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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A play doh

나아갈 방향을 잃었을 때.

제목은 잘 생각이 안 나는데 리즈 위더스푼이 주연을 맡았던 옛날 미국 로맨스 영화에서 운동선수로 열심히 하던 그녀가 31살이 되자 코치로부터 더 이상 옛날 같은 퍼포먼스가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강제 퇴직을 종용당했다. 그녀는 겨우 31살에 평생직장을 잃은 것이다.


선수 생활이 끝난 그녀는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제 꽃 피워야 할 나이인데도 선수로서가 아닌 새로운 삶을 설계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믿어지지 않고, 말 그래도 방향을 잃어버린 그녀는 연애를 시작했다. 잘 나가는 운동선수인 애인을 두었고 청혼까지 받았지만 그녀는 뭔가 불편해 보였다. 그러다 그녀를 정말로 이해해 주는 남자가 가지고 온 선물. 아이들이 잘 가지고 노는 색깔 찰흙이다.


그 선물을 들고서 남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옛날엔 공장 검댕이를 지우던 청소 도구였던 이 물질은 원래 흰색이었는데 산업이 발달함과 동시에 더 이상 소용이 없어진 탓에 사장될 위기에 놓였었다. 이 물질을 제조하던 공장 대표의 조카가 학교에서 아이들이 이 물질을 학교 찰흙대신 잘 가지고 노는 것을 관찰하고 색깔을 다양하게 입혀서 아이들 소도구 재료로 판매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고 결과는 대성공.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인생에서 아주 작은 변화만으로도 살아갈 길을 찾아간다고.. 영어 문장이 너무 감동적이라 적어보겠다. " In life, we need only a little adjestment away from working on our lives." (넷플릭스 자막은 성공하기 위해선 아주 작은변화만 있으면 된다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 내용은 여주가 성공씩이나 바라는 건 아니니까)

여하튼, 그 순간 여자 주인공은 큰 감동을 받아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그리고 나도 이 대사 한 마디에 큰 용기를 얻었다. 아주 작은 변화만 있어도 다시 멋지게 새로운 인생을 설계할 수 있을 거라는 한 마디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듯이, 비록 지금은 막다른 길인 거 같지만 등을 돌리면 눈 앞에 새로운 길이 보일 것이라는 메시지가 마음에 들어왔다. 살면서 여자라는 이유로, 기혼 여성의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많은 편견을 견뎌내야만 했다. 사실 저 모든 조건들은 인간이면 누구나 자연스레 겪는 단지 과정일 뿐이다.


통번역 전문가라는 한 길만 두고 나이 때문에 길이 막힌 것 같은 생각에 낙담하던 태도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나이가 많다는 건 다양한 경험 덕에 보다 넓은 사고를 할 수 있고 모든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이가 많다는 건, 젊은 혈기에 꺽지 못하는 자존심을 금방 내려놓을 수 있는 너그러움도 생긴다는 말이다. 특히 아이가 있는 워킹맘들(특히 아들둘맘) 은 더욱 그런 부분에서 바다와도 같은 넓은 마음으로 포용이 가능하다. 함께 일하는 동료도 너른 마음으로이해하는 시각을 가지게 되고, 경쟁하려는 태도 대신 수용하는 태도로 협업을 할 수 있다.


나이만 보고 뽑자면 망설여져도 실무에 투입된 뒤로는 대부분의 고객이 인하우스 통역으로 입사 제의를 했던 배경은 바로 이러한 태도 덕분이라 생각한다. (재학 기간만 아니었어도) 실력도 물론 빠질 수 없겠지만. 실은 이번 3월에 연습 삼아 나간 3일 수출 상담 통역에서 한 고객이 유통을 담당하고 싶다고 찾아온 그 많던 업계 경력자들을 제치고 '너 우리 일 한번 해볼 생각 없니?' 라며 의료 기기 쪽 경력은 전무한 나에게 제의를 해 주셨다. 업계 경력이 상당한 그분들을 다 제치고 일을 맡기려 하는 유럽 대표 고객분께 나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냐고 물어보니 모든 사람을 다 유심히 살펴보았고 넌 통역하는 걸 들어보니 일을 잘 이해하는 것 같고 비즈니스 마인드가 잘 갖춰진 거 같다고 말씀하셨다.


노장이어도 호주까지 나가서 그 많은 국제 학생 중에 단 몇 명만 뽑는 자리에 선발되어 학생 대표로 연사 활동하고 적지않은 돈을 벌기도 했으며, 홈페이지에 실리고 번역 매거진에 글을 기재하고 프로젝트성 책도 2권이나 출간했다.

열심히 살아온 것이 잘못은 아니니 이제는 생각의 전환을 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하자.


어느 한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번아웃이 오지 않게 하라는 사실 정말로 불필요한 말이라고 한다. 열심히 살면 어느 순간 번아웃은 오게 되어 있다고 한다. 충전 한 번 없이 휴대폰을 무한정 사용할 수 없듯이 사람도 무한정 달릴 수 없다고 전문가는 말했고, 그러니까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번아웃 안 오게 관리하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라고도 전했다.


누군가 말했다. 직장을 구하는 것도 소개팅과 같다고. 직장에서도 나를 마음에 들어야 하겠고, 나도 회사와 동료, 그리고 직무가 마음에 들어야 한다. 몇 번의 무너짐으로 하향지원을 한 건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원하지 않는 회사와 포지션을 지원하고 거부당하면 기분이 더 좋지 않았다.


그렇게 번아웃이 왔어도 내가 막힌 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영화의 대사 한마디 덕분에 기운을 차리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계획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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