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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Jul 12. 2024

다수를 위한 관상용 백합과

  올해 학급 예산이 편성되었다. 다행히 작년보다 삼백만 원이나 더 받았다. 작년에는 받아야 할 예산을 다 받지 못해 아이들과 하고 싶은 일 중 반 정도는 포기했다. 받지 못한 예산은 학교 정원 가꾸기 같은 ‘다수’를 위한 곳에 쓰였다. 나도 화단에 잔뜩 심긴 백합을 보는 일이 좋았지만 관상용 백합에 우리 반이 밀렸다고 생각하니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새 학기를 준비하면서 작년에 사기를 미뤄두었던 물건들을 하나 둘 장바구니에 담았다. 먼저 이십 년이 넘 은 냉장고를 새 냉장고로 바꿀 것이다. 작년 한 해 냉동고에 낀 성에를 없애 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오래된 교실 바닥에 도톰한 매트를 깔아 놀이 공간도 만들고 싶다. 책장으로 공간 분리를 하고 귀엽고 아름다운 그림책을 잔뜩 사서 꽂아 두어야지. 그림책을 읽고 나서 아이들과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작년에 포기했던 공예 활동이나 요리 활동도 마음껏 하고 싶다. 학생들이 같은 반 친구들과 놀이 공간에서 함께 할 최신 유행의 보드게임도 사야겠다. 


  특수학급은 다른 학급보다 예산이 많다. 요즘은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예전에는 특수학급만 예산이 왜 그리 많냐며 물건 하나를 살 때마다 트집을 잡아 남은 예산을 학교 전기세 같은 곳에 쓰는 경우가 많았다. 여전히 ‘왜 거기만 돈이 그렇게 많아?’라는 시선은 군데군데 남아있어서 작년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사실 이미 출발선이 다른 아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누리는 한 해를 보내기에 남들이 보기에 풍족한 예산은 늘 빠듯하다.  


  어렸을 때의 내게 가장 큰 불공평은 동생이었다. 첫째인 나는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 역할을 맡아야만 했는데 동생에게는 예체능을 전공할 자유가 주어졌다. 초등학교 졸업 전 담임 선생님께서 학부모 상담을 하며 “지원이는 예중을 보내야 해요.”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을 듣고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동생이 아닌 내가 예중에 가는 일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 직업을 자랑하며 글을 쓰는 지금에 와서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그때 나는 예술인이 되어야 할 재능을 타고났지만 대한민국의 장녀로 태어나 꿈을 포기해야만 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었다. 


  세상은 불공평한 일 투성이어서, 아이들은 “선생님! 이거 불공평한 거 아니 에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 왜 동생에게는 양보를 해야 하는지, 왜 언니, 오빠, 형, 누나가 하는 놀이에 어리다고 낄 수 없는지, 왜 선생님은 나보다 소시지 반찬을 더 많이 받는지, 내가 맡고 싶은 역할을 어째서 가위바위보에 졌다는 이유로 포기해야 하는지. 일등으로 선생님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아이들은 특수학급 학생을 담임선생님이 도와줄 때면 불만과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선생님이 특수학급 학생만 ‘특별 대우’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 장애인은 도와줘야 해요?”라고 묻는 아이들에게 나는 ‘장애인’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특수학급 친구도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지켜봐 달라고. 그리고 우리 모두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게 될지 모른다고. 


  세상의 차별과 불공평이 동생처럼 예술을 전공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나 두 개 밖에 받을 수 없었던 소시지 반찬처럼 자잘한 이야기였다면 좋겠지만 어떤 세상은 달랐다. 지하철을 타고 직장에 가서 일을 할 권리,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권리가 아직 누군가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나라는 모두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예산을 쓰는 대신 ‘다수를 위한 더 좋은 것’을 만드는 데 예산을 쓰기를 택했다.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현수막을 들고 출근 시간 지하철을 내렸다 타며 시위를 한다. 매일 지하철을 타고 직장에 갈 수 있는 사람들과 유명 정치인은 출근길이 삼십 분 지연되자 시위 단체를 ‘선량한 시민을 볼모로 잡는 이기적이고 비문명적인 단체’라고 손가락질했다. 순식간에 세상이 선량한 비장애인 시민과 이기적이고 비문명적인 장애인으로 나뉘던 그 분위기를 나는 잊지 못한다.  


  봄이 오니 집에서 기르는 식물에 새순이 나기 시작했다. 작년 봄부터 새순을 볼 수 없었던 황칠나무는 잎 끝이 계속 까맣게 타 들어가 곧 잎이 다 없어질 지경이었는데 얼마 전에 새순이 네 개나 났다. 아침마다 새순이 조금씩 자라 있는 모습을 본다. 아주 연두색이고 작고 맨질맨질 깨끗하게 빛이 난다. 내일이면 조금 더 자라 있을 것이고 곧 그럴싸하게 커 짙은 초록색이 되겠지. 봄의 새순이 주는 행복을 마주하며 내가 누리는 아침과 점심, 저녁이 얼마나 당연하지 않은지를 생각한다. 이제 곧 온 세상이 하나 둘 언제 그리 매서운 겨울이었냐는 듯 봄의 모양을 지니기 시작할 것이다. 나무에 돋는 연두 색 새순과 온기가 느껴지는 바람, 잎이 나기도 전에 피는 노란 개나리와 성큼하고 길어지는 낮의 시간. 올해는 벚꽃이 일주일이나 빨리 핀다고 한다. 재작년에는 경주에서, 작년에는 부산에서 이른 벚꽃을 보았다. 올해는 어디에서 벚꽃을 보게 될까. 봄이 열심히 오는 동안에도, 내가 벚꽃 나들이를 고민하는 동안에도 지하철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그 덕분에 세상은 조금씩 나아졌고 여기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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