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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HD약을 먹으면 천재가 되나요?

그냥 집안일을 하나 끝까지 하는 엄마가 됩니다

by 향운 Mar 20. 2025

ADHD 검사를 결심했던 나의 증상

설거지거리를 식기세척기에 넣어볼까?

(식기세척기에 전날 저녁의 식기들이 아직 방치되어 있음)

식기세척기부터 정리해 볼까?

(식기들을 정리하는 도중 두통이 느껴짐)

아 감기 때문인가 머리가 아프네 약도 타왔는데 약을 안 먹었구나

(정리를 멈추고 물을 컵에 담아 약봉지를 살펴봄)

어머 마약성 성분도 있다고? 이건 빼고 먹어야겠네

(부엌에 놓여있던 습도계가 20을 가리키는 것을 발견함)

습도가 너무 낮네. 감기도 있는데 얼른 가습기 물 채워야겠다

(물이 없어 가동되지 않고 있던 가습기를 허겁지겁 들고 싱크대로 감)

싱크대에 그릇들이 많아서 가습기를 둘 수가 없네... 식기세척기가... 약이...


싱크대에는 아직도 치우지 못한 설거지거리가,

식기세척기에는 정리되지 못한 식기들이,

아일랜드 식탁 위에는 뜯지 않은 약봉지와 물컵 한 잔이,

그리고 내 두 손위에는 갈 곳 잃은 가습기가 있었다.


나에 대한 한심함도 살짝 스쳤지만, '내가 그럼 그렇지, 근데 오늘은 좀 심하네? 진짜 검사받아봐야 하나?'

그리고 충동적으로 ADHD 검사 예약을 잡았다.

그리고 ADHD 약을 받아왔다.






ADHD 약 효과와 의존성

요즘 전국적으로 콘서타는 품절대란이라 처음부터 메디키넷으로 시작했다.

메디키넷은 서방정이 아니라 하루 2번 챙겨 먹어야 하는데, 2번 챙겨 먹는 것이 어려움이라면 어려움이다.

어디 외출할 때 챙겨 먹어야지 하고 챙긴 점심약이 외투, 가방, 자동차 곳곳에서 발견된다.

ADHD약 관련 의존성에 대해서는 책마다 의견이 갈리던데 증상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싶다.


주말에는 비서 겸 든든한 보조자 남편이 있기에 챙겨 먹지 않고, 평일 아침 아이들 등원하고 집안일로 바쁠 때에는 약을 먹는 편이다.

6개월 정도 투약 후 휴약기간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 중인데 그전까지 습관을 잘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처음 약을 먹는 2주 정도 저용량이었지만 각성으로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살짝의 식욕 감퇴가 있었고, 처음 느낀 효과는 '감정 조절이 잘 된다'였다.

적응기 동안은 특별히 달라진 점을 실감하지 못하다가 새삼 깔끔하게 정리가 된 집과 여유를 즐기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또 적응기가 끝나자마자 나아진 집중력을 맘껏 누리며 잠도 줄이고 무리하다가 약을 먹지 않는 주말이나 깜빡하는 날에는 졸음이 쏟아지는 때도 있었다.

혹시 약 안 먹으면 원래 졸린 거냐고 약사 친구에게 물었다가 약에 너무 의존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혼이 나기도 했었다.

지금은 무리하지 않고, 건강하고 규칙적인 생활 습관 형성에 힘쓰는 중이다.


ADHD 약을 오남용 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집중력 좋아지는 약이라며 먹으면 천재가 될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설거지거리를 정리하기 위해

식기세척기를 다 정리하고 나서 약을 먹고,

낮은 습도를 확인하였지만 싱크대를 비우기 위해 먼저 설거지거리를 애벌 세척하여 식기세척기에 넣은 다음,

가습기의 물을 채우는 사람이 된다.


카페에서 수다를 떨 때 수저를 덜 떨어뜨리는 사람이 되고,

싫어하는 빨래 개기를 어찌어찌 끝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만날 깜빡하는 차키를 챙겨서 주차장으로 가는 사람이 된다.






약을 먹고 하는 집안일

아이들 등원 후 집안일을 시작한다.

지난밤에는 다이어리에 투두리스트가 적혀 있고, 그 투두리스트에 따라 할 일을 하나씩 한다.

'집안일하며 들을 BGM 없나?' 하며 휴대폰을 들었다가 빨리 일을 끝내려면 그냥 폰을 내려두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휴대폰을 멀리 치운다.

전 날 건조기에 돌아간 빨래를 개고, 청소기를 밀고, 화장대 위도 정리한다.

늘 하기 싫은 설거지는 점심 먹고 하겠다는 마음으로 흐린 눈으로 지나친다.

점심을 가볍게 차려서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한다.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건 덤이다!

오후 1시경 집안일 끝!


약의 효과가 놀랍지 않습니까? 집안일을 하나하나 다 해냈다고요!


예전 같았으면? 휴대폰 보면서 대충 청소기 돌리고 책 읽거나 글 쓰는데 집중해서 시간을 보낸다. 나머지 집안일은 나중에 오후에 해야지~ 하다가 뭐해야 하는지 까먹고 아마도 빨래도 못 개고, 화장대 정리도 못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빨래 개기, 남편이 하는 밀린 설거지.


약 적응기 끝나고 집안 전체 대청소, 정리정돈을 하는데 남편과 주변 지인들이 알아볼 정도로 깔끔해졌다. 그리고 유지하고 있다.


습관이 중요하다고 약을 먹으면 의도적으로 일 하나를 끝마치고 다음 일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일을 한다. 확실히 약을 안 먹는 날에 그런 습관이 도움을 준다. 식탁을 다 정리하고 설거지를 시작하는 나 좀 멋진 듯.






약을 먹고 하는 공부

평소 책 읽거나 글 쓸 때에는 약 없이도 과집중하는 경향이 있어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휴대폰을 찾는 빈도나 딴생각으로 새는 횟수가 줄어든 느낌? 기분? 플라세보 효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좋아하는 일은 약이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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