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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쌍둥이 1살 육아 중에 덜컥 붙은 통대

통대생활과 쌍둥이 육아 병행을 이렇게 했다.

저는 집에서 쌍둥이 어린 아가들을 양육하던 도중, 신랑이 육아로 핍박해지던 저에게 그러지 말고 통대 원서 접수 기간이니 시험 유형 파악 할 겸, 한번 넣어보라고 권유하여 경험 삼아 S 외대에 원서를 넣었습니다. 당시에 전기 대학은 이미 마감한 상태라 지원할 수 없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입시 경험도 없는 제가 1차 시험을 잘 보고 2차도 통과하여 입학 장학금을 받은 통대생이 된 것도 결국은 신랑이 권유한 덕분입니다. 시험 현장에 갔을 때 2차 때 200명이 시험장 대기실에 모여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1번부터 200번까지 수험표가 주어졌고 저는 80번 초반대로, (82-85 사이) 순서를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82,3번대인 저를 먼저 불렀고 1번으로 면접순서가 되었습니다. 1번으로 면접을 보니 좋은 점은, 집에 빨리 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대기실에서 기다릴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안내해 주는 학생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면접 방에는 임교수님이 앉아계셨습니다. 그렇게 제가 1번으로 2차 통역시험과 면접을 보았고 입학 장학금을 받아 시험 유형만 파악하려고 했던 것이 어쩌다 보니 입학까지 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쌍둥이 1살 아가들을 양육하는 동시에, 통대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주재원 생활을 이어가던 신랑 없이 통번역 석사 학업과 쌍둥이 육아를 동시에 진행하는 일을 간단히 볼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저도 이렇게 힘들 거라곤 생각 못했습니다.


아이 하나를 키우면 어른이 두명이면 되지만, 쌍둥이 육아는 어른이 4명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노동의 강도가 그 정도란 말입니다. 늙은 노모와 둘이서만 쌍둥이를 키우게 된 것도 만만치 않은데 통대까지 다닐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만이었습니다. 배를 갈라 출산을 한 터라 통대시절에도 수술 자국이 아물지 않았고, 부은 몸이 수술 후 3년이 지나야 가라앉더군요.

나이 들어 아이 낳지 말라고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아가들은 자꾸 놀자고 하였고 힘도 센 남아들이라 여기저기 가고 싶어 했고 움직이고 싶어 했죠.

기던 단계에서 걷기 시작하자 사방곳곳을 다 가고 싶어 했습니다. 뭐든 다 열어보고 만져보려 했고 다칠 수도 있기에 눈을 뗄 수가 없는 시점이었습니다.

의자나 소파에서 떨어질 수 있고, 날카로운 물체를 만지다 다치거나 서랍을 다 열고 난장판을 만들곤 했습니다. 자꾸 부엌에 들어가려 한 것이 제일 큰 일이었죠.

부엌에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때가 부모와 눈 맞추며 가장 많은 소통을 해야 하는 시점이기도 해서 너무 미안해졌습니다. 눈을 맞추면서 물어보고 아기가 옹알이로 반응하면서 소통을 해야 하는 겁니다. 이 과정을 거쳐야 언어를 배우고 사람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에 turn-taking 과정을 쉬지 않고 해야만 했습니다.

아이가 두 명이면 그 과정은 더 복잡해졌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제일 그립기는 합니다.

때때로 아니 수시로 아기일 때의 사진과 영상을 돌려보곤 합니다. 너무 사랑스러웠는데 몸이 일단 힘드니까 부모도 그 순간을 완전히 만끽할 수가 없어 안타깝습니다.


당시엔 엄마이기 전의 모습을 애도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는 순간이기도 합니다.여자로서 나라는 사람에만 집중했던 모든 관심이 타인에게 옮겨가는 경험을 통해 진정한 엄마로서의 모성애를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의 사진으로 가득하던 앨범은 어느새 아가들로 가득 찼습니다. SNS 계정에도 아가들로 가득 차 버렸죠.

아가들 틱톡 계정은 한 때 구독자가 900명에 도달하기도 했습니다. 유학 다녀오고 돌보지 않게 된 그 계정이 지금도 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전의 친구들은 만날 수도 없게 되었고, 저의 인간관계는 없어지고 새로운 바운더리가 생기고 있었습니다.

인간으로서 그동안 형성했던 모든 관계, 사회영역, 관심사, 취미, 자주 가던 곳 모든 것이 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주 가던 곳은 키즈카페로 바뀌었고 아가들이 노는 동안 지켜보면서 사진과 영상을 찍는 것이 유일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지금 뿐이라는 생각으로 계속 열심히 아가들을 데리고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도록 움직였습니다. 제 몸은 지쳐 쓰러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가 되었습니다.


신랑이 가끔,

너는 에너지가 방전되기 직전까지 전력을 다해 달리는 타입이라고 말했습니다. 갑자기 에너지가 다 떨어지고 나면 감당하기 어려우니 서서히 힘을 줄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지금 멈추면 안 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렇게 아가들의 1살, 그러니까 출산 후 3년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을 보내는 동시에 통대 생활을 잘 해내야 했습니다.


출산을 한 지 2년 째였어도 회복은 매우 더뎠고, 몸은 퉁퉁 부어있었고, 몸은 망가져서 근육은 다 굳고 눈도 더 안 보이고, 흐리고 난시는 심해졌으며 손가락 마디까지 부어서 펜은 잡히지도 않고 무엇보다 머리가 멍.. 했습니다. 뭔가 뇌 속에 솜 같은 걸로 꽉 채운 것처럼 뇌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평소에 저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근육이란 근육은 전부 이완된 상태였는데 그 잘난 목 성대 근육마저 맛이 갔죠. 목소리가 풀렸고, 혀도 근육이라 발음이 한국말, 영어 뭐든 잘 안되더군요.

학교에서 교수님 앞에서 펑펑 울던 기억이 나네요.


힘든 것은 젊은 동기들은 이런 걱정을 할 일이 없었고 그들과 함께 실력으로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원래 난 이렇지 않아, 난 더 잘하는 사람이야.'라고 마음속에서 계속 반복했습니다.


하루에 스터디를 3개씩 무작정 잡고 그냥 열심히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스터디는 2시간이 기본이지만, 스터디 자료를 만들어야 하는데, 스터디 자료를 직접 다 공들여서 만들었던 것이 결국 저를 발전시켰던 듯합니다. 혼자 스터디 자료를 만든다고 2-3일씩 노력했습니다.

영상이건 스크립트, 뭐든 찾아 한영으로 영한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인공지능도 발달하지 않던 때라 검색까지 직접 다 해가며 번역을 공들여 총 4개씩 스터디 자료를 만들었는데 동기들 중, 스터디 자료에 뭐 하러 며칠씩 공을 들이냐고 말하던 친구도 있었지만, 전 계속했습니다.


이것도 공부고,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죠.

암기 시험을 엄청 봤는데 저에겐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그 뇌로는 암기도 안되지만 암기에 성공했어도 아무것도 머리에 장기간 남지 않았으니까요.


그냥 주어진 상황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그저 번역 많이 하고, 스터디 자료도 번역하고, 번역 과제도 열심히 하고 잘 안 움직이는 혀근육과 성대 근육을 많이 움직여 주는 일이었습니다.


펜을 억지로라도 잡고 글을 계속 썼죠.

통역을 하려면 노트 테이킹을 잘해야 하니까요.

사실 그땐 펜이 잘 안 잡히고 자꾸 손가락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럴 때면 제 가슴도 철렁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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