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야, 오늘 이시영 선생 묘역에 다녀왔어. 음, 묘소까지는 오르지 못하고 멀찌가니 서 있다가 돌아왔지만. 왜냐고? 묘역 계단에 커플이 앉아 있었거든. 둘 다 스물 한둘쯤 되었을까? 여자 아이가 남자 아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서로 손을 꼭 붙잡은 채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따금 서로 눈을 맞추며 보시시 웃기도 하고.
아이들 모습이 너무 너와 나 같아서 차마 그 옆을 지나가지는 못하겠더라고. 스물 둘이었던 우리도 늘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네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나는 작고 보들보들한 네 손을 꼭 잡고 너는 나지막이 내게 이야기를 하고 나는 네가 하는 말 가운데 낱말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귀를 쫑긋 세운 채 고개를 주억거리고.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들이었지.
- 우리가 앞으로 줄곧 사이좋게 지낸다면 서른 즈음에는 결혼할래?
- 좋아.
- 결혼식은 우리끼리 숲에서 사진을 찍는 걸로 하자. 어때?
- 좋아.
- 부케는 산수국으로 하고 싶어.
- 산수국?
- 어디서 봤는데 산수국 꽃말이 ‘변하기 쉬운 마음’이래.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 자그마한 꽃을 벌과 나비가 보지 못할까 봐 헛꽃까지 만들어 내는 그 마음이 어떻게 변하기 쉬울까 싶더라고. 오히려 너무 절실하고 애틋해서 영영 변하지 않는 마음과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그 꽃이 너무 예뻐.
그래도 연우야, 걱정은 하지 마. 이런 기억이 내게 더 이상 슬픔은 아니니. 네가 좋아하는 젤리빈 작가의 새 작품 『어둠이 걷힌 자리엔』에서 자신을 떠났다 돌아온 고오에게 조기는 이렇게 말해. “어떤 것들은 한순간만으로 충분하다”고. 연우야, 나는 한순간이 아닌 무려 10년을, 그것도 우리 생에서 가장 반짝이던 순간을 내내 너와 함께했는데, 어떻게 슬플 수가 있겠어. 나는 이미 넘칠 만큼 충분하니까, 그러니 너도 부디 그곳에서 평안하기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