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ew Sep 04. 2023

두 번째 산티아고, 열여섯째 날

Pineres de Pria-Caravia 25.58km

2023.04.29


오늘이 바로 비상사태를 대비하여 가방에 넣어 한 개뿐인 커피모카 1개를 뜯는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인스턴트커피 향이 온 방을 채우는 그 온기가 필요했다. 커피와 어제 먹다 남은 토스트 과자로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마을 곳곳에 보이는 옥수수 집

두 시간쯤 걸었을 까, 내 앞을 지나치는 텍사스 아저씨와 인사를 하게 되었다. 텍사스 아저씨가 나에게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보면서 China? 하고 말을 더했다. 그래서 나는 ‘왜 서양 사람들은 아시아 사람을 보면 다 중국에서 왔냐고 물어보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이어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아저씨는 멋쩍어하며 본인의 귀가 잘 안 좋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도 그냥 농담한 거라고 둘렀다. 아저씨는 나더러 영어를 잘한다며 미국에서 공부했냐고 물어보셔서 런던에서 공부를 했다고 했다. 뭔가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알겠다고 하시며 빠른 걸음으로 부엔 카미노 하며 지나가신다. 뒤이어 네덜란드 아주머니가 굳은 표정으로 부엔 카미노 하고 지나가신다. 텍사스 아저씨와 나눈 대화가 껄끄럽게 끝나 걸으면서 대화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냥 한국에서 왔다고 간단하게 대답했으면 됐었을걸 하는 생각이 들고 신경이 쓰이자 이 짧은 대화에 질질 끌려 지금 까미노를 걷는 시간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그런 어림짐작 생각은 하지 않기로 하고 그렇게 계속 걸었다.


한 시간 반쯤 더 걸어 오늘 걷는 길에서 만나는 마을 중 가장 번화한 마을인 Ribadesella에 도착했다. 위키피디아에는 스페인 Letizia 여왕의 고향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 인근에서 큰 도시인가 보다.  증거로 큰 슈퍼마켓이 두 개나 있고 바와 동네 빵집, 기념품 가게로 관광객들도 꽤 있었다.  

Ribadesella, 말과 어떤 관련이 있는 도시인가?

우리나라 이마트와 비슷한 Dia도 있어 잠시 들러 점심에 먹을 용으로 바나나, 샐러드, 치즈, 치아바타 빵을 사서 나왔다. 시간만 잘 맞추면 갓 나온 바게트를 살 수 있다. 마트 문을 나와 걷는데 뒤에서 걸인이 부엔 카미노라고 외치는 걸 그냥 지나쳤더니 뒤에서 다시 스페인말로 (어림짐작하여) “부엔 카미노를 들었으면 감사합니다 해야지!”하고 내 뒤통수에 소리 지르는 게 들렸다. 오늘 무슨 날인가, 지금까지 좋은 날만 계속되는 것이 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오늘 같은 날도 있지 다.

알록달록 골목 계단을 내려오면 도심이 나온다.

마을을 둘러보다 이 마을 다음부터는 바를 들리기 어려울 것 같아 커피를 마실 곳을 찾아 시내 한 바퀴를 돌아봤다. 한 카 안에 사람이 북적여 앉을자리가 있나 유리창 너머로 둘러보는데 안에서 누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아까 나를 지나쳐 간 텍사스 아저씨와 네덜란드 아주머니였다. 아직까지 오전에 데면데면했던 장면이 잔상으로 남아 있어 나에게 그렇게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 거란 생각은 못했는지 얼떨떨한 예상 밖의 마주침이었다.

안경원인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안경원 벽면과 Ribadesella 시청

손까지 흔드는데 그냥 지나치기가 그랬다. 커피숍에서 다시 만나니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가 “여기 커피 맛있어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아주머니가 커피가 맛있다고 하셔서 나도 옆 테이블에 짐을 내려놓고 커피를 시켰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언니한테 전화걸었다. 오랜 신호음 뒤 받은 언니는 영화 슈퍼마리오를 보다가 잠깐 밖으로 나왔다고 했다. 언니와 통화한 후 어제부터 파도같이 울렁이는 기분이 안정되고 잔잔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실내가 제법 컸던 카페

커피는 굉장히 쓴 맛이었는데 덕분에 어제 잠을 설친 피곤이 좀 나아졌다. 잠시 뒤, 부부처럼 보이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먼저 가시고 나는 몸이 피곤해 조금 더 앉아 있다 다시 일어났다. 아마도 저분들과 오늘 길에서 여러 차례 만날 것을 예상하면서.


예상이 맞았다. 가는 길에도 저 을 계속 만난 것은 물론이고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었다. 오늘은 25km여서 5시 반 반 정도 걸릴 줄 알았는데 숙소에 도착해 보니 7시간 반 정도 걸렸나 보다. 

길 변두리에 핀 카라꽃

알베르게는 주인아저씨가 직접 설계하고 올린 목조 주택이라고 한다. 그래서 숙소 안에 향긋한 나무향이 진하게 났다. 산림욕 하는 기분이었다.

밖으로 나와 개수대에서 빨래를 하러 물을 틀자 수도꼭지에서 뜨거운 물이 나왔다. 보통은 찬물이라 흙 때가 잘 안 지워졌었는데 감사한 마음으로 뜨거운 물에 비눗물을 만들어 빨래를 하얗게 했다.

아직 단장 중인 벽면과 순레자들 

내 침대로 돌아와 글을 쓰고 있는데 계단에서 네덜란드 아주머니의 특유의 큰 웃음소리와 텍사스 아저씨의 저음의 미국 영어 목소리가 들려와 두 분이 도착한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저녁시간이 되어 우린 옆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저녁은 렌틸콩 수프와 샐러드, 바게트, 후식으로 나뚜럴 요거트. Natural를 나뚜럴 이라고 정확하게 쓰여 있는 그대로 발음한다는 것을 오늘 배웠다. 아침보다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 보다 일반적인 질문과 대답으로 두 분과 대화를 이어갔다. 이번이 첫 번째 카미노인지, 언제 시작했는지 등등. 알고 보니 두 분은 부부가 아니라 10년 전 프랑스 길에서 처음 만나 카미노 친구가 되신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와 4년 전 이룬에서 빌바오까지 걷고, 올해 다시 빌바오에서 히혼까지 걷을 예정이라고 하셨다. 난 프랑스길에서 그런 인연을 만들 생각은 못해서 그런지 이 두 분이 신기하고 대단해 보였다. 네덜란드 아주머니는 저녁을 드시며 앞, 옆의 순례자들과도 계속 이야기를 나누셨다. 맞은편 독일 아저씨는 이틀 후 히혼이 아닌 Primitive 카미노를 걸을 예정이라고 하시면서 책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출발 전부터 A4로 일정표를 만들어 오신 것을 보여주시며 매우 준비된 순례자의 자세를 보여주셨다.

저녁으로 나온 샐러드와 렌틸콩 수프

저녁을 다 먹고 침대로 돌아오니 9시가 좀 넘었다. 오늘 숙소에는 대부분 60, 70대 어르신들만 계셔서 그런지 9시 반에 불이 꺼졌다. 나도 침대에 누워 왜인지는 모르지만 어제 숙소에서 불편했던 기분에 이어, 아침에 텍사스 아저씨와 나눈 대화와 굳은 표정으로 나는 쳐다보며 지나간 네덜란드 아주머니까지, 내내 불편했던 기분이 커피숍과 저녁식사 시간을 거쳐 오늘이 지나기 전 모두 사라진 것에 감사하며 다시 한번 카미노 길을 걸으며 생각의 방향을 설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카미노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카미노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타인에게 항상 친절할 것, 그리고 몇 가지의 에피소드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다 말하는 건 아니라는 점, 절대적으로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은 없으며 그 당시의 상황이 좋고 나빴던 것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한 번 머릿속에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면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느껴진다는 것도 새삼 느낄 수 있었던 하루였다.


자기 전 언니와 이야기를 주고받다 언니가 이틀 뒤 지낼 히혼의 숙소비를 지원해 준다 하여 히혼에서는 호스텔이 아닌 호텔에서 잘 생각을 하며 벌써부터 마음이 설렜다.

지나가는 순례자를 위해 담벼락에 만들어 놓은 카미노 성인
Along the way there is a magical world that you don't see, it is the protective guardian that will guide you and wait for you, giving you luck.
이전 15화 두 번째 산티아고, 열다섯째 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