 자동화로 공장에서, 사무직에서, 주식 시장에도 이젠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이 대부분 자리를 메꾸고 있다고 하는 소식은 낙관적으로만 바라볼 일은 아닌 거 같다.


다행히 한국어와 영어는 아직 통역과 번역에서 희망이 있다고 믿는 1인이다.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기에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요즘 나는 비즈니스 출강도 나가고 있었는데, 계약을 한 회사가 예전에 필리핀에서 영어 공부하고 왔냐며 자기들은 미국에서 공부했다고 나를 얼굴에 대고 정면에서 마구 무시하던 이들이 근무하던 그 회사에서 몇 년 간 지속해서 연락이 왔고, 못 이기는 척 이번엔 지원을 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일이야 추억으로 묻고 일은 일이니까 재미있게 하고 있다.


예전에 화우라는 로펌에서 대표 변호사 영어회화 강사 경력도 있었고 다시 하니 재미있었다. 결혼하고부터는 영어 교육쪽에서 학생들 내신과 입시에만 집중했었는데, 지난 2년간 성인 영어회화반을 운영했고, 성인 지도에 대한 부담감을 많이 내려놓을 수 있었다.


비즈니스 출강을 큰 기업으로 나가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함께 시작했던 몇 명 안 되는 강사 중, 그 수가 줄어있었다.


계약을 하고 출강을 나갔어도 기업에서 수업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잘려나가는 냉정한 구조구나 싶었다.


영어로 수업을 해달라고 하길래, 이건 생각을 못했지만, 알겠다고 하고 매일 영어로 수업을 계속하고 있다.



나의 학생분 한 분이 오늘 수업에서 과제를 이렇게 정성스럽게 작성하시고 프린트하여 파일에 넣어서 제출하시는데 이 겉으로만 강철 같지, 속은 여리기 그지없고 정 많은 김통이 또 감동을 받아가지고 사진을 찍어 올리고 있다.


난 모두가 그저 적당히 남들만큼만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포인트에서 유난히 혼자 열심히인 사람들을 보면 감동을 받는다.


머리보다 가슴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멋있다.




인하우스를 포기한 건 아니다.


아, 근데 어제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와서 받았더니 ERP 관련 통역이 가능하냐는 에이전시였다.


그냥 one-off 통역인 줄 알고 적당한 말로 거절했는데 알고 보니 인하우스 통역 제의였던 것 같다..


ㅜㅜ


아, 안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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