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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황 Mar 20. 2017

도쿄 기담집.

난 그날 이후로 운명을 믿게 되었다.

나 김중황은 이 글의 주인공이자 필자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시작할 이야기는 내가 직접 보고 겪은 이야기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고  내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려고 한다.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기묘한 일들이고 그만큼 내 인생에 적잖은 변화를 몰고 온 이야기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이야기가 재미없다면 가던 길을 마저 가도 된다. 이야기가 길고, 생각 그 이상으로 기괴하기 때문에.


꽤 오래전부터 여행을 준비할 때 책 한 권을 챙겨가는 버릇이 있다. 그리 까다롭지 않은 사람인지라 많이 따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꼭 내세우는 조건은 두 가지다. 읽기 난해하지 않은 책일 것. 작고 가벼운 사이즈일 것.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쿄 기담집' 은 그 범주에 딱 맞는 단편 소설집이었다. 일반 책의 절반 남짓한 크기의 사이즈에 읽기 편한 단편들 모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도서관에 있던 책 중 남들이 대출해가지 않고 남은 유일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었다.


여행 첫날부터 책을 읽어야지. 하고 벼르고 있었지만 바쁜 일정 탓에 책을 처음으로 꺼낸 날은 일정의 마지막 날 밤이었다. 난 얇은 책이니 오늘 내로 완독 한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오는 누군가의 죽음. 자살. 배경은 도쿄 시나가와였다. 무언가 찜찜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텔 방의 커튼을 걷었다.


밤 열 두시가 넘었는데도 잠들지 않는 JR 시나가와 역의 밝은 불빛이 바로 앞에 보였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머리가 아득하고 아찔했다. 운명의 장난 같았다. 도쿄 23개 구 중 하필이면 책의 배경인 시나가와라니. 하지만 생각해보면 흥이 났다. 요즘은 책 속 배경을 따라가는 여행이 인기라는데 운이 좋았는지  바로 그 곳에 있지 않는가.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실 우연의 신께 감사드리고는 난 책을 더 읽어내려갔다.


자살자의 검시를 마친 검시관이 사인을 말하는 부분에서는 밖에서 엠뷸런스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모기 소리처럼 멀리서 들리던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제 소리는 크고 일정하게 들렸다. 쭉. 무슨 일이 있나 싶어 호텔 밖에 나가 구경꾼에게 물어보니 근처에서 누군가 자살 시도를 해 누군가가 병원에 실려갔다고 했다. 아까 구급대원이랑 이야기를 해봤는데 생사는 불분명하다고 그 옆에 있는 일행이 누군가 말했다. "참, 안타까운 일이야" 술에 취해 입술이 꼬인 누군가 말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자살자 찾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난 지금 자살자가 나오는 책을 읽고 있었다.  도쿄 시나가와에서. 바로 그 점이 날 무서움에 빠트렸다. 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 그리고 밤거리 아무 데나, 가능하면 근방에서 가장 밝고 사람이 많아 보이는 라멘 집에 들어가 아무 메뉴와 생맥주를 시키곤 벌컥벌컥 마셨다. 시끌벅적한 라멘 집 안의 분위기를 내 응원군 삼아 정신을 가다듬고 (누가 이런 곳에서 공포를 느끼겠는가?) 많고 많은 책 중 내가 이걸 골랐을 확룰과 도쿄의 스무 개가 넘는 구 중 누군가 삶을 포기할 때 내가 책의 그 부분을 읽고 있을 확률을 곱했다. 대체 내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던 걸까.


적어도 내겐 굉장히 으스스하면서도 운명이라는 것이 정말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경험이었는데, 내 주위에 있는 대개의 사람들에겐 재미없는 이야기였나 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일단 고개를 몇 번 끄덕인 후 "아, 그거 참 신기한 일이네요." 같은 형식적 멘트로 답을 했다. 그리고 바로 평범하고 익숙한 이야기로 주제를 금방 돌리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레 이런 것들에 대해선 말을 아끼게 되었다.


그런데 K는 달랐다. 사실 그 애 덕분에 글을 쓰게 된 것인데, 잠깐 K를 소개해야겠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K는 누구 소개로 처음 만난 친구다. 친해진 후 얼마 안 되어 불쑥 전화를 해 애인과의 술자리에 몇 번 날 불러 내어 둘이 친하게 지냈으면 한다고 등을 툭툭 두드리던 K 그 자체도 매력이 넘치는 아이였지만, (그동안 어두운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아직 여느 친구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K를 바라봤던 내게 그녀가 특별하게 기억된 것은 얼마 뒤였다.


내가 알던 인간관계에서는 보통 교제하는 애인과 헤어지면 그 애인과 안면이 있던 (정확히는 자신 때문에 인연이 된) 자신의 친구들까지 함께 정리하려고 하기 마련인데 녀석은 좀 특이했다. K는 그 애랑 헤어졌다고 통보를 한 후 얼마 뒤 날 불쑥 불러내어 이별 때문에 그 애인과 쌓은 인연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응? 뭐, 그 친구 소식이라도 전해 달라는 거야? 걔 실연의 아픔 커 보이던데."


"아니, 너나 그 애나 이런저런 장점들이 많잖아. 나 때문에 인연이 망가지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어. 서로 좋은 사이로 지내다 어려울 때 서로 도움이 되면 얼마나 좋냐. 그러니까 친하게 지내"


뭘 그런 것을 묻느냐는 표정으로 심플하게 답한 멋진 그녀의 인생철학에 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녀의 말이 무색하게 난 K의 전 애인과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그 어느 곳에는 내가 K에게 가진 특별한 호감이 새로 자리하고 있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K는 생각해 보니 자신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사역 쪽에서 작은 치과를 운영하는 K의 아버지는 사람을 참 좋아했다. 모두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던 그는 특유의 유쾌한 입담으로 환자들을 모았다. 자신의 병원을 개업할 당시 많은 환자들이 같이 옮겼다고 하니 꽤 능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밖에 이런저런 취미도 참 많은, 참 다재다능한 분이었다. 신사역은 땅값 비싼 동네였지만 입소문을 타고 꽤 높은 소득을 올렸다. 능력 좋은 그의 유일한 단점은 바로 쉽게 친해진 만큼 사람을 쉽게 믿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병원을 자주 찾던 사업가 J에게 큰돈을 빌려준 것은 그가 한 실수 중 평생의 오점이 되었다.


J는 그와 비슷한 사람이었다. 사업을 하는 사람답게 뛰어난 언변, 그리고 약싹 빠른 머리도 겸비한. 몇 년 전부터 그의 병원을 자주 찾던 J는 곧 K의 아버지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주말이면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 골프를 같이 치러 가고, 낚시도 같이 하러 다녔다. 사람을 좋아했고 따르는 사람도 많았지만 정작 속을 나눌 깊은 친구가 없었던 K의 아버지는 곧 J에게 많은 것들을 털어놓았다.


그런 위치였던 J가 운영하는 사업에 큰 돈을 투자 명목으로 빌려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칭 성공한 사업가에다가, 매번 혼자 했던 취미를 같이 나눌 뿐만 아니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절친한 친구에게 무엇을 못 해주겠는가? 부인과 K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은퇴 후 쓰기 위해 모아 놓은 목돈을 턱 내어줬다. 살면서 수많은 의심을 해본 그였지만 그때만큼은 전혀 의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J가 그 돈을 들고 잠적해 버린 것이다.


현실을 부정한 체로 사정이 있겠지, 하고 기다려 보자는 K의 아버지를 뒤로 하고 총대를 맨 것은 바로 어머니였다. 그동안 그의 태평한 소리에 진절머리를 냈던 자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녀는 비장했다. J를 경찰에 사기죄로 고소했고 적금을  심부름 센터를 직접 가 그의 행적을 직접 찾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비웃듯 J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행적을 찾기 위해 만난 J의 가족들도 많이 당황하고 있었고 그들만큼이나 J의 행방을 찾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들에게 뭐라 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K에게 무슨 일이라도 터진 것이 아닌가 걱정이 태산이었는걸. (그가 사업 자금을 포함한 도피 자금 대부분을 바람을 포함한 유흥에 탕진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의 일이다.)


이는 단지 돈만이 아닌 큰 상실이었다. 단순히 한 환자가 아닌, 큰 금액의 손실이 아닌 남은 인생을 함께할 친구라고 생각했으니 더더욱. 불행은 연이어 이어졌다. 사건 이후로 K의 아버지는 자주 술을 마셨다.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마셨던 그의 음주는 곧 시름을 잊기 위한 폭음으로 바뀌었다. 그의 사람 좋던 웃음은 점점 없어졌고 진료 때에도 알코올 냄새가 났다. 술 취한 의사의 진료를 받고 싶어하는 환자는 없다. 그런 의사가 하는 수술은? 말이 필요 없지. 대체 진료를 어떻게 보는 거냐는 환자들의 항의가 들어왔다. 수년째 쭉 오던 단골들을 제외한 환자들의 수도 점점 줄었다. 부인과의 사이도 좋지 못했다. 사소한 일로도 자주 부딪혔고 그때마다 이혼 이야기가 나왔다. 불운은 계속 찾아왔다. K의 아버지께서 술을 마시고 가다 오토바이에 치어 부상을 다행히 서행하던 오토바이와 부딪힌 것이다. 다행히 낮은 속도에서 일어난 사고라 전치 2주의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구성원들의 시름을 더욱 깊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어느 날 새벽 전화벨이 울렸다. J 가족의 부탁을 받고 전화한 경찰 교통조사계 소속 조사관이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하나씩이었다.


J를 찾았다. 시체로.


잠적한 J를 찾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시체로 변한 J를 찾는 일은 쉬웠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는 K의 아버지가 오토바이와 부딪혔던 그 교차로에서 마지막 숨을 토하고 마흔 중반의 생을 마감했다. 사실 마지막 숨도 못 토했을 수도 있다. 즉사였으니 말이다. 얼굴이 뭉개진 그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지갑 한쪽에 있던 주민등록증 덕분이었다. 경찰이 J와 트럭의 충돌 지점에 흰 선을 긋고 J의 시체가 놓여 있었던 지점에도 마찬가지 표시를 했다. K의 아버지가 쓰러졌던 자리에 그은 선과 불과 1 미터 남짓한 거리였다. 이제는 흐릿해진 흰 선 옆에 그려진 선명한 흰 선, 그리고 약간의 빨간 핏자국. 비 오는 날 새벽 목격한 그 모습은 음산함을 넘어서 괴기스러웠다.


급사한 망자인 J에겐 유언장은 없었다. 대신 남은 자에게 주는 선물이 있었다. 수억 원 상당의 사망 보험금. 수년 동안 착실히 납부한 그의 사인은 자살이 아닌 교통사고였기 때문에 그 액수는 조금의 차감 없이 유가족들에게 전달되었고 상복을 입은 유가족들은 J가 빌린 정확한 액수를 K의 아버지에게 한 번에 갚았다. 늦어서 미안합니다.라는 짧은 말 한마디와 함께.


K가 마지막 술병에 있던 술을 모두 빈 잔에 부었다. 그리고 잔을 들고 술 한 모금을 더 넘겼다. 먼저 도착해 꽤 오래 나를 기다리고 있던 K 옆에 있던 빈 병들이 생각 그녀의 옆에 아직 남은 술들을 내 쪽으로 가져다 놓았다. K는 내 행동을 보면 표정을 잠깐 찌푸리더니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그녀는 내게 아직 말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자신을 포함해 몇 명만 알고 있는 이상한 이야기라고 했다.


"넌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겐 J의 죽음은 잘 된 일이야. 이혼 이야기를 밥 먹듯이 꺼내던 가족이 다시 뭉칠 수 있고, 병원이 재기할 발판을 만들었으니. 물론 그 유가족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말이야. 그래서 신경 안 쓰려고 했었어. 그런데..."


K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의 입술은 말하면 안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창백했고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영상 기록을 보던 형사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 무언가에게 J는 쫓기고 있었던 것 같다고.  이런저런 추측을 해봤지만 우리를 빼면 원한 관계도 없었던 사람이었어. 근처에 있던 모든 CCTV에 흔적은 없었지. 심지어 그를 친 트럭의 블랙박스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어.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J는 죽기 몇 시간 전부터 누가 쫒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방을 둘러보며 공포에 질려 있었대. 술도 안 마신 사람이 왜 그 새벽에 차도로 뛰어들었을까. 꼭 무언가를 피해 도망치다 차에 치인 것처럼. 누굴까? 그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그 '무엇' 은?"


"그냥 불안함 아니었을까? 친한 친구라고 여긴 사람을 배신했으니 그 사람도 크게 불안해했을 거야. 힘든 도피 생활도 그렇고."


"다들 그렇게 말해. 너 말마따나 도피 중 생긴 우울증이라던가... 근데 난 그게 아닌 것 같아. 뭐가 더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글쎄... 일단은 너에겐 잘 된 일이니까 그 문제는 잊어버려도 되지 않을까?"


K는 일단 마음을 추스르고 난 후 그 궁금증을 혼자서라도 꼭 해결하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대체 누가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던 J를 겁나게 한 걸까. K의 표정에서는 궁금함을 넘어서 사뭇 비장함까지 보였다. 그 날 이후로 K에게서 오는 연락은 뚝 끊겼다. 연락을 먼저 할 이유도 없었고, 마찬가지로 K가 내게 먼저 연락할 이유도 없었다.


이 날 이후로 가끔 생각한다. 운명이 정말 존재한다면 어떨까. 내가 도쿄에서 책을 읽었던 그 순간 문학의 신이 내게 미소를 지으며 네가 읽은 대로 모든 것들이 이뤄지리라고 약속했다면? 마찬가지로 K의 가족이 불행을 토해내던 그 순간 공정함의 신이 미소를 지으며 네가 당한 대로 갚아준다는 약속을 했다면? 무서운 일이다.


그때마다 난 빈다. 어딘가에서 자상하시게도, 마치 기막힌 우연인 척하며 그 어딘가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얄궂은 신들이 제발 사라져 주기를, 적어도 내 주위에서는 멀어지시기를. 난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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