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ew Sep 03. 2023

두 번째 산티아고, 열넷째 날

San Vincete - Penduelas 26.57km

2023.04.27


새벽에 계속 잠이 깨는 바람에 잠을 설친 김에 그냥 일찍 일어났다. 짐을 모두 갖고 나와 공용 공간에서 배낭을 싸고 문을 나서니 정확히 7시 반이었다.  어김없이 언덕길이 나왔다. 평소보다 30분 조금 더 일찍 나온 것뿐인데 아침 공기가 다르다. 한 시간쯤 걸으니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이 머리 위로 따라오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하늘과 바다

한 2시간 걸을 때까지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는데 점점 사람들이 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에 걸을 때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는데, 다들 어디에서 나타난 것일까. 파란 하늘과 연두 들판의 소들이 번갈아가며 나를 쳐다봤다.

한 번씩 인사를 건네는 소들


서로 ‘올라’, ‘부엔 카미노’하고 지나쳐 가는데 앞에 네덜란드 야콥 아저씨가 보인다. 4일 연속으로 같은 숙소에서 지낸 것 같다. 아저씨도 날 보았는지 몇 번이고 뒤돌아보시더니 내가 큰 걸음으로 따라잡았을 때 큰소리로 굿모닝 하고 인사를 건네셨다.


아저씨의 배낭이 오른쪽으로 너무 치우쳤던 것이 신경 쓰여 알려 드려야 하나 싶어 뒤를 따라잡았다. 어르신들은 보통 아시는데 생각하면서 그냥 참견하지 말까 하다가 배낭이 너무 무거워 보이는데 괜찮으시냐고 여쭤봤다. 그렇지 않아도 허리가 너무 아프시다고 하셨다. 그래서 너무 끈이 길고 한쪽으로 기울어있다고 말씀드리고 잠깐 멈춰 배낭끈을 만지작거렸다.

구름 모양이 날개를 펼친 새 같았다.

그렇게 오늘 야콥 아저씨와 하루 종일 같이 걷게 되었다. 야콥 아저씨는 경찰로, 범죄 분석가를 하시다가 2주 전 은퇴하신 후 카미노를 걷고 있다고 하셨다. 4년 전엔 나처럼 프랑스길을 걸으셨다고 했다. 아저씨도 오늘 나와 머무는 곳이 같다. 나는 플로린에게 들은 후로 가고 싶어 졌다고 했는데 아저씨는 네덜란드에서 북쪽길을 걸어야겠다고 했을 때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애나의 스토리를 읽으셨고, 북쪽길에 가면 이곳에 머물 것으로 이미 정해놓고 걸으셨다고 했다. 그리고 미리 예약을 하셨다고 하셔서 나도 가는 길에 전화를 해서 내 자리를 예약했다. 미리 예약하길 잘했다. 와 보니 자리가 2개 남아 있다고 하니 예약 없이 왔으면 자리가 없을 뻔했다.


많은 도착지 중 어디로 갈 건인지 매일 정해서 걷는 중요한 일

아저씨는 도로 위에서 교통경찰로 시작하셔서 몇 번의 시험을 거쳐 오랫동안 경찰 분석가로 근무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하셨던 경찰 일이라는 것이 내가 알던 도둑 잡고,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그런 경찰일이 아니었다. 네덜란드 경찰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1994년 8개월 동안 Apartheid 이후의 진상조사를 위해 파견되어 분석가로서 일한 적도 있고, 도미니카 공화국에 가서 분석가 일을 전수해 주는 일도 하셨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참 대단한 일을 하셨었던 분이었다. 네덜란드 여왕을 보호하는 일도 하셨고 1995년 남아프리카를 방문하셨을 때 직접 대화를 하신 적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경찰로서 범인을 잡을 때 사회에 일조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고도 하셨다.

시골 마을을 지나가며

그렇게 한참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다가 보니  생각보다 빨리 걸어왔다. 숙소는 오후 3시부터 체크인이 가능하여 우린 숙소를 30분 앞둔 마을의 작은 바에 들렸다. 바에는 동네 주민들이 맥주를 한 잔씩하고 있었는데 오후 1시 반에 일은 안 하고 바에서 맥주를 마시는 이 아저씨와 나도 모두 알고는 있지만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난 커피를 시킬까 했는데, 좀 전 걸어오면서 내가 프랑스길에서 레몬맥주 마신 이야기를 했었던 것을 기억하고 계셨는데 아저씨가 레몬 맥주를 사주셨다. 너무 목이 말랐어서 거의 한숨에 다 마시듯 맥주를 들이켰다. 맥주를 마시며 오랜만의 여유가 느껴졌다. 벽 한편에 요리 프로그램을 보면서 맥주를 마셨다. 요리 프로그램에서는 유명한 스페인 요리사인가 보다. 한창 엔초비 피자를 만들고 있었는데, 바에 있는 아저씨 한 명이 유심히 프로그램을 보고 계셨다.

Radler 레몬 맥주, 병으로도 있는 줄 처음 알았다.

맥주를 다 마신 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숙소를 향해 다시 걸었다. 그렇게 숙소에 도착하여 애나를 만났다. 마침 오늘 네덜란드에서 딸과 그녀의 남자친구가 애나를 보러 도착하였다고 한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3시가 되기 전에 도착했지만 일찍 체크인을 할 수 있게 배려해 주어 해가 쨍쨍할 때 얼른 빨래를 하고 널어두기 위해 빨래를 시작하였다. 그런 나를 애나 아주머니가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물어보셔서 쑥스러워 손만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빨래를 다 널고 그리고 자리에 앉으니 3시 반밖에 되지 않은 게 아닌가. 이 시간은 항상 길 위에서 걷고 있어서 이렇게 오후에 여유를 갖고 앉아 있는 게 조금 어색했다.


야곱 아저씨는 애나 아주머니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셨다. 아마도 오면서 내게 했던 이야기, 어떻게 이 알베르게를 알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를 애나 아주머니에게도 똑같이 하셨던 것이리라.


숙소는 3층집으로 1층은 주방과 식사, 공용 공간, 2층은 숙소, 3층은 주인집의 생활공간으로 분리되어 있고 고양이 한 마리도 같이 지내고 있었다.

돌로 지어진 아기자기한 Aves de Paso 알베르게와 고양이

애나 아주머니는 몇 년 전 남편을 잃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셨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알베르게를 열겠노라 결심한 후 이런 한적하고 외딴 스페인에서 홀로 알베르게를 운영하고 계시다고 한다. 방명록을 보니 한국인도 몇몇 다녀갔던 것 같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한국어로 적힌 방명록 편지를 번역해 달라고 하셨다. 방명록엔 좋은 이야기도, 침대가 불편했단 얘기도 있어 모두 말씀드렸다. 굳이 방명록에 쓸 만큼 침대가 안 좋았나 보다 하고 넘긴다.


다른 사람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애나 아주머니.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고, 영감을 받아 이곳 알베르게를 방문하는 순례자들. 남편을 잃어 마음 어느 공간이 텅 빈 애나 아주머니의 인생이 순례자들로 채워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일기를 쓰는 지금 이 순간인 오후 5시에 애나는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체크인을 하면서 동시에 딸과 딸의 남자친구를 보조로 두고 요리를 하고 계신데 행복해 보이고 무엇보다 냄새가 너무 좋다.


저녁시간에 모두들 식탁에 모였다. 10명이 최대 인원인데 오픈한 이후 몇 주정도 지나고부터는 늘 10명이 가득 채워 저녁을 같이 먹었다고 한다. 저녁은 오렌지색 수프, 샐러드와 콩과 치즈가 들어간 나초, 그리고 쌀이 들어간 디저트. 오늘이 네덜란드 왕의 생일이라 오렌지색 수프를 준비하셨다고 했다. 와인과 함께 후무스에 피타빵을 안주 삼아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와인과 피타빵, 후무스

애나의 주도로 한 명씩 돌아가며 인사를 하고, 오늘의 식사 질문은 ‘내가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주로 무엇을 하는 가'를 말하는 것이었다. 대부분 취미를 이야기했는데 제일 먼저 야콥 아저씨가 "I am doing nothing!" 하고 매우 분명하고 간단하게 외치자 사람들이 킥킥거렸다. 그 외에는 운동하거나 걷는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당근 수프와 콩과 채소가 들어간 치즈 나초

그리고 내 차례가 되어 난 걷는 것을 좋아해서 예전에도 지금처럼 많이 걸었고, 예전에 일이 끝나면 몇 정거장 전에 내려 집에 걸어가면서 오늘 무엇을 만들어 먹을지 생각한 다음, 집 근처 마트에서 장을 봐서 집에 가 요리하는 걸 좋아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 옆에 체코에서 오신 아저씨는 영어를 잘 못한다고 해서 단어 몇 개를 말씀하셨는데, 지금  사회적 기업 회사를 운영 중이고 이번에 카미노를 걷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직접 만든 쌀 푸딩

저녁을 다 먹고, 디저트도 다 먹을 무렵 애나 아주머니는 어떻게 이 알베르게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말씀하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와 함께 스페인에 종종 오곤 했는데, 그때부터 언젠가는 스페인에서 살고 싶으셨다고 했다. 그렇게 스페인은 휴가로만 왔다 갔는데, 첫 번째 남편과 이혼 후 재혼하고 2년 전 두 번째 남편이 심장마비로 죽은 후 이제 더 이상 내 인생에 희망이나 웃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고 했다.


그러다 포르투갈 산티아고 길을 걸어야겠다고 생각이 들어, 2주 동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후 네덜란드로 돌아온 이후에도 산티아고가 계속 생각나고(이건 순례자들 모두들이 그렇다.) 직장에 복귀해 일을 하면서도 더 이상 일과 일상 어디에서도 즐거움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 전 침대에 누워 구글로 ‘스페인, 알베르게, 매매’ 이렇게 검색했더니, 우리가 지금 있는 이곳이 제일 먼저 떴고, 그렇게 집주인에게 연락하여 이 알베르게를 사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이후 네덜란드의 집을 팔고 아이들도 다 컸으니 네덜란드 생활을 정리한 후 이곳 스페인 시골로 이사 오셨다고 다.


이 모든 이야기가 애나 아주머니 SNS에 모두 올라가 있어 그동안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 중 몇몇은 그녀의 이야기를 알고 찾아오는 이들도 있다. 야콥 아저씨처럼.


저녁을 다 먹은 다들 침대로 돌아가 휴대폰을 켠다. 모두들 가족, 친구들에게 연락하거나, 내일 갈 곳 숙소와 걸을 거리 등을 휴대폰으로 검색하며 하루를 정리하는 것이리라.


오늘 충전된 몸과 마음으로 내일은 다시 많이 걸을 예정이다.   

이전 13화 두 번째 산티아고, 열셋째 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