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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Jun 25. 2024

자유는 바다, 신뢰는 악수

  이천십칠 년 봄에는 글을 열심히 썼다. 연애와 사랑에 관한 글이었다. 에세이라고 부르기에는 짧은 글을 조금 모아 여름에 첫 책을 냈다. 인디자인을 독학했고 충무로에서 책에 들어갈 종이를 성심성의껏 골랐다. 그 해 이른 봄과 늦은 봄, 두 번 제주에 갔다. 제주의 동쪽에서 산책을 하고 바다를 보며 카페에 몇 시간씩 앉아 글을 썼다. 동생이 제주에 살던 때였다. 가면 숙박비도, 렌트비도 안 드니 비행기 값만 있으면 되었다. 제주도에 안 간지도 벌써 이 년이 넘었다. 지하철을 타고 강 건너 좋아하는 종로에 가듯 제주에 놀러 가던 시절도 있었구나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아득하다.


  퍽 자유로웠던 것 같지만 여름, 그간 기간제 교사를 하며 모은 돈을 발리 여행에 몽땅 다 쓰고 나는 임용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이 되었다. 시험을 준비하며 남산에 자주 갔다. 남산도서관에서 돈가스를 먹고 남산타워를 보며 열심히 공부했다. 점심시간에는 도서관 앞 뜰 벤치에 앉아 김애란의 소설을 읽었다. ‘바깥은 여름’이란 책이었다. 첫 책을 내고 제주와 발리를 여행하고 임용시험을 치고 나자 이천십칠 년도 끝나갔다.


  지난주 화요일, 학교에서 아이들과 ‘감정은 무얼 할까?’라는 그림책을 읽었다. 참을성은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열등감은 철창을 만들고 평온은 강아지를 가만히 쓰다듬는다는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는 아이들도 각자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았다. “자존심이 뭐예요?”라고 물어보는 학생에게 멋없이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거야.”라고 대답해 주었는데 학생이 자존심을 ‘힙합’으로 표현해서 혼자 한참을 웃었다. 다른 학생은 자유를 바다 위에서 튜브를 타고 햇볕을 쬐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여름이어서 그런지 유난히 그 그림이 좋았다. 신뢰를 표현하기 어려워하는 학생에게 “마음속 깊이 믿는 사람에게 어떤 행동을 하고 싶어?”라고 물었더니 학생이 “악수하고 싶어요!”라고 대답해 신뢰는 악수가 되었다. 참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자유는 바다, 신뢰는 악수, 그리고 자존심은 힙합.


  나의 첫 책은 오백 권 팔렸다. 오늘 엄마와 동생은 터키 여행을 떠났다. 내가 터키 여행을 함께 갈 수 없었던 건 임신 육 개월차이기 때문이 아니라 학교에 나가야 하기 때문이지만 괜스레 기분이 언짢고 서글펐다. 팔린 오백 권의 책은 어디에 있을까? 무언가 영영 끝나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무로에서 혼자 종이를 고르던 시간도, 제주를 동네 맥주집에 가듯 놀러 가던 시절도, 도서관 앞에서 눈가를 달구며 소설을 아껴 읽던 마음도. 바다 위에서 튜브를 타고 햇볕을 쬐는 한여름의 청춘 같은 자유는 이제 나에게 없는 게 아닐까.


  이천십칠 년에 일곱 살이었던 나의 강아지는 이제 열네 살이 되었고 나는 삼십 대 초반에서 후반이 되었지만 여전히 알게 된 것이 별로 없다. 기회가 된다면 학생에게 자존심을 조금 더 잘 설명해주고 싶은데 어떤 말이 이해하기 쉽고 적절할지 모르겠다. 삶은 표현하기 힘든 ‘자존심’ 같은 감정 투성이다. 나의 나이 든 강아지는 이제 앞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코를 벌름거리며 재빠르게 나를 알아보고 내 다리 옆에 등을 대고 누워 낮잠 자기를 좋아한다. 오늘 나에게는 여전히 내 강아지의 이마에 입을 맞출 자유가 있고 자유와 신뢰에 관한 글을 쓸 자유가 있으니 터키 여행을 가지 못한 것은 조금만 우울해하기로 한다. 아마도 무엇인가는 영영 끝나버렸겠지만, 여름밤, 침대 맡에서 조용히 돌아가는 선풍기와 선풍기 바람에 팔락이는 늙은 강아지의 귀. 지금 이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은 또다시 재빠르게 변한다는 것. 그러므로 계속해서 사랑해야 한다는 것.


  어쩌면 아이들에게 배운 대로, 자유는 바다, 신뢰는 악수, 딱 그 정도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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