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해럴드 워싱턴 퍼블릭 라이브러리
남편이 일을 시작한 이후로 아이와 단둘이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시카고 요즘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아직 두 번 낮잠을 자야 되는 아이를 데리고 나가기는 힘이 들기 때문이죠. 특히 요즘에는 아이가 유모차에서 자꾸 내리려고 해서 두 배로 더 힘이 듭니다. 뛰어다니는 아이도 잡아야 되고, 바람이 휙휙 날아가는 유모차도 잡아야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요즘엔 불량 엄마처럼 TV 디즈니 채널을 보여주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습니다.
며칠 연속으로 그런 생활을 하다가, '아,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책도 읽어주고, 그림도 그려주고, 비누 풀어 목욕 놀이도 시켜보았지만, 모두 잠시 뿐, 그 나머지 시간에는 계속 TV를 찾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어제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일단 가볼 때까지 가보자 해서 새로 레노베이션한 시카고 시내에 있는 해럴드 워싱턴 공립 도서관(Harrald Washington Public Library)을 구경 가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유모차 타고 쭉 가면 저희 집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곳인데, 아이가 중간에 계속 내려서 이것저것 구경하기 때문에 전 1시간 넘게 걸렸습니다. 가는 동안 이미 지쳐서 집에 돌아갈 생각에 눈 앞이 깜깜할 지경이었지요.
어린이 도서관은 2층에 새롭게 문을 열었습니다. 저희가 간 시간은 5시 정도였는데 도서관은 저녁 9시까지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대부분의 박물관, 미술관들은 5시면 모두 문을 닫기 때문에 저녁을 먹고 나면 갈 곳이 없는데, 여기는 늦게까지 한다는 점이 참 좋았습니다.
아이는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꺄악, 꺄악' 소리를 내면서 마치 디즈니월드에 온 것처럼 좋아 날뛰었습니다. 이곳저곳에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색종이며, 장난감들이 가득가득 있었고, 또 새로 개장을 해서 그런지 알록달록 장식을 해놓아서 아이는 더욱 신이 났습니다. 특히 여름 방학을 맞아서 이 곳에서는 'Super Hero'를 찾는 홍보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었는데, 1. 도서관에서 500분 이상 책을 읽고(Read), 2. 글짓기나 그림을 그리는 창작 활동을 하고(Create), 3. 미술관이나 과학박물관에서 무료로 진행하는 체험 클래스(Discover)를 들어서 이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하면 책 선물을 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0살부터 13살까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지요. 도서관 입구에선 한 아이가 이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등록을 도와주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에 의해 운영되는 아이들을 위한 도서관 행사였지요.
어린이 도서관은 갓난아이부터 중고등 학생까지 모두 편안하게 이용할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여러 나이 때의 자녀를 가진 부모도 이 곳에 아이들을 풀어놓고 각자 원하는 곳에서 책을 보고, 놀 수 있게 만들어 놓았지요. 나이 때 별로 볼 수 있는 책을 섹션별로 만들어놓아서 책장도, 의자도, 안전시설도 다 그 나이에 알맞게 구성해놓았습니다. 또 이것저것 휘두르기를 좋아하는 꼬마 아이들의 특성을 고려해서 아예 시장바구니를 갖다 놓고 원하는 책들을 담을 수 있도록 해놓았죠. 아이는 책 쇼핑을 하듯이 이것저것 책들을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말이 도서관이지 이 곳은 책만 있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STEAM (STEM + ART)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만들기 시설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자동차도 만들 수 있고, 가면도 만들 수 있고, 생일 카드도 만들 수 있도록 도서관 구석구석에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준비물들이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책을 보다가 지루해지면 와서 가위질도 하고, 풀칠도 하고 혼자서도 심심하지 않게 노는 법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재료들을 많이 쓴다고 제지하는 선생님도 없었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가르쳐주는 어른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제각기 원하는 것을 한참 동안 집중을 해서 원하는 작품이 나오면 의자에서 내려왔습니다.
또 이 도서관에서 참 좋았던 것은 하루에 두세 번 아이들을 위한 무료 클래스가 열린다는 점입니다. 저희가 어제 간 시간에는 우연히 놀이 수업이 진행이 되고 있었는데 45분 정도 선생님과 춤추고 노래하고, 책도 읽고, 그림 작품 만들기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전 등록도 필요 없고, 누구나 들어오고 싶은 사람들은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또 장애가 있는 아이들도 문제없이 들을 수 있는 반이 따로 운영되어 차별 없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 문화권의 아이들이 한 공간에 모이는 것도 좋았습니다. 보통 동네 문화 센터를 가거나, 데이케어를 가면 특정 문화권의 아이들이 모이기 마련인데, 이 곳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좀 더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아이들이 그림을 그릴 때 문화권에 따른 부모들의 간섭 정도, 아이들이 울 때의 반응, 칭찬해주는 방법 등은 다 제각각이었는데 그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충분히 재미있었지요.
이 곳에서는 일주일에 한두 번 인형 극장인 퍼펫쇼(Puppet Show)를 합니다. 세서미 스트리트 같은 거죠. 저희가 간 날은 쇼가 없는 날이라 아쉽게도 볼 수 없었지만, 아이들은 누구나 이 곳에 있는 인형을 가지고 자신만의 공연을 만들 수 있습니다. 아직 말을 제대로 못 하는 우리 아이도 저에게 앞에 앉아 있으라고 자리를 정해주고는 무대 뒤로 들어가 열심히 인형극을 보여주었습니다. 주인공은 10명도 넘고, 대사는 대부분 '짠! 짠!'이었지만요.
잠깐 책만 빌리려고 들어갔던 도서관에서 한참 놀다 시간을 보니 거의 8시가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창 밖을 보니 어둑어둑 해지고 있었지요. 도서관이 이렇게 재밌을 수도 있는 곳이구나, 느꼈습니다. 아이뿐만 아니라 저도 말이지요. 돌아오는 길에 이 좋은 시설을 혼자만 알기 아쉬워 아직 안 와봤을 한 동네 가족들에게도 열심히 홍보했습니다. 역시 직업병은 버리기 힘든 것인가 봅니다.
'퍼블릭', 즉 '공공'이란 말을 다시 생각하고 되새겨본 하루였습니다. 제 머릿속에 퍼블릭하면, 퍼블릭 스쿨(공립학교), 퍼블릭 골프장 등 익스클루시브하지 않은, 가격이 싸거나 무료인, 시설이나 서비스가 뒤떨어지는, 그런 다소 부정적인 생각들만 떠올랐었거든요. 경제 수준이 좋든 안 좋든, 장애가 있든 없든, 나이가 적든 많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공시설'이란, 그리고 그곳을 구성하는 '유니버설 디자인'이란 바로 이런 것이 되어야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삼, 남편의 월급에서 반을 뚝 떼어가는 세금이 조금 덜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