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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Jul 16. 2024

백점이에요?

  학창 시절에는 누군가가 ‘올백’을 받으면 학교에 떠들썩하게 소문이 돌았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전 과목 통틀어 가장 적은 수의 문제를 틀리는 게 꽤 중요했다. 시험이 끝나면 모든 아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야, 너 다 합해서 몇 개 틀렸어?”라고 물어보며 다녔으니까. 누군가는 ‘올백’을 받지 못하고 한 문제를 틀린 것이 아까워 울기도 했다. 올백이라니. 그 수많은 문제를 실수 하나 하지 않고 다 맞추기란 사실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마침 얼마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한국 최초 수능 만점자가 출연했다. 만점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모르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단다. 당연한 사실인데 ‘모르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라는 말이 생경하게 들렸다. 


  나도 고등학생 때는 문제집이나 모의고사를 풀고 나면 실로 돌돌돌 종이를 풀어내는 빨간 색연필로 채점을 했다. 연속으로 동그라미를 그릴 때면 쾌감을 느꼈고 줄지어 빗금을 칠 때는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빗금 친 문제는 나중에 한 번 더 풀어 꼭 반달 모양으로 바꾸어 주었다. 교사가 되고 나서는 더 이상 빨간 색연필로 채점을 하지 않는다. 틀렸다는 것을 지워지지도 않는 두껍고 진한 빨간색으로 표시하는 기분이 언짢다. 언젠가부터 틀린 문제는 연필로 아주 작게 세모 표시를 해주고, 문제를 다시 풀고 나면 세모를 예쁜 별모양으로 바꾸는 것이 내 나름의 방식이 되었다. 점수도 매기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어떤 문제를 학생이 어려워하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지만 점수는 크게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도 학생들에게 점수를 말한 적이 없는데도 학생들은 자신이 푼 문제를 내가 살펴볼 때마다 “백점이에요?”라고 묻는다. 그럼 나는 점수와 상관없이 이렇게 대답해 준다. “백점이에요! 그런데….” 


  우리 반 학생 중 한 명은 “그런데…” 뒤에서 틀렸다는 신호를 느낄 때면 “아니야!”라고 말하고는 토라진다. 보통은 짧게 토라졌다가 다시 밝은 모습으로 돌아오지만 가끔은 책상 아래에 한참 웅크려 앉아있을 때도 있다. 내가 정답을 적어주면 정답을 두 줄로 그어버리고 자기가 적었던 답을 옆에다가 다섯 번 정도 더 쓴다. 그래도 틀린 답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아서인지 마지막에는 모른 척 문제 옆구리 어딘가에 아주 작고 희미하게 정답을 쓴다. 


  우리 반 최고의 브레인은 선생님이라는 나의 직업이 무색하게 스스로 모든 것을 척척 풀어내는데 그만큼 틀렸다는 말을 듣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당차게 앉아 나의 선전포고를 기다리는 학생에게 “이 문제만 다시 풀어볼까…?”라고 말하는 순간 그 문제는 세상에서 제일 나쁜 엉터리 문제가 되고 나는 엉터리 문제를 내며 학생을 괴롭히는 선생님이 된다. 사실 나는 빨간 색연필을 사용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학생에게 삼 학년 수학 교육과정 중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컴퍼스로 원 그리기’였다. 학생이 원하는 만큼 ‘완벽하게’ 원을 그리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문제를 틀리거나 이해가 안 될 때면 눈가가 빨개질 때까지 눈을 비비는 학생도 있다. 가끔 “선생님! 아까 제가 그렇게 말했는데 왜 틀렸다고 했어요?”라며 문제를 틀린 것을 내 탓으로 돌린다. 학생의 말에 구구절절 반박하고 싶지만 의미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참는다. 


  어렸을 적 명절에 내가 친척들과 브루마블 게임을 하다가 지고는 그렇게 울었다고 한다.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너무 속상하고 억울해서, 이겨야만 하는데 이 기지를 못해서, 잘하고 싶었는데 잘 해내질 못해서, 성공하고 싶었는데 실패해서. 이제 사회화가 된 삼십 대 성인이라 게임 하나 졌다고 소리를 지르며 울지는 않지만, 내 마음속 어딘가에는 여전히 그 어린 시절의 내가 남아 있다는 걸 느낄 때가 많다. 다 잘 해내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백점’을 받고 싶은 마음. 아직도 초등학교 수행평가는 딱 사 단계로 점수가 매겨진다. ‘매우 잘함’, ‘잘함’, ‘보통’, ‘노력 요함’. 매우 잘한다는 것, 잘한다는 것은 어떤 걸까? 보통 정도라면 괜찮은 걸까? 노력만 한다면 ‘매우 잘함’이 될 수 있는 걸까? 교육과정이 정해준 기준에 맞춰 ‘노력 요함’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반 학생들이 틀렸을 때 책상 아래 웅크려 있거나 선생님 탓을 하고 싶은 마음을 알 것도 같다. 


  “틀려도 괜찮아.”라는 식상하고 소용없는 말을 하는 나에게 학생이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틀리면 기분이 나쁜데 어떻게 해요. 틀릴 때는 기분이 나쁜데요. 또 맞으면 금세 기분이 좋아져요. 금세 그렇게 돼요.” 나는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다가, 그 말이 너무 맞는 말이어서 “선생님도 그래.”라고 대 답했다. “틀리면 기분이 나쁘지. 그런데 맞으면 또 기분이 좋아지는 거야. 선생님도 똑같아.” 


  눈이 많이 내리는 밤이다. ‘노력을 요하기’보다는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겨울이었으면 좋겠다. ‘엄청 커다란 눈사람 만들기’ 같은 것들. 무언가를 해내는 것은 금세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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