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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cony Review May 12. 2020

무너지고 또다시 일어나고

조금은 유별난 암 투병일기 (21)

여김 없이 CT촬영일자가 다가왔고 이번에 암이 더 커졌을 경우를 대비하여야 했다. 이제는 남은 표준치료 중에선 그다지 기대해볼 만한 치료가 없었지만 나는 식약처 기준 표준치료, 식약처가 인정하지 않는 치료, 그리고 임상 중인 약들을 다 리스트로 만들어서 다음을 준비했다. 


눈에 띄는 임상약 중 AKT 저해제인 표적 항암제가 임상 중이었고 작년에 아산병원 김성배 교수가 진행한 연구가 성공적이었다는 기사를 본 것도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어쨌든 대부분의 임상시험의 자격에는 우리가 요건이 되지 않았기에 유일한 방법은 치료 목적 승인, 응급임상이었다. 


우린 저번과 마찬가지로 결과지를 때었고 우리가 불안해하였던 기침 소리가 암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흉수까지 차있다는 결과지. 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혹시 내가 안될 경우를 매번 대비해서 계속 잘 되지 않는 것인가. 


교수님을 만났고 교수님은 역시나 항암치료를 그만두는 것도 고려해보라고 하였다. 나는 AKT 저해제인 이파타설팁 (Iptasertib)에 대해서 말씀드렸고 교수님은 이 약으로 응급임상이 된 적이 없어서 힘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거기서 포기할 내가 아니지. 지난주에 사실 제약사에 전화를 해놨었고 타 병원에 한번 응급임상이 승인된 적이 있다는 것을 교수님께 말씀드렸더니 한번 연락해보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문제는 제약사 / 식약처 / 병원 승인을 받으려면 1-2달이 족히 걸린다는 것. 


교수님은 그동안 아무것도 안 하는 게 괜찮냐고 하셨다. 우리는 잠시 얘기를 나눈 후 우리가 쓰지 않았던 표준 치료를 그동안 하고 있겠다고 말씀드렸다. Gemcitabine (젬자)라는 세포독성 항암제는 우리가 전이 후 처음으로 썼던 Cisplatin 혹은 Carboplatin과 같이 많이 쓰는 항암제였고 Bevacizumab (아바스틴)이라는 약은 Paclitaxel, 역시 우리가 처음으로 Cisplatin과 썼던 항암제, 와 병용으로 많이 쓰이는 신생혈관 억제제였다. 내가 찾아본 논문에 의하면 젬자와 아바스틴 병용도 외국에서는 표준치료로 많이 쓰이고 있었고 교수님께서도 아마도 부작용이 그리 심하진 않을 거라고 그러자고 하셨다. 그렇게 주사를 정하고 진땀을 빼고 진료실을 나왔다. 이 땜빵 주사가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지.


우리는 약의 실패에 너무 익숙해져서 결국 매번 병원을 오면 교수님께 다음 치료방법을 내가 설득하는 게 주된 일이었고 와이프는 어느 순간 '그러려니'하였고 내가 노력하는 게 너무 고맙지만 자기는 가끔 치료를 그만두는 게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그때마다 나는 조금은 섭섭하기도 하고 그 섭섭함을 숨기고 싶었지만 감정을 잘 못 숨기는 나는 잘 그러지 못하였다. 




CT 결과가 좋던 안 좋던 이번 주말엔 강원도를 가기로 했던 우리. 와이프에게 갈 수 있겠어?라고 확인을 하곤 주말에 아들을 데리고 강원도로 떠났다. 


처음으로 썰매를 타보는 아들은 너무 재밌어하였고 와이프의 기침소리는 기분 탓인지 연말보다 더 심해진 것만 같았다. 새로운 항암치료는 다음 주로 예약을 해놓았었고, 어떻게 보면 신약을 쓰기 전에 땜빵으로 쓰는 이약들에 얼마나 기대를 해야 하는지도 애매했다. 그렇다고 아무 기대도 안 하기엔 너무 하루하루 살기가 힘들 것 같았고. 


어찌 됐건 저찌됬건 우린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역시 그 즐거움을 주는 덴 아들이 최고였다.




구정 연휴를 맞아 부모님 댁을 찾았다. 첫 항암주사를 맞은 후, 이것 또한 기분 탓인지 기침이 줄었다. 와이프는 이번 약이 효과가 있다고 믿었고 문제는 효과가 얼마가 가냐라고 말하였다. 어쨌든 기분 좋은 일이었다. 사람 심리라는 게 참 간사하다. 기침이 심해질 때는 '약이 효과가 아직 안 나타나나 봐, 그냥 항암제 때문에 부작용 기침일 거야' 이러다가도 기침이 좋아질 때는 '약이 효과가 나타나나 봐! 항암제가 효과가 있나 봐' 이렇게 감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오웰. 



1년 넘게 와이프와 함께 투병을 하고 간병을 하면서 나처럼 열성 암환우 보호자들을 여러 만나게 되었다. 외국에 가서 불법으로 약을 사 오는 이까지 있었으니 여기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진상인지는 말 다했다. 어쨌든 그 공간은 나에겐 어떻게 보면 공감대의 공간이었다. 와이프가 투병을 하고 내 속마음을 말할 곳이 많이 없어졌었는데 그 공간에서만은 아무 말을 다 해도 괜찮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 단톡 방에서 Tumor Treating Field (TTF)라는 새로운 방식의 암 치료 방법이 공유가 되었고 현재 임상에서 제일 잘되고 있는 TTF는 뇌종양 종류에 특화된 머리에 쓰는 방식의 전자기 암 치료 기기였다. 그러다 보니 다른 비슷한 기기들 자료도 공유되었고 유방암에서 효과를 보인 임상 논문이 눈에 들어왔다.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나름 미국 주립대의 암센터장이 CEO로 있는 회사였고 해볼 만 하단 생각이 들었다. 연락을 하고 가격을 알아보다 스위스에서만 처방이 가능하다는 이메일이 나에게 돌아왔고 며칠 나 혼자 고민을 하다가 와이프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애기야 우리 스위스 여행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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