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엄마는 여동생과 나를 데리고 자주 비디오 대여점에 갔다. 비디오 대여점이 무척 많아서 대여 가격이 날이 갈수록 싸졌는데 나중에는 최신작을 천 원, 오래된 영화는 이백 원에 빌려보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자주 가던 비디오 대여점은 아주 넓었고 그 넓은 공간에 비디오가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엄마는 대여점에서 오랜 시간 동안 정성껏 영화를 골랐다. 스펙터클한 할리우드의 최신작이나 애니메이션을 빌리는 날도 있었지만 이백 원짜리 고전이나 어린 나이의 우리가 보기에는 조금 난해한 영화를 빌리는 날도 많았다. 그래도 엄마와 영화를 보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졌던 기억은 없다. 엄마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자주 혼자서 종로의 독립영화관에 가는 성인이 되었다. 종종 그 시절 엄마와 보았던 영화들을 다시 찾아본다. 몇 영화는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장면이 하나도 없어서 마치 처음 보는 영화 같을 때도 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영화인데 성인이 되어서 보니 눈물 콧물이 다 나올 정도로 마음이 쓰이는 영화도 많았다.
‘제8요일’은 그 시절 본 엄마가 보여주었던 영화 중 내가 정말 사랑하는 영화다. 중학교 일 학년 때였다. 엄마와 동생과 어두컴컴한 거실에 앉아 ‘제8요일’을 보다가 나는 한참을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주인공 조르쥬가 또 다른 주인공 아리를 빗 속에서 끌어안으며 ‘내 친구’라고 말하던 장면이었다. 눈이 빨개질 때까지 울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나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감히 조르쥬를 불쌍하게 생각했구나. 장애를 동정하는 마음은 오만이었다. 중학교 때 엄마가 나와 조르쥬를 만나게 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특수교사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대학생이 되어 특수교육을 전공하면서도, 특수교사가 되고 나서도 나는 ‘제8요일’을 세 번 정도 더 보았고 그때마다 이 영화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더 이상 조르쥬의 장애가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의 일이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조르쥬, 아리를 위로하는 조르쥬, 엄마를 그리워하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엄마’라는 제목의 아름다운 샹송을 부르며 꿈을 꾸는 조르쥬와 나는 사랑에 빠졌다.
조르쥬를 연기한 배우 파스칼 뒤켄은 실제로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배우다. 그는 ‘제8요일’로 아리를 연기한 배우 다니엘 오떼유와 함께 칸 영화제에서 공동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파스칼 뒤켄은 다운증후군을 연기한 것이 아니라, 다운증후군을 가진 배우로서 조르쥬를 연기한 것이다. 이 영화의 아름다움은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연기한 조르쥬가 아니었다면 나는 조르쥬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파스칼 뒤켄은 그 이후로도 몇몇 영화에 출연했다. ‘이웃집에 신이 산다’와 ‘미스터 노바디’. 모두 ‘제8요일’의 감독 자크 반 도마엘이 만든 영화다. 파스칼 뒤켄은 두 개의 영화에서 모두 장애를 연기하는 배우가 아닌 장애를 가진 배우로 출연해 연기한다. 자크 반 도마엘 감독의 첫 영화 ‘토토의 천국’에서는 어린 파스칼 뒤켄이 연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파스칼 뒤켄의 데뷔작이자 자크 반 도마엘 감독의 데뷔작인 셈이다. ‘토토의 천국’은 자크 반 도마엘 감독의 영화 중 내가 두 번째로 사랑하는 영화다.
장애와 장애인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장애를 이야기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예전보다 더 흔하게 볼 수 있다. 이전에 없었던 장애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사회에 가져다주는 좋은 영향력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파에 가까운 장애인에 관한 설정이나 최대한 극적으로 장애인을 연기하려고 노력하는 비장애인 배우의 모습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거북한 마음이 들 때가 많다. 장애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세상에 당연하게 존재하는 한 사람으로서 조르쥬를 바라본다면, 더 많은 것을 알아챌 수 있게되지 않을까.
“그 언젠가는 오지 않아. 단지 지금만이 있을 뿐이야.” 조르쥬가 내게 해 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