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의 기술>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사람 사는 세상인데
평생을 가시밭 걸었으니
꽃길도 걸어 봐야지.
김종환의 〈결국엔 내 인생〉이라는 노래의 가사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누구나 주변에서 한 번쯤 들어보았을 말이다. 사는 게 팍팍해서 그런지 이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많다. “오직 단 한 번뿐인 내 인생인데”라거나 “처음 살고 한 번 사는 인생인데”라는 식으로 강조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영어 약자로 둔갑해 한국에 수입된 이후로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열풍 비슷한 것으로 바뀌었다. 이른바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다. 캐나다의 래퍼인 드레이크(Drake)가 2011년부터 유행시킨 말이다. 네이버를 검색해보니 박문각에서 나온 『시사상식사전』은 “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고 소비하는 태도”라고 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미래 또는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현재의 행복을 위해 소비하는 라이프 스타일이다. 욜로족은 내 집 마련, 노후 준비보다 지금 당장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는 취미 생활, 자기계발 등에 돈을 아낌없이 쓴다. 이들의 소비는 단순히 물욕을 채우는 것을 넘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에 있다는 점에서 충동구매와 구별된다.”
그런가? 어느 네티즌의 댓글을 보면서 웃었다.
“현재를 즐기는데 이상 실현이라는 거창한 말은 또 뭐냐. 박문각 선비 코스프레 역겹다. 사전 정의에 니들 가치관 집어넣지 말라고. 어디서 감히 개수작이야.”
욜로를 실천하더라도 그건 미래를 기약할 수 없어서 사실상 강요당한 것인데, 거기에 ‘이상 실현’이 웬 말이냐는 강한 반감이 읽힌다. 댓글들이 재미있어 모두 다 읽어보았는데, 긍정도 있지만 부정적인 의견도 많다. 몇 개 소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괜히 중2병 걸려서 나중에 폐지 주음.”
“시집 장가 못 가는 만년 솔로들 좋게 포장한 단어.”
“소비가 미덕인 시대에 소비 실종에 대한 사회 계몽운동의 일환?”
“뱁새가 황새 따라가단 뒈져요~ 욜로도 믿는 구석이 있어야 욜로지.”
“한심한 거지 포장하고 있어. 결혼할 때 되면 모은 돈 없이 부모한테 손 벌리지. 그게 욜로냐 배때지가 불렀지.”
“말은 인도 말 같아서 멋있는데, 포장만 돼 있지 실제는 경제 침체 속에 청년들이 돈이 안 벌리니까 욜로족이 되서 더욱더 망가지는 것 아닌가요.”
“내 주위에 욜로로 사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ㅋㅋ. 나중에 쪽박 차고 돈 빌려 달라고 하면 인생 패배자 취급하고 몇 십만 원 쥐어주면서 베짱이 같이 살 땐 좋았지? 하면서 개무시해야지.”
“우리 아버지가 시대를 앞선 1세대 욜로인이었구나. 재산을 모을 생각도 없고 일할 생각도 없고 가족 내팽개치고 자기 먹는 거랑 노는 거랑 몸 관리하는 거밖에 관심 없었음. 평생. 놀고먹기만 하고 근로는 전혀 하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식구들 수십 년간 고통받았다.”
이런 부정적인 댓글들은 우리 사회에 욜로에 대한 반감과 오해가 만만치 않게 존재한다는 걸 말해준다. 미디어가 사실상 사회적 의미를 부여할 정도의 규모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욜로족을 만들어 흥밋거리 기사로 소비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할 만하다. 특히 ‘헬조선’을 외칠 정도로 고통을 겪고 있는 2030세대가 스트레스로 홧김에 돈 쓰는 걸 가리켜 욜로족 운운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도 나온다.
욜로보다 덜 알려지긴 했지만, 욜로 이전에 덴마크산 ‘휘게(hygge, 안락함)’가 있었다. 휘게의 핵심은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만족하는 마음’과 ‘물질에 얽매이지 않고 단순하게 사는 기쁨’이어서 일부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게 한국에선 영 쉽지 않다.
북유럽 이민을 알아보고 있다는 한 젊은이는 “휘게 라이프를 헬조선에서 억지로 찾아내는 데는 지쳤다.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하다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는데,1 사실 평등하지 않은 사회와 휘게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불평등과 서열에 익숙한 한국인들 중에 휘게의 하부 원칙이라 할 이른바 ‘얀테의 법칙(Law of Jante)’을 실천할 뜻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말이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믿거나 그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2
덴마크식 평등이 마냥 좋은 것만도 아니다. 영국 저널리스트 마이클 부스Michael Booth는 지난 몇 년 사이 휘게를 깊이 알게 되면서 혐오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밝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한국의 휘게는 덴마크의 휘게를 겉모습만 흉내낸 시늉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는 걸 시사해준다.
“중간 합의점을 향한 휘게의 압제적이고도 끈질긴 추진력, 논란이 될 만한 대화 주제는 무조건 피하려는 고집, 모든 상황을 가볍고 경쾌하게 만들어야 한다는(시종일관 편안하고 자기만족적이고 소시민인 척하는 잘난 체) 필요에 질려서였다.”3
이 말은 비아냥에 가까운 풍자로 볼 수도 있겠지만, 휘게는 모임 중심이며 그런 모임에서 합의를 지향하는 것이 ‘강압에 가까울 정도로 규범적’이어서 다양한 적극적 사교술이 요구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휘게는 ‘나’보다는 ‘우리’를 강조하는데,4 한국에서 ‘우리’ 중심의 인간관계에서 치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휘게를 누리고자 한다면 ‘나홀로 휘게’라는 한국형 휘게를 재창조하는 수밖엔 없을 것이다.
최근엔 일본이 원산지인 ‘소확행(小確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것도 유행인데, 꽤 그럴 듯하거니와 바람직해 보인다. “이 작은 마카롱 하나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5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소확행이지만, 커피나 디저트 시장 등 외식업계 트렌드로만 그치지 않고, 다양한 소확행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마광수가 역설한 이런 행복론처럼 말이다.
“행복은 지극히 가벼운 것에서부터 온다. 무더운 여름날 소나기가 쏟아져내릴 때 우리는 행복하고, 향기로운 커피의 냄새를 음미할 때 우리는 행복하고, 땀으로 뒤범벅이 된 몸뚱아리를 샤워의 물줄기로 시원하게 씻어낼 수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다.”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보자면, 욜로・휘게・소확행의 원조는 ‘카르페디엠(carpe diem)’이다. carpe diem은 라틴어로 “Catch the day!”의 의미다. 지금, 여기의 순간을 잡아라, 즉 현재를 소중히 하라는 뜻이다. 로마 시인 호러스Horace, 즉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Quintus Horatius Flaccus, B.C.65~B.C.8)가 『송가(頌歌: Odes』에서 처음 쓴 말이다.
‘카르페디엠’을 외치는 사람들은 나름 성공한 유명 인사들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그건 드레이크가 성공한 래퍼로서 그간 번 돈을 자기 마음대로 써보겠다는 뜻으로 욜로를 외친 것과 비슷하다.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을 위해 다른 하고 싶은 일들을 뒤로 미루는 ‘만족의 지연’에 매우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유명 인사가 될 수 있었다. 너무도 바빠 일에 치이는 경향이 있는 그들은 이젠 돈 좀 쓰면서 살아야 되는 게 아니냐는 자기 설득을 위해 ‘카르페디엠’을 외쳐댄다.
비극은 그런 사정과 배경은 무시한 채 덩달아 ‘카르페디엠’을 실천하고자 하는 보통 사람들에게서 일어난다. ‘카르페디엠’을 오·남용하면서 ‘만족의 지연’을 불온시하는 것이다. 아니 몰라서 그렇게 한다기보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세상 사는 맛을 조금이라도 느끼기 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 어떤 문제와 한계가 있건 한국처럼 노동시간이 많고 ‘일중독’이 보편화된 나라에선 ‘만족의 지연’보다는 ‘카르페디엠’이 외쳐지는 게 바람직할 수 있다. 우리가 ‘카르페디엠’의 원리를 좋은 방향으로 따르고 그것이 문화로 정착된다면, 내가 보기엔 세가지가 좋아진다. 세계적으로 하위권에 속해 있는 우리 국민의 행복감이 높아질 것이고, 목숨 걸고 싸우는 입시 전쟁이 완화될 것이고, 공직자들의 부정부패가 감소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카르페디엠’의 실천이 광범위하게 일어나진 않으리라는 걸 잘 안다. 모두 동시에 다 그렇게 한다면 해볼 수도 있겠지만, 자신만 그렇게 했다간 큰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우리는 ‘카르페디엠’을 긍정하는 척하면서도 사실상 외면하는 이중적 감정을 갖고 살아간다. 욜로도 마찬가지다. “욜로? 좋지! 팔자 좋은 너나 해라”는 식으로 말이다.
욜로, 휘게, 소확행, 카르페디엠 또는 그 어떤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 지속가능성을 가지려면 그 기본 바탕엔 평온이 있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이들이 부정부패 혐의로 구속되는 장면을 지켜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아, 저들이 평온을 눈곱만큼이라도 사랑했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