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침대에서 자는 분이 잠들기가 어려웠는지 거칠게 침대를 쿵쿵 등으로 움직이는 소리에 나도 밤새 잠을 뒤척였다. 새벽 6시 반이 되자 다들 천천히 짐을 싸기 시작하여 나도 같이 짐을 쌌다. 매일 비슷한 이유로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는 듯하다.
7시에 준비된 아침은 오랜만에 유럽식이다. 유럽에 있긴 하지만 알베르게에서 보기 어려운 유럽식 아침. 정통 치즈에 잼, 꿀, 데운 우유, 커피 그리고 호밀빵, 견과류가 들어있는 시리얼에 요거트까지. 아침 식사를 하려고 자리에 앉으니 접시에 작게 접힌 손편지를 발견하였다. 애나는 어제 떠난 순례자들이 남겨놓은 행복 노트라고 어서 펴보라고 했다. 내 접시에 담긴 행운의 편지는,
"You are enough. I'm so proud of you ♡ Sending love and hugs♡"
모르는 사람에게 이러한 사랑과 용기를 듬뿍 받고 나도 다음 순례자를 위해 편지를 썼다.
예쁜 빨간색 접시와 행운의 편지
오늘야콥아저씨는 16km만 걸으실 예정이라 움직임이 여유로우시다. 애나 아주머니와 딸 로렌에게 인사를 하고 야콥 아저씨와 함께 중간까지 같이 걷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골목을 조금 돌았을 뿐인데 안개 때문에 구름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아저씨에게 혼자 걸었으면 엄청 무서웠을 것 같다고 하니, 혼자 걸어선 안되지. 하고 따뜻한 답변을 해주신다. 한국 같았으면 산신령이 나왔을 것 같다는 농담을 하고 싶지만 그건 네덜란드 아저씨에게 통하지 않으리라 생각해 그냥 속으로만 생각했다.
안개가 짙은 산 길과 처음보는 가시나무에 핀 노란 꽃
한 시간쯤 걸었을 까, 뒤에서 어제 숙소에서 같이 보낸 영국인 제임스와 독일 레이디가 걸어와 어느새 우리와 함께 걷고 있었다.
어제저녁 테이블에서 제임스는 여행가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연극배우처럼 발성이크고 굵직한 목소리를 가진 제임스는 잉글랜드 남부지방 억양을 가진 49세로 미혼에 아이가 없어 혼자 여행 다니는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고 했었다.
제임스, 독일 레이디, 야콥 아저씨
오늘 아침도 연극톤의 목소리로 독일 레이디에게 본인의여행 다니면 경험을 풀어놓는 게 들렸다. 이렇게 쉴 새 없이 모든 자연 대상물에 말을 걸고 말이 많으며 거기다 목소리가 우렁찬 순례자와 나란히 걷는 것은 처음이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들으며 내 머릿속으로 실례지만 좀 조용히 했으면 좋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야콥아저씨는 제임스의 이야기가 재미있는지 계속 대꾸를 해주면서 넷이서 길을 걸었다.
들판에서 만난 작은 말이 웃고 있다.
3시간쯤 걸었을까, 짙은 안개가 걷히고 Bufone을 볼 수 있다는 장소에 도착했다. Bufone은 용솟음 같은 거라고 볼 수 있는 자연현상이다. 오늘은 노란색 길을 따라가지 않고 좀 더 돌아가는 해변길을 선택했는데 바로 이 Bufone을 보기 위해서였다.
갈색이 모두 산 염소이다.
자연이 허락해야만 볼 수 있기에 도착했을 땐 절벽과 깊은 구멍에서 나오는 바람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절벽에 산염소들이 아슬아슬 걸어 다니는 것이 신기해 사진을 찍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타일에 담겨 있는 이야기가 궁금하다.
도로와 도로 사이의 어느 마을을 들어갔다. 작은 마을이지만 곳곳이 참 아기자기했다. 어느 집의 한쪽 벽면은 스토리가 있는 타일로 꾸며져 있었고 조금 더 가니 감탄이 나오고 마는 부케 마냥 꽃덤불로 뒤덮인 담벼락이 나왔다. 난 담벼락을 연신 예쁘다 예쁘다 하며 떠나지 못하고 계속 사진을 찍었다. 야콥 아저씨도 나를 따라 꽃담벼락 사진을 잔뜩 찍으시더니 집에 돌아가 이 사진을 보면 오늘 아침이 기억날 거라며 감상적인 멘트를 하신다.
수채화 그림같은 꽃담벼락
1시간을 반을 더 걸어 관광지인 Llanes에 도착해 잠시 앉아 커피를 마시고, 나는 멀리 가야 하기에 모두들에게 인사를 한 후 먼저 일어섰다. 야콥 아저씨의 재밌는 이야기를 못 들으니 아쉬웠지만 또 만날 수 있으리라.
Llanes 기념품 가게와 어느 집의 도어벨 인형
Llanes를 벗어나기 전 다음 마을까지 가는 길에 슈퍼가 없다는 설명을 미리 봤기에 오늘 먹을 저녁과 내일 아침거리를 산 후 오늘 숙소까지 계속 걸어갔다. 걷는 중간 길을 잠시 잃어 카페에 들어가 라떼를 한 잔 마시며 와이파이를 연결해 길을 다시 찾았다. 앉아 있는 동안 카페에는 잡동사니를 파는 보따리장수가 한 번 들렀고, 늦은 오후 타파스를 즐기러 나온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 들어왔다. 길을 찾았겠다 다시 배낭을 메고 일어나 4시간을 더 걸어 6시쯤 숙소에 도착했다.
바람과 파도 만든 절경
도착한 동네는 슈퍼가 없을 만큼 시골인 데다 마을에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숙소로 들어가 파르동 하고 주인을 찾으니 침대가 없단다. 어제 앱에서 정원이 40명이라고 한 것과 달리 정원이 6명뿐이라 20분 정도 떨어진 교회 옆 별채까지 가야 한다고 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시 걸어 오늘 머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숙소는 지금까지 머물렀던 곳 중 두 번째로 허름했다. 합판으로 공간을 구분 지어 놓고 생긴 방에는 2층짜리 2개씩, 어떤 방은 6개씩 들어 있었다. 매트리스 커버와 베개 커버를 주지 않아 물티슈로 닦아내니 하얗고 검은 먼지가 묻어 나오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혹시 베드버그가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어 매트리스를 들어 확인까지 했었다.
숙소에는 내 앞에 7명이 미리 와 있었고 총 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각자 한 개의 방을 사용했던 것 같다. 빨래를 하고 오후에 사 온 바게트에 샐러드와 치즈를 넣어 샌드위치로 저녁을 먹었다. Cucina, 주방에만 난로가 켜 있는데 식탁이 너무 작아 8명이 모두 앉을 수가 없어 난 주방 밖 공용 공간에서 저녁을 먹었다.
밖엔 비가 내려 을씨년스러운 거실에서 주방 난로 앞으로 의자를 가져가 앉아 불을 쬐고 있는데 식탁에 두루 앉은 어르신들의 대화소리가 들렸다. 억양을 들어보니 독일, 네덜란드, 미국 텍사스에서 왔다고 소개하신 분, 프랑스, 이탈리아 어르신 이렇게 미국과 유럽을 아우르는 어르신들이 모여 Refuge의 유입, 이민자들에 대한 정상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순례자들은 이민자들에 대해 너그러운 입장을 가질 거라 지레짐작했던 것일까, 정상회의는 이민자들이 문젯거리이며 자국으로 유입되는 것을 반대한다는 내용으로 흘러갔다.
가끔 나를 힐끔 보고 정적이 흐를 때도 있었지만 나는 난로 앞에서 마지막날까지의 일정을 짜느라 바쁜척을 하며 대화에는 끼지 않았다. 내가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하길 바랐다. 조금 뒤 알베르게 관리인이 오셔서 난로를 5분 뒤 끈다고 하셔서 어르신들의 정상회의가 끝났다. 텍사스 아저씨가 "이민자들이 미국에 무엇을 줄 수 있다는 것인가? 세상은 Give and take인데"라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도착할 무렵부터 계속 비가 스산하게 내려 잘 때 추울까 걱정했지만 갖고 온 모든 옷을 입어 침낭 속은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늘 너무 오래 걸어 몸이 피곤했는지 잠을 여러 번 깨느라 잠을 잘 자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