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꽃시장 이야기
에너지가 넘치는 우리 집 아이는 유치원이 끝나고 바로 집에 들어오는 법이 없습니다. 한 시간 정도는 집 앞 공원이나 놀이터에 가서 동네 친구들이랑 실컷 뛰어논 다음에야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요. 저렇게 유치원에서 하루 종일 놀고도, 또 놀고 싶나 싶을 때도 있어요. 시카고는 거의 일 년 중 절반이 겨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요즘 같은 여름은 아이가 뛰어놀기 너무 좋은 시기이죠. 하지만 6월까지는 날씨가 오락가락해서 바람이 많이 불고 비가 오거나 하늘이 우중충한 경우가 많아요. 그런 날은 어쩔 수 없이 그냥 집에 가야 되지요. 그러면 영락없이 몸을 베베 꼬면서 저녁 먹고 잠잘 때까지 TV를 보거나 아니면 “엄마 나 너무 심심해. 나 뭐해?”를 외쳐대서 절 곤혹스럽게 합니다.
어제가 바로 그런 날이었어요. 학교가 끝나고 놀이터에 가려는데 빗방울이 한 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죠. 공원에서 놀던 아이들은 서둘러 집으로 갔고 저희도 집으로 들어왔죠. 아니나 다를까 심심하다고 외쳐대는 이 아이를 데리고 뭐할까 고민을 하다가 화분을 하나 사러 가기로 했어요. 집에서 키우던 난 화분이 시들어서 마침 새로운 화분이 필요했거든요.
예전에 한국에 살 때는 주말이면 집에서 가까운 양재 꽃 도매 시장을 종종 구경 갔어요. 식물원 같기도 하고 그곳에 가면 피톤치드 향이 가득한 게 정말 좋았거든요. 찾아보니 시카고에는 사실 그런 꽃, 나무 도매 시장은 없더라고요. 들리는 소문으로는 화훼 자격증이 있는 사업자만 들어갈 수 있는 꽃시장이 있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그곳이 어딨는지는 못 찾겠더라고요. 있다고 해도 제가 꽃집을 하는 건 아니니 괜히 들어가 봤자 배만 아프겠죠. 그래서 결국 아이와 제가 구경을 간 곳은 집과 관련된 온갖 잡동사니를 다 파는 홈디포. 초여름이 되면 이 곳 앞마당에는 다양한 꽃, 나무들을 전시해놓고 팔고 있습니다.
미국은 워낙 마당이 있는 집이 많고 또 인건비가 비싸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을 고용하는 대신 직접 화단을 관리하는 편이에요. 또 재밌는 건 잘 사는 집이건 못 사는 집이건 관리를 안 하는 집은 또 없는 것 같아요. 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형편에 따라 마당을 가꾸지요. 그래서 이 곳에 가면 전문가들이 쓰는 수준의 다양한 화훼 도구들을 다 만나볼 수 있어요. 섹션별로 구분이 되어서 야채, 과일이 나는 화분, 꽃을 볼 수 있는 화분, 해가 많이 필요한 화분, 선인장, 허브 등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꽃이 있죠.
꽃을 워낙 좋아하는 아이는 신이 나서 넓은 꽃 선반들 사이를 다니면서 꽃구경을 했어요. 화분마다 앞에 사진이 있어서 다 자라면 어떤 열매, 꽃이 열리는지 알 수 있었죠. 요즘 아이가 읽는 책에 이런 식물에 관련된 것들이 있는데 책에서 보던 걸 이렇게 직접 향도 맡고 만져보면서 식물이 자라나는 걸 배울 수 있으니 정말 잘 왔다 싶었죠.
제가 난꽃 화분을 하나 골라서 계산하고 나가려는데 아이가 “나도 화분을 사서 물도 주고 키워주고 싶은데 하나 사면 안 될까?”라고 했어요. 그래, 뭐 강아지 키우자고 하는 것도 아닌데 한 번 해봐도 좋겠다 싶어서 그럼 가장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라고 했지요. 속으론 너무 촌스러운 색깔이나 벌레 생기는 화분 고르면 어쩌나 싶었어요. 혼자 심각하게 이것저것 심사숙고하면서 화분을 고르는 아이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났지요. 그런데 아이가 정작 골라온 화분은 꽃은 하나도 없고 풀만 무성한 작은 화분. 너무 재미없을 것 같아서 꽃이 한두 개 정도 핀 다른 화분을 사는 게 어떻겠냐고 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자기는 이 화분이 마음에 든다면서 혼자 계산대로 들고 갔어요.
‘도대체 이 풀만 가득한 못생긴 화분을 왜 돈 주고 사야 되지?’ 싶었지만, 아이 스스로 고르고 결정한 것을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니겠다 싶어서 아이가 고른 작은 화분 하나를 봉투에 담아 집으로 왔어요. 집에 와서는 원래 가지고 있던 연보라색 화분에 혼자서 식물을 옮겨 담고 컵에 물을 담아 '밥 먹어라'하면서 물을 주더라고요. 이때만 해도 저흰 이 화분의 정체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죠.
다음 날 아침, 학교 갈 준비를 마친 아이는 그제야 어제 산 화분이 생각이 났는지 화분에 물을 주러 가는데, 놀랍게도 하룻 밤새 보라색 꽃이 피어나 있었어요. 어제는 몰랐는데 만져보니 너무 좋은 향기도 났지요. 찾아보니 아이가 고른 건 프렌치 라벤더. 어제 아이의 고집대로 이 화분을 고른 게 너무 다행이다 싶었지요. 이미 다 꽃이나 열매를 맺은 화분을 골랐다면 이렇게 자기 손으로 식물을 키워가는 기쁨을 느끼지 못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