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0. 인생의 실패가 주는 낙인

학벌주의가 불합리한 이유

원래부터 공부를 잘하던 책벌레가 갑자기 연예인이 되고 팀활동에 이어 회사로부터 솔로 제안을 받았지만 성격에 안 맞아 그만두고 학생의 신분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수능이 코앞이었습니다. 내가 했던 첫 실패였습니다.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내가 이겨내기에 많이 힘들었던 과정이었습니다. 실패를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고등학교 3학년 중반에 미술학원을 등록하고 그림을 배웠고 미대에 들어갔지만 재수를 하지 않고 지방 사립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 지역에서 제일 좋은 학교지만.)


그마저도 나라는 사람이 평생 살아갈 길은 아닌 것 같아 그만두었습니다.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아갈 자신은 없었습니다.


계속 방황했고 유학을 보낸 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해방감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선 늘 완벽해야만 인정받는 듯한 주위의 시선이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인생에 고작 몇 번의 실패를 (그것도 내 선택이지만) 마치 인생의 낙오자로 낙인찍어버리는 듯한 사람들의 태도에 상처를 받았었습니다. 바다를 한 번 건너자 신기하게도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습니다.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필리핀에서의 6년. 네팔, 그리고 호주.


호주에서 돌아오자 한국이라는 곳은 어느새 나라는 사람을 타인의 시선에 가두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더 살을 빼야 한다, 나이가 많다. 등.


숨 막히는 외적 요소에 대한 평가가 쏟아졌습니다.


--------------------------------------------------------------------------------

한 순간도 열심히 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20대.

대학 학벌을 물어보고 나에게 얻을 정보는 다 얻었다는 듯이 더이상의 질문이 없는 사회였습니다.

대학 이름으로 나라는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규정해 버린 것입니다. 그들의 부정적인 시선은 마치 내가 그간의 삶을 열심히 살지 않았다는 데에 대한 반응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난 한번도 열심히 살지 않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5살에 혼자 한글을 떼고 책을 읽기시작한 뒤로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활자중독이 있었고 초등학교 중학교 내내 우등생, 베이비붐에 14반 50명 학급에서도 대표 상이란 상은 내가 다 받았습니다. 우연히 졸업앨범 보고 연락도 오고, 교문에서 기다리던 캐스팅담당자들의 명함 돌리기, 주변 추천으로 오디션도 보아 얼떨결에 가수가 되기는 했지만 실은 계약을 하고부터는 더 열심히 살아야 했습니다. 회사에서는 투자한 만큼 뽑아내야 했습니다. 계약으로 묶인 몸이라 내 의지는 없었고, 하루에 3시간밖에 못 자면서 춤연습을 했고 (연습기간이 전무하므로) 노래연습과 앨범 녹음, 방송, 촬영, 그리고 행사를 다녔고 학교에도 매일 등교하라는 엄명에 오전수업은 꼭 들었습니다. 팀의 언니오빠들은 학교를 갈 필요가 없었지만 유일하게 저만 학교를 계속 다녀야 했습니다.


학구열 높은 고등학교라서 그런가 반드시 출석은 하라고 했습니다. 잠도 못 자고 새벽 3시까지 춤연습을 하고 숙소에 돌아와 3시간 자고 등교를 하는데 수업 내용이 들어올 리 없습니다. 활동 기간 내내 그런 생활을 매일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내 삶은 그 뒤로도 10년 가까이 하루에 3시간씩 밖에 잠을 못 자는 병을 갖게 했을 정도였습니다. 계속 무언가를 해야만 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을 앞두고 그 길을 그만하겠다고 결정했을 때 그 감정은 사실 단순히 시간이 해결해 줄 만한 성격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이 힘들었고, 아팠고, 상처가 깊었습니다.


공황장애가 왔고, 대인기피가 왔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당시 처한 상황에 대하여 그저 화려한 생활하고 혼자 학교도 오래 안 다니고 야자도 안 하니 좋겠다 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는 실패했다고 손가락질. 당시 학교축제때 팀이 와서 공연도 했고 SBS 방송 촬영도 학생들 몇 명을 더 뽑아서 했기에 얼굴은 이미 팔릴 데로 팔려있었습니다. 지나가면 알아보고 수군거리기 일쑤였습니다.


마치 인생의 첫 단추가 제일 중요하고,

그 단추를 잘 못 끼우고 나면 나중에 얼마나 열심히 단추를 마저 채우건 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듯 비웃는 시선들.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형벌과도 같이, 유예기간도, 갱생의 기회도 없이, 말소기간도 정해지지 않은 채 주홍글씨처럼 평생 실패자의 낙인을 가지고 살아야 하다니.



만약 좋은 대학을 입학했다는 사실이 개인의 성실도를 증명하는 증표라면 나만큼 열심히 살았던 사람도 없는데.


그렇게 가수 생활을 그만두고 미술학원에 다녔고 미술입시는 동양화라 또 서서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려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모든 것이 도대체 내가 뭘 위해 이렇게 열심히만 해야 하는가?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렇게 유학을 떠났고, 언어에 대한 특출한 실력이 있었던 탓도 있지만, 20살 때 단 기간만에 영어를 아주 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도 계속해서 원어민들에겐 영어를 굉장히 잘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지만, 한국에 돌아오자, 한국사람들은 출신 대학이 필리핀이니, 뭐 그런 말들을 하면서 실력을 알기도 전에 일단은 무시를 했습니다.


사실 전 유학 가서도 영어도 정말 열심히 했고 대학에서 1등을 도맡아 했습니다. 89/100 평점. 현지 학생이 한 수업당 60-70명이어도 늘 제가 일등이었습니다.


필리핀 유학은 나에겐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만 당시 친하게 지내던 한국 지인 언니가 ' 한국에 돌아가면 인정은 못 받을 거다.'라는 말이 난 그저 언니 한 사람의 의견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정말로 좀 그런 쪽으로는 개인의 신념 같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열심히만 하면 다 인정해 줄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지겹게도 이 한 줄의 이력은 꼬리처럼 달라붙어 나라는 사람의 실력을 매우 과소평가했습니다.


당연히 원어민강사들은 전혀 그런 내색도 없었고, 오히려 내 실력을 매우 좋게 평가를 해주었습니다. 국내 유명 어학원들에서도 원어민 강사들, 원어민 총괄 등 다들 내 영어실력에 어떤 문제도 보이지 않는다는 평을 주었지만 함께 이어폰으로 듣던 한국인 강사는 자기가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다며 ( 무슨 말도 안 되는) 그저 콧방귀도 뀌듯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역시 통대에서도 같은 일은 벌어졌던 것 같습니다.

유학을 나온 친구들이 태반이었고 대부분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나이도 많은 애엄마, 필리핀 유학. 취미생활 하러 나온 사람 취급을 했습니다. 그냥 대놓고 무시했던 것 같습니다. 남편도 없이 쌍둥이 1세 육아를 병행하면서 취미생활을 하러 전문대학원에 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밤에 잠도 못 자고 수술 자국이나 후유증도 아물지 않은 부은 몸으로.

그러거나 말거나 그저 실력으로 증명하겠다는 고집과 뚝심으로 열심히 했기에 그들의 바람과는 다른 결과가 펼쳐진 것입니다.


물론 인하우스 이력서에 정해진 빈칸을 채우는 과정엔 내 인생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지나치게 열심히 살았지만 인정은 못 받는 현실이 좀 한탄스러웠는데 유퀴즈에서 50세가 넘으신 분이

나이가 많은 것은 장점이 많다고 말씀해 주실 때 뭔가 내가 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신 것 같아 막힌 한편이 뚫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사람은 겨우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고 그 사회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내 몫을 해야겠다는 청사진이 그려지며,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하지만

이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keyword
월, 수, 금 연재
이전 19화19. 인공지능이 번역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