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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Apr 24. 2022

나쁜 습관들은 나를 늦은 밤으로 이끄네

(22.4.27) Bad habbits, 몰입의 즐거움

     

  동거묘 하릅과 함께 아침 산책을 했다. 일반적으로 하릅이 먼저 산책을 하자고 하는 적은 잘 없었는데 요즘은 부쩍 먼저 나가자고 한다. 같은 길이지만 걷는 시간에 따라 느낌은 너무 다르다. 햇빛이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지만, 살갗에 닿는 공기의 온도는 서늘했다. 바람이 살짝 불었다. 나는 하릅에게 언젠가 자주 보였던 차력 노인과 음악 청년에 대해 기억나느냐고 물었지만, 하릅은 놀랍게도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차력 노인과 음악 청년은 저녁 산책길에만 보이는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주로 호수 둘레길 북쪽의 공원에 자주 출몰하였는데, 신기하게도 서로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차력 노인은 공원에서 웃통을 벗고 영춘권(같은 것)을 연마하시는 분인데 우레와 같은 기합에 비해 너무나 기력이 없는 초식을 펼치곤 했다. 그리고 컨디션이 좋으면 옆돌기 같은 것들도 보여주는데, 성공적인 착지 이후에 시그니처 기합(짜흐!)을 외치곤 하셨다.

  나는 옆에서 박수를 치며 ‘한번 더’를 연호한 적이 있었는데, 무언가 심기가 불편하셨던 건지 기합(짜아아흐!)를 외치시면서 하늘에 손을 뻗고 대략 1 갑자의 기를 단전에 모아 운기조식을 운용했다. 그리고는 나를 준엄한 표정( ‘쇼미더 럭키 짱!’의 강건마와 같은)으로 예고하듯 노려보다가 순간적으로 한 손을 뻗으며 장풍을 발사(하는 퍼포먼스를) 하며 기합을 내질렀다.(짜흐!) 공원의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나는 최상의 퍼포먼스를 완성하기 위해 잔디 위에 무릎이 다치지 않게 살짝 쿵 쓰러졌다. (그리고 공원 옆 놀이터에 있던 아이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음악 청년은 귀에 이어폰을 꼽고 늘 박수를 치며 총총거리는 발걸음으로 공원을 종횡무진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뛰어다니는 분인데, 노래는 늘 같은 곡이다. 나는 음악 청년을 보면 음침한 기운이 느껴져 슬금슬금 자리를 피한다. 그 노래가 장송곡이기 때문이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허야~ 어허야~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허야~ 어허야~”

  나는 그를 비가 오는 어느 날 처음 마주쳤다. 좌르륵좌르륵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홀린 듯이 장송곡을 부르면서 공원을 뛰어다녔는데, 과장이 아니라 아무렇게나 카메라로 찍어서 ‘곡성’의 아무 장면에나 넣어도 괴리감이 없을 것 같았다. 만약에 그가 쥬크 박스처럼 신청곡을 받아줄 용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가격을 지불하고 싶은 심정이다. (에드 시런의 ‘Bad Habbits’ 부탁드립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모두가 바라고 상상했던 그 일이 일어났다. 그 둘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공연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은 배트맨의 세계관에 아이언맨이 들어온 것 같은 일대 사건이었으며 프랭크 밀러와 스탠 리의 협업과도 같은 대형 프로젝트였다. 나는 이 둘의 기묘한 협연이 과연 어떻게 끝날 것인가 너무나 궁금했다. 우연히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된 나는 공연료가 있다 해도 기꺼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그 두 분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각자의 공연을 이어갔다. 웃통을 벗은 차력 노인은 애먼 나무 기둥을 손바닥으로 치며 기합(짜흐!)을 외쳤으며 음악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텐션으로 장송곡을 부르면서 총총총 뛰어다녔다. 이때의 관람 포인트는 누가 먼저 서로를 의식하느냐 였다.

  “이제 가며언~ (짜흐!) 언제에 오나아아~ (짜흐!, 짜흐!) 우워워허야~ 우워워허야~ (짜짜짜흐으으!)”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굉장히 우아한 화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긴장의 끈이 팽팽하게 이어졌으며 나는 라이브를 켜고 중계라도 하고 싶어졌다.

  드디어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림고수들의 싸움! 일견 평화로워 보이는 이 호수의 공원은 보이지 않는 총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이자, 일반인들은 볼 수 없는 치명적인 초식들이 공간을 가로지르는 사각의 링입니다.

  결국, 이 싸움은 차력 노인의 흔들리는 멘털로 인해 끝이 났다. 차력 노인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차력을 멈추더니 말했다.

  “어이, 음악 청년. 어이, 거기.”

  장송곡의 트랜스에 빠진 음악 청년은 차력 노인의 부름에도 알아듣지 못하고 자신만의 공연을 계속하고 있었다. 차력 노인은 몇 번을 더 불렀으나 음악 청년은 아무런 반응 없이 자신의 할일을 하고 있었고, 차력 노인은 마침내 주화입마를 입은 듯 허리에 손을 얹고 한참을 고개를 숙이더니 음악 청년에게 졌잘싸의 리스펙이 담긴 엄지 척을 내밀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그날의 승자인지는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음악 청년의 네버 엔딩 장송곡이 이 대결의 피날레를 장식했고, 그 이후 차력 노인은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이러한 몰입을 ‘Flow’라고 부르며 인간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물질적인 풍요로 인한 것이 아니라) 삶의 순간순간에 행하여지는 몰입(Flow)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본인이 수행하는 작업에 대한 ‘완전한 집중’을 통해 물이 흐르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을 느끼면서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 더 나아가서는 자신에 대한 생각까지도 잊어버린다고 하였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행복감을 의식적으로 고양시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Flow에 이를 수 있는 각자의 작업을 찾아야 하며 그것이 자신에 대한 삶의 주도권을 찾아가는 길이다.

  직관했던 세기의 대결을 뒤늦게나마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 무척 기쁘고 영광이다.



아래의 작품들을 언급했습니다.


몰입의 즐거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Bad Habbit (에드 시런)

쇼미더럭키짱! (김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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