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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 Apr 05. 2020

산수국

연우야, 오늘 이시영 선생 묘역에 다녀왔어. 음, 묘소까지는 오르지 못하고 멀찌가니 서 있다가 돌아왔지만. 왜냐고? 묘역 계단에 커플이 앉아 있었거든. 둘 다 스물 한둘쯤 되었을까? 여자 아이가 남자 아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서로 손을 꼭 붙잡은 채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따금 서로 눈을 맞추며 보시시 웃기도 하고.


진호는 여기까지 쓰다 말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옆에 놓인 액자를 바라보았다. 흰색 반팔 셔츠에 까만 나비넥타이, 까만 슬랙스 차림으로 산수국 부케를 들고서 함박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지금보다 다섯 살 젊은 진호. 발목까지 내려오는 새하얗고 하늘하늘한 스퀘어넥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서 진호의 팔짱을 낀 채 개구지게 웃고 있는 여전히 서른인 연우. 둘의 까만 머리칼을 뜨겁게 달구던 칠월 태양의 열기, 이따금 뒤쪽 숲에서 불어오던 나른한 바람의 선뜻함, 맨발로 밟고 섰던 풀밭의 감촉과 냄새, 더운 날씨 탓인지 유난히 느릿느릿하게 느껴지던 카메라 셀프타이머 박자, 그 사이로 자꾸만 삐져나오던 둘의 웃음소리까지, 진호는 이날의 모든 것이 멀미가 날 만큼 또렷해져서 질끈 눈을 감았다.


연우의 죽음은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그래서 진호에게 연우의 사고, 죽음, 장례로 이어진 일주일은 단 1초도 진짜 현실이 아닌 대중목욕탕 속 풍경처럼 희뿌옇고, 웅성거리고, 답답한 덩어리로만 떠다닐 뿐이었다. 그러니 병원 응급실에서도, 중환자실에서도, 장례식장에서도, 화장장에서도, 추모공원에서도 진호는 울지 않았다. 울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먹지도 않았고 말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그런 진호에게 많은 사람이 눈물과 슬픔과 위로와 걱정을 놓고 갔다.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넋이 빠졌다, 저러다 연우 따라가겠다, 인생 망가졌다 같은 수군거림이 진호 주변을 맴돌았다. 석 달쯤 지나니 진호 곁에는 놀라울 만큼 고요한 무관심만이 남아 있었다. 진호는 그때서야 울기 시작했다. 엉엉, 소리 내어 며칠이고 울고 또 울었다. 그 눈물은 바싹바싹 메말라 가던 진호를 가뭄 끝 단비처럼 시나브로 촉촉이 적셔 갔다.


진호는 먼지가 내려앉을 새도 없이 매일 닦아 깨끗한 액자를 슬쩍 손으로 훔친 뒤 다시 연필을 쥐었다.


아이들 모습이 너무 너와 나 같아서 차마 그 옆을 지나가지는 못하겠더라고. 스물 둘이었던 우리도 늘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네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나는 작고 보들보들한 네 손을 꼭 잡고 너는 나지막이 내게 이야기를 하고 나는 네가 하는 말 가운데 낱말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귀를 쫑긋 세운 채 고개를 주억거리고.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들이었지.
- 우리가 앞으로 줄곧 사이좋게 지낸다면 서른 즈음에는 결혼할래?
- 좋아.
- 결혼식은 우리끼리 숲에서 사진을 찍는 걸로 하자. 어때?
- 좋아.
- 부케는 산수국으로 하고 싶어.
- 산수국?
- 어디서 봤는데 산수국 꽃말이 ‘변하기 쉬운 마음’이래.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 자그마한 꽃을 벌과 나비가 보지 못할까 봐 헛꽃까지 만들어 내는 그 마음이 어떻게 변하기 쉬울까 싶더라고. 오히려 너무 절실하고 애틋해서 영영 변하지 않는 마음과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그 꽃이 너무 예뻐.


결혼사진을 찍던 날, 진호는 챙겨 온 부케를 한사코 자기가 들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평소에는 도통 고집 피우는 일이 없는 사람이 별일이다 싶어 연우는 의아해했지만 곧 선선히 진호에게 부케를 넘겼다. 연우가 산수국 이야기를 들려준 날, 진호는 생각했다. 너는 늘 공허했던 내 헛꽃으로 날아와 무척 작고 보잘것없는 내 참꽃을 알아봐 준 사람, 그러니 나는 평생 네 곁에서 산수국으로 피겠다고.


그래도 연우야, 걱정은 하지 마. 이런 기억이 내게 더 이상 슬픔은 아니니. 네가 좋아하는 젤리빈 작가의 새 작품 『어둠이 걷힌 자리엔』에서 자신을 떠났다 돌아온 고오에게 조기는 이렇게 말해. “어떤 것들은 한순간만으로 충분하다”고. 연우야, 나는 한순간이 아닌 무려 10년을, 그것도 우리 생에서 가장 반짝이던 순간을 내내 너와 함께했는데, 어떻게 슬플 수가 있겠어. 나는 이미 넘칠 만큼 충분하니까, 그러니 너도 부디 그곳에서 평안하기를. 안녕.


진호는 5년 동안 매일 써 온 일기인지 편지인지 모를 그 기록을, 늘 그랬듯 마치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마무리 지은 뒤 연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얼른 『어둠이 걷힌 자리엔』 단행본이 나와 연우에게 가져다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싱긋이 웃었다.


평생이라는 시간은 스물의 진호에게도, 서른의 진호에게도, 서른다섯의 진호에게도 여전히 아득했고, 진호에게 날아왔던 연우는 너무 일찍 떠나 버렸지만, 진호는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이 연우의 산수국으로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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