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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l 27. 2018

02. 비행기 도착 시간 전까지는 여유 있게 가지 싶다

<개와 하모니카>



햄!

퍼뜩 생각이 나서 겐지는 순간적으로 액셀을 풀었다. 집에서부터 족히 십 분은 달려왔다. 그걸 가지러 다시 집에 간다면 삼십분이 날아간다. 오후 2시. 아내와 딸을 태운 비행기는 나리타공항에 오후 4시 15분 도착 예정이고, 짐을 찾고 세관을 거치는 데 드는 시간을 고려하면 도착 게이트에서 나오는 건 아무리 빨라도 4시 반, 게다가 아무래도 실제로는 좀 더 늦춰질 터이니 지금 집에 돌아가도 시간은 맞출 수 있다.

망설인 건 한순간이었다. 햄은 딸이 좋아하는 봉제 인형으로, 이번 여행에도 데려가겠다고 아이가 고집을 부렸지만 일 미터는 될 만큼 큼직한 물건이어서 포기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햄은 잘 있어? 밤에는 꼭 침대에서 재워줘야 해.” 딱 한 번 걸려온 국제 전화에서도 딸은 그렇게 말했다. ‘밤에는’이 아니라 그때 이후로 내내 침대에 눕혀두었지만, 침대가 아니라 자동차 뒷좌석에 그대로 놓아뒀어야 했다. 일주일 전, 아내와 딸을 공항에 데려다주러 갈 때 이 차에 실었던 것이다. 밤에는 잊지 않고 침대에서 재워주겠다, 라는 딸과의 약속을 착실하게(어쨌거나 절반은) 지킨 결과가 이 꼴이었다.

방향지시등을 켜고 일단 옆길로 차를 빼서 오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향했다. 설령 좀 늦어지더라도 딸을 실망시키는 것보다는 낫다.

근속 15년 휴가를 받게 된 아내가 대학 시절 유학한 시애틀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을 때 겐지는 물론 다녀오라고 대답했다. 설마 딸까지 데려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리 —아내의 이름이다 —는 한사코 딸을 데려가겠다고 했다. 딸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예전에 자신이 살았던 나라와 거리와 사람들을. 그 반대겠지,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시애틀인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거리에 사는, 겐지를 만나기 전의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딸을 보여주고 싶은 거겠지, 하고.

아내가 이혼하고 싶다는 말을 꺼낸 건 일 년 전이었다. 겐지로서는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이야기였다. 바람을 피웠다거나 폭력을 휘둘렀다거나 섹스리스라거나, 뭔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몰라도,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냥 일방적으로 당신이라는 인간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겐지는 거부했다. 자신에게 잘못이 없는데 괜히 시달릴 이유가 없다.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딸 방으로 뛰어올라가 인형을 품에 안았다. 아내가 노상 빨아대다 보니 인형에서 세제 냄새가 났다.

겐지는 가족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왔다. 주위 사람 누구를 붙잡고 물어도 그런 말을 들을 자신이 있었다. 외국계 금융회사에 근무하는 아내와, 세무사로서 개인사무실을 갖고 있는 겐지는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서 매년 여름이면 바다며 산으로 딸을 데려가고 한 달에 한 번은 부모님에게 딸을 맡기고 아내와 단둘이 외식도 하는 등 마음을 써왔다. 아내와 딸이 해외여행을 나가면 배웅도 하고 이렇게 마중도 나가준다.

인형을 뒷좌석에 던져 넣고 탁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운전석으로 돌아와 안전벨트를 매는 중에 입술 사이로 쓴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얼마 전에 아내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돼지 인형에 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당신의 그로테스크함이 난 싫어.”

나는 아무 잘못도 없어. 그동안 수도 없이 해온 생각을 겐지는 다시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거의 주문처럼. 하지만 아내와의 관계는 이미 회복 불가능한 지경까지 와 있다 —아니, 그렇다기 보다 이제는 솔직히 회복하고 싶은지 어떤지 자기 자신도 알 수 없게 돼버렸다 —는 건 알고 있었다. 아내에게 이번 여행이 단순한 휴가 여행이 아니라 결단을 내리기 위해 필요한 준비, 혹은 그녀의 등을 떠밀어줄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찾기 위한 여행이라는 것도.

날이 흐리다. 아까까지 엷은 햇살이 비쳤는데. 지금 시각은 2시 27분. 비행기 도착 시간 전까지는 여유 있게 가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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