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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기 Mar 31. 2020

인생에서 모든 것이 '끝'이라  생각될 때...

#포기 #시작 - 그 차이

살다 보면 여기서 그만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 경우 모든 것을 그만두는 경우도 있고, 다른 곳에서 새로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인생은 낙담의 연속이기에 우리는 자주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여기가 끝인가 하는 생각은 우울감을 불러온다.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빨리 옮기는 것이 좋다. 내 나이가 되면 이직도 불가능하다." 최근 회사 내 높은 직급을 갖고 계신 분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거의 모든 조직은 피라미드형 구조로 되어 있기에 높이 올라 갈수록 자리 수는 줄어든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직은 젊을 때나 하는 것이다 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가 말한 '불가능'이란 말에 꽂혔다. 정말 그럴까?


회사는 연초에 인사발령이란 것을 한다. 인사발령에는 희미가 교차한다. 정말 축하해 주고 싶은 사람도 있지만, '어 이 사람이 이름이 왜 여기에...?' 하는 경우도 있다. 회사는 연차와 성과 등 여러 가지 면을 검토 후 결정했다고 하지만,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낙심이 된다. 과연 이 회사 믿을만한 건지? 내가 무리 해 가며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목까지 차오른다.


몇 해전 전 직장에서 함께 근무하던 선배를 만났다. 그는 함께 일하던 직장에서 나와 새로운 곳에 둥지를 틀었다. 그에게 이직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가 답했다. "임원한테 찍혀서 더 이상 진급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어. 너도 알잖아 그 사람 눈 밖에 나면 어떻게 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정말 그 임원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선배는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조직을 위해 희생을 하더라도 자기를 알아주는 곳에서 하고 싶을 마음이었을 것이다.


'언제 멈춰야 할까? 언제 그만두어야 할까? 지금이 그때일까? 여기가 끝인가?'


삶에서 이 질문은 끝없이 나를 괴롭혀 왔다. 나는 끝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내 인생에서 걸어온 길을 모두 불태우고 새로운 길을 향해 나갔다. 과거를 불태울 때는 아쉬움도 있지만, 시원함도 있다. 그러나 다시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하는 어려움은 마치 황무지에 다시 농사를 짓는 것과 같았다. 이제는 어느덧 나이가 들어 다시 도전하는 것이 점점 힘에 부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앞이 막막해지고 나 자신에 대한 믿음도 조금씩 사그라든다.




오늘 아침 아내와 산책을 갔다. 갑작스럽게 봄이 와서 인지 나무에도 푸른 잎들이 돋아 나기 시작했다. 앙상한 가지만 있었던 나무에 싱그러움이 더해진 것이다. 봄의 향기에 젖어들 때즘 한 그루의 나무가 내 시선에 들어왔다. 아니, 나무라고 하기엔 어려운 그런 존재다. 왜냐하면 그것에는 생명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해 태풍에 맞았는지 겨울 내내 뿌리가 뽑혀 버려진 채 있었다. 나는 매일 산책할 때마다 그 흉물이 눈에 거슬렸고 그것을 치우지 않고 내버려 두는 구청 직원들을 마음에 안 들어했다.


그런데, 오늘, 그것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싱그러운 잎을 뿜어 내고 있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그 나무에 다시 생기가 돋아 난 것이다. 누워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어느덧 청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이다. 머리가 멍해지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분명 죽은 줄 알았는데...' 나는 가까이 가서 그 나무를 보고 싶어 졌다. 자세히 보니 나무의 약 80% 정도는 뿌리가 뽑혀 있었고, 남은 20%는 아직 땅에 뿌리가 닿아 있었다.


죽었다고,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던 생각했던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게 느껴졌다. 나무는 나 따위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겨울 내내 그의 갈길을 위해 묵묵히 버텨내었다. 그리고 봄이 오자 마침내 계획을 이루려는 듯 활기찬 생명의 기운을 자신의 몸 구석구석에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나무를 보면서 몇 년 전 일이 떠올랐다. 당시 내가 살고 있던 아파트 뒷 산에 불이 났다. 한 동안 등산을 하지 않다.  몇 달 뒤 이제 잠잠해졌게꺼니하면서 우연히 그 산을 올랐다. 여기저기 산불의 흔적이 보였다. 검게 그을리고 반쯤 타들어간 나무들이 많았다. 나무라기보다 숯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때도 나의 시선을 끄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 역시 누가 봐도 이미 생을 마감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무였다. 몸의 반 이상이 타서 없었으며 남은 몸도 마치 석탄불에 바짝 타들어간 감자처럼 매우 검게 그을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나무에서 한 구석에서 초록빛을 내는 생명의 싹들이 돋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마치 온몸이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소름이 돋는 듯했다.


삶의 끝은 언제인가?

우리는 언제 '포기'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

정말 끝인가?

또 다른 시작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뿌리가 뽑힌 나무와 산불에 타들어간 나무... 죽은 줄만 알았던... 아니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두 나무가 나에게 주는 삶의 메시지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 촬영한 나무입니다. 인생에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올 때마다 한 번 씩 꺼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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