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에 제출하기 위한 통역 확인서를 요청드렸더니 너무나 감사하게도 여러 에이전시에서 기꺼이 빠르게 회신을 주셨다. ( 물론 연락이 닿지 않는 곳도 있었다. ) 통대를 가고 나서, 그것도 내가 일 한 것 중에 절반 정도만 통역 확인서 요청을 드린 건데도 저렇게 많았다. 전부 2022년 통대에 입학하고 2학기부터 일하기 시작해서 1년 남짓 쌓은 경력이다. 경력 증명서만 잡고 보니 작은 매거진 한 권 정도 두께였다.
그리고 보면, 한 에이전시당 한 장씩 받은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한 곳에서 진행한 일을 한 장에 묶어서 주셨기 때문에. 예를 들면 한 곳에서 여러 일을 받았으면 한 장에 전부 담아서 주시는 형식이고, 프로젝트면 기간만 입력해서 받은 것이다. ex: 언제부터 언제까지 일했음.
내일이면 저 종이들은 내 손을 떠난다.
그전에 사진이라도 남기고 싶었다.
얼마 전 호주 대학원 코디네이터 교수님이 졸업생들을 모아서 취업 방법과 노하우 등을 알려주셨다.
우리가 생각지 못한 흔한 실수들로 기회를 놓치게 된다며 하나하나 짚어 주셨다. 질의응답도 해 주셨고, 내가 몰랐던 부분도 많이 알게 되었다.
과정 중에도 내가 참 좋아했던 분이다.
항상 학생에게 따뜻하셨고, 모두를 공평하게 대해주셨기 때문이다.
현재 난 쌍둥이 육아를 남편에게 전담하고 있지만, 남편도 취업을 위하여 양보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하우스 취업이 용이하지 않음을 실감하였고 다른 길로 눈을 돌리기로 결심한 상태이다.
공공기관 말고 사기업에 도전하고 싶었던 나는 사기업 취업을 포기했다. 너무 아쉽고 씁쓸해서 혼자 거리를 걷는 동안에도 눈물이 흘렀다.
어제 유퀴즈를 보니 나이 46에 소방기사에 도전해서 합격한 어머니가 출현하셨다. 나이 들면 비록 암기력은 떨어지겠지만 생각의 폭이 깊고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에 이해하는 능력으로 3개월 만에 어렵다는 그 시험을 합격할 수 있었다고 하셨다.
나도 같은 생각을 하긴 했다.
내가 통번역을 잘한다는 칭찬을 받고 특히 실무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이해력 덕분인 것 같다. 다양한 분야에 투입되어도 그 공부를 고작 2,3일간의 짧은 기간이지만 충분히 흡수해서 해당 통역을 할 때 실무자처럼 한다는 평을 받았다.
통대를 준비하는 입시 기간이 전혀 없이 신랑의 권유로 원서만 후기 대학인 서울외대에 넣은 것이 다였다. 원서 넣는 기간에 전기 대학은 이미 접수 기간이 마감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차 에세이를 매우 잘 본 것 같고, 입학 장학금을 받았다.
1학년 1학기 내내 교수님들이 칭찬을 해주셨다.
영한 번역 교수님은 중간고사가 끝나고 모두가 다 수업을 듣는 수업시간에 "김효정 씨, 자네는 이름을 바꾸지 마세요. "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기분은 좋지만, 그래도 등이 따가운 느낌이 들어서 " 저 개명할 건데요' " 라며 농담을 했다. 그러니까 교수님이 "개명? 그러면 쉬운 이름으로 개명하세요. 내가 기억하기 쉽게."라고 대답하시는 거다.
그래서 수업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중간고사를 잘 본 걸까? 이 00 교수님은 한국외대 동 대학원 석사를 마치시고 한국어, 영어, 중국어 모두 능통하시고 각 국가 역사에도 매우 조예가 깊은 분이신 한국의 고전 번역을 도맡아 하시는 분이시다.
그런 분이 내게 그것도 모든 동기 앞에서 저런 코멘트를 남겨주시니 감격했었다.
나는 한영 번역을 더 잘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좋은 평은 영한 번역을 더 높게 평가받았다. 휴학을 마치고 복학한 2학기에도 영한 번역은 A+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나티 대비 과목에서 DIstinction을 받았다. (번역 및 통역(시역, 순차, 동시 ) 전부 평가하는 과정)
통대 1학년 1학기 첫 실습통역을 나가서 에이전시와 현장 고객과 주최 측에서도 ( 저 회사 맘에 안 들면 다른 회사도 많다면서 입사 생각 없냐고 물어보심) 2번의 입사 제의를 하셨다. 그러고 돌아오자 임교수님부터 단톡으로 엄청 칭찬을 하셨고 다른 교수님도 내가 없는 자리에서 칭찬을 하셨다고 하는데 난 현장에 없어서 동기가 전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그저 나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할 뿐이었다. 쌍둥이 육아를 병행했고, 일을 했고, 통번역 전문대학원을 다녔다.
인정은 그저 열심히 한 것에 대한 보상처럼 주어졌다.
정말 열심히 했기 때문에 속상했다. 통번역 실무 경력도 통대 재학 기간에 쌓은 1년 반정도이지만 계속 일이 주어졌기에, 졸업하면 인하우스 취업이 안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 같지 않았다.
공공기관은 나이를 보지 않으니 유리하겠지만 고집스럽게 사기업 인하우스를 합격하고 싶은 것이었다.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은 어쩌면 대한민국 사회에서 나이 많은 경력단절 여성에 재 도약의 기회를 준다는 희망의 사례를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날 보고 용기를 얻어서 자신도 할 수 있다며 눈을 낮추어 돈벌이를 구하지 않고 결혼과 출산, 육아를 두려워하지 않는 한국의 여성들이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출산, 육아, 결혼이 점점 줄어드는 이유도 여성의 경력단절의 두려움 때문인데 나라에서 자녀를 낳으면 한 달 100만 원씩 준다는 정책은 소용이 없는 것 같다. 아이 키우는데 한 달에 백만 원은 우습게 들어가니까. 엄마를 위하여는 경력단절 없이 사회 복귀를 우선하는 정책이 제일 좋을 것 같다.
유리천장을 깨고 싶었다.
공부를 잘하던 책벌레가 갑자기 연예인이 되고 팀에서 솔로 제안을 받았지만 성격에 안 맞아 그만두고 학생의 신분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수능이 코앞이었다. 내가 했던 첫 실패였다.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내가 이겨내기에 많이 힘들었던 과정이었다. 실패를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고등학교 3학년 중반에 미술학원을 등록하고 그림을 배웠고 미대에 들어갔지만 재수를 하지 않고 지방 사립 대학에 들어갔고. (그 지역에서 제일 좋은 학교지만.)
그마저도 나라는 사람이 평생 살아갈 길은 아닌 것 같아 그만두었다.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아갈 자신은 없었다.
계속 방황했고 유학을 보낸 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해방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한국에선 늘 완벽해야만 인정받는 듯한 주위의 시선이 견디기 힘들었다. 인생에 고작 몇 번의 실패를 (그것도 내 선택이지만) 마치 인생의 낙오자로 낙인찍어버리는 듯한 사람들의 태도에 상처를 받았었다. 바다를 한 번 건너자 신기하게도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다. 필리핀에서의 6년. 네팔, 그리고 호주.
호주에서 돌아오자 한국이라는 곳은 어느새 나라는 사람을 타인의 시선에 가두기 시작했다. 다시 더 살을 빼야 한다, 나이가 많다. 등.
숨 막히는 외적 요소에 대한 평가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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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순간도 열심히 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