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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May 01. 2022

결국 식물들이 지구를 정복할 것이다

(22.5.1) 우주한, 플랜츠 vs 좀비, 근저당권의 이론과 실무

  


  요즘엔 근무를 시작하기 전에 여유가 조금 남으면 재미교포 우주한의 2015년도 발표 음악인 villain(빌런)을 틀어놓고 심호흡을 하며 책을 읽는다. 9시 정각이 되면  ‘플랜츠 vs 좀비’ 같은 타워 디펜스류의 게임의 빌런들처럼 일이 몰아친다. 게임은 식물들이 좀비들로부터 지구를 지켜내는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좀비들은 나와 동료들이다. 좀비처럼 출근해서 좀비처럼 일을 처리하다가 6시가 되어도 좀비처럼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다. 플랜츠들은 결국 지구를 차지하게 된다.

  보통 플랜츠는 순서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거나 먼저 진행한 플랜트를 처리하는 도중에 발생하기도 한다. 10시에 발생한 플랜트를 처리하려 서류철을 열었다가 약 11통의 전화를 받고 새로 발생한 플랜츠를 처리하느라 10시에 꺼내놓은 서류철의 존재를 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17시에 악성 플랜트의 항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처리한다. 키보드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전화를 받고 문서 출력을 한다.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이제동의 뮤탈리스크들도 GG를 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회사에서 주로 읽는 책은 2권의 매뉴얼과 약 200개의 조항이 있는 규정집과 오시정 교수가 집필한 ‘근저당권의 이론과 실무’이다. 나에게는 이것이 명상집이나 경전과도 같은 안정감을 준다. 책을 펼치면 감정이 절제되고 사실과 설명으로 조합된 명징한 문장들이 이어진다. 처음에는 보기가 어렵더라도 계속 보다 보면 그 의미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어 그 문장들은 나중에는 아포리즘으로 정제된다. 그리고 때때로는 항상 읽어 왔으면서도 무심코 지나쳐버린 단서 조항들이 새로운 국면을 전개할 때는 희열감을 느끼기도 한다

  특히  ‘근저당권의 이론과 실무’에 나와있는 ‘대지 근저당권자가 지상권 설정이 불필요한 이유 5가지’는 몇 번을 읽어도 심금을 울린다. 지상권으로 고민하고 있는 같은 팀 동료에게 이 부분을 낭독해 주자 동료는 시력이 1.0에서 1.5로 상승되는 동시에 시상하부와 뇌하수체를 통해 분비되는 부신피질 자극 호르몬의 양이 감소하며 주량이 소주 2병에서 3병으로 증가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하지만 같은 구절을 본사 담당 부서에 알려주자, 마치 결혼 얘기만 나오면 말을 돌리는 연인 사이처럼 서먹해지더니(오빠, 그 얘기 지금 꼭 해야 돼?) 갑자기 통신상태가 안 좋아진 것 같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자니...?)     


  나는 고등학생이 되자 심각한 난독증이 생겼는데, 책을 펼치면 글자들이 작은 구슬처럼 뿔뿔이 다른 방향으로 굴러가는 증상이었다. 나는 일상생활을 거의 영위하기가 어렵다고 느꼈고 삶을 비관한 나머지, 수업시간마다 숨을 참고 숨이 멎는 시도를 했지만 1분을 넘기지 못하고 실패했다. 그런데 그 시간은 점차 늘어나서 나중에는 3분까지 숨을 참을 수 있었으며,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것은 프리다이빙을 위한 무호흡 훈련이나 노래를 하기 위한 복식호흡 훈련과 유사한 방식이 되었다. 그 덕에 나는 친구들과 같이 간 목욕탕에서의 숨 참기 대회에서 늘 1위를 하여 부상으로 주어진 무상 바나나우유를 즐길 수 있었으며 노래방에선 고음이 점점 올라가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아마추어 그룹사운드의 보컬로 캐스팅이 되기도 했다.

  당시 난독증에 대해 부모님께 말씀드리자,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던 아버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는지 공부가 하기 싫으면 거짓말하지 말고 그냥 공부를 하지 말라고 했다. 진실을 얘기하면 거짓말이 되어 버릴 수밖에 없었고 나는 거짓말에는 원체 소질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공부를 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다. 사물함에 있는 교과서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갖다 버렸을 때 선생님은 뭐하는 짓이냐고 했고, 나는 부모님과 모두 합의된 사항이 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그것이 합의되었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었는지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감마선에 노출된 브루스 배너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수능 모의고사에서 언어 영역이나 외국어 영역 시험은 어렵지 않게 거의 다 풀었는데 그 미스터리를 선생님도 친구들도 늘 궁금해했지만, 실은 내가 읽은 지문들이 무슨 내용인지 나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지문을 이해하고 푸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보고 지문 속에서 답이 되는 단어들을 찾아서 대충 유추했을 뿐이었다.       


  대학 때는 고등학교 때보다 상태가 조금 나아졌고, 대부분의 책들이 수식과 그래프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훨씬 이해하기가 쉬웠다. 그러다가 지금의 직장으로 왔을 때, 넘쳐나는 공문과 계약서와 약관들을 다뤄야 했는데 그때 난독증이 다 나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의학 정보를 찾아보았고 나의 난독증이 어떠한 병리학적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서 해결방법으로 껌 씹기를 선택했다. 껌을 약 30분간 씹으면 세로토닌 혈중 농도가 최대 20%까지 증가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나는 추잉껌을 하루에 3,4통은 씹었는데, 효과는 굉장히 좋았고 책상에 쌓아둔 문서들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대신 점차 턱선이 두꺼워지면서 브래드 피트의 턱선을 시술 없이 득템 하게 되었고, 스케일링을 하러 간 치과에서는 상태가 너무 좋아서 스케일링이 필요 없을 정도라고 했다.

  그 이후에 나는 읽기의 즐거움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특히 한 번에 읽어서 이해하기 힘든 구절을 여러 번 읽어서 이해가 되기 시작했을 때의 기분은 질긴 고기를 여러 번 씹어서 목으로 넘겼을 때의 감각과 아주 유사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동거묘 하릅은 내가 배가 고프다고 할 때마다 그 감각기관을 잘 활용해서 눈으로 책을 먹어 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비아냥거리며 그루밍을 했다.


아래의 작품들을 언급했습니다.     

근저당권의 이론과 실무 (오시정)

Villain (Uzuhan)

플랜츠 vs 좀비 (팝캡 게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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