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Jul 30. 2018

03. 서두를 이유가 없었을 뿐이다.

<개와 하모니카>




자려고 해도 통 잠이 오질 않더니 뒤늦게 착륙 한 시간쯤 전에야 졸음이 밀려왔다. 거의 수직으로 세워놓은 좌석 등받이를 다시 눕히기도 번거로워서 스미코는 그대로 눈만 감았다. 기내에는 조금 전에 나눠준 가벼운 음식, 아니 음식이라기보다 데운 용기 자체에서 나는 냄새가 아직 떠돌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불쾌했을지도 모를 그 냄새가 묘한 편안함으로 자신을 감싸는 것을 스미코는 꾸벅꾸벅 졸면서 느꼈다. 어렸을 때의 아침나절 같네, 하고 생각했다. 자신이 부엌에 나가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가 밥상을 차려주고, 부탁하지 않아도 뒷정리를 해주는. 턱, 하고 건조한 소리를 울리며 어딘가에서 창문 덮개 하나가 올라갔지만 이미 스미코 귀에는 그 소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는 착륙 순간이었다. 기체가 흔들리면서 몸에 그 충격이 전달됐다. 바퀴가 활주로를 구르는 큰 소리가 울리고 창밖은 흐린 회색빛의 나리타공항이었다.

아이고, 이런! 스미코는 창문에 달라붙어 평평한 콘크리트 공간과 리프트 달린 작업 차량을 바라보았다. 조금 더 높은 하늘에서 일본을 내려다보고 싶었던 것이다. 서서히 육지로 다가가는 느낌을 맛볼 생각이었다.

벌써 도착해버렸네. 스미코는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다른 승객들이 분주히 내릴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안전벨트를 풀고, 머리 위 선반에서 짐을 꺼내고. 스미코는 아직 그대로 담요를 덮고 있었다. 답답해서 안전벨트는 풀었지만 기내 비품인 양말과 슬리퍼를 신은 채 마치 내리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딱히 내리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을 뿐이다. 3년 전에 입주한 고령자 대상 맨션은 나름대로 쾌적하기는 해도 돌아가 봐야 아무도 없다.

런던에서는 여기저기에 데려가주었다. 미술관이라든지 펍(pub)이라든지 극장이라든지. 백화점에서 쇼핑도 했고, 손녀들이 다니는 유치원에도 갔다. 때마침 아이들의 아트 페스티벌이라는 것이 열리는 날이었던 것이다. 스미코가 본 바로는 그림과 만들기 전시회, 노래와 연극 발표회, 거기에 피크닉을 섞은 행사같았다. 조안나와 에이미 —스미코의 손녀들 이름으로 두 아이는 쌍둥이다 —는 둘 다 초콜릿 요정이라는 것으로 분장한 탓에 온통 갈색 발레리나 같은 차림을 하고 한마디씩 대사를 했다.

영국 남자와 결혼한 딸이 개와 쌍둥이와 함께 살고 있는 교외의 집은 넓지는 않지만 정원도 있고 손님용 침실에서 그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두 번째 방문이기도 해서 스미코는 마음 편히 머물다 올 수 있었다. 자동차나 버스를 타지 않으면 슈퍼마켓에도 갈 수 없는 점은 불편했지만, 그런 곳이어서 특히 조용하고 치안
도 좋다는 이야기였다.

딸 가족은 스미코를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영국인 사위는 일본 말을 못하지만, 어머니, 고맙습니다, 좋아요, 안녕히 가세요, 라는 말만은 알고 있어서 기회 있을 때마다 그 말을 입에 올렸다. 조안나와 에이미도 제 아빠를 따라 어설픈 발음으로 스미코를 ‘오머니’라고 불렀다. 오머니. 스미코는 자신이 오머니라는 이름을 지닌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기내 통로에 사람들이 줄줄이 서 있는 지금,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처럼 느껴졌다. 혹은 거짓말처럼. 사실은 어느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처럼.



스미코는 슬리퍼와 양말을 벗고 자신의 구두를 신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느릿 담요를 접었다. 영국 시간으로 맞춰놓은 손목시계를 보며 일본 시간을 계산해 보니 오후 4시 5분이었다. 정각에 도착했네.

“미안하지만, 저 짐 좀 내려줄래요?”

정장을 입고 팔에 코트를 걸친, 문이 열리고 줄 선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을 기다리기가 답답한 기색인 일본인 남자에게 스미코는 말했다. 나이 들어서 좋다 싶은 일은 별로 없지만 남에게 뭔가를 부탁하기가 쉬워졌다는 게 좋은 점이라면 뭐, 좋은 점이었다.

“고마워요.”

생긋 웃으며 스미코는 말했다. 영국인은 ‘땡큐’라고 말하면 ‘웰컴’이라든가 뭐라든가 —웰컴과 똑같은 뜻을 지닌 말을 이번 여행에서 또 하나 외웠는데 깜빡 잊어버렸다 —반드시 대꾸를 해주는데 일본인은 말이 아까워서 입을 안 뗀다니까, 하고 생각하다가 고작 2주 동안, 평생에 두 번 해외여행을 했을 뿐인데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외국물 꽤나 먹은 사람처럼 구는 것 같아 우스웠다.

매거진의 이전글 02. 비행기 도착 시간 전까지는 여유 있게 가지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