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산골 마을에 시티걸들의 등장이라…
B의 기록
평소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항상 노션(Notion)이나 메모장으로 준비물 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꼼꼼하게 짐을 챙기는 편이기도 하고 원래 맥시멀 리스트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던 나의 짐은 30인치 캐리어, 기내용 캐리어 그리고 백팩에 꽉꽉 채워졌다. J 쪽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실 옷이 가벼워진 날씨가 아니었고 또 업무 환경을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했던 물건들이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그렇게 많은 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렌터카 직원분께서 트렁크에 짐 싣는 것을 도와주시며 한 달 살기 하는 사람 많이 봤지만 이렇게 짐 많은 사람들은 처음 본다고 말씀해주셨고, 그 말에 왠지 유난을 떤 것 같아서 조금 머쓱해졌다. 동시에 나는 J의 만만치 않은 짐의 양과 나의 짐을 번갈아 보면서 우리는 찰떡같은 여행 메이트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렌터카를 픽업하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숙소까지 가는 길의 동선을 확인하며 도착 첫날의 계획을 세웠다. 그냥 이대로 숙소로 바로 들어가기엔 아쉬웠다.
우선 마침 사전 투표 기간이어서 투표소에서 투표권을 행사하고 서우봉 해변을 들러서 바다 구경도 했다. 역시 제주 바다에 발도장을 찍어야 진짜 제주도에 도착한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차도 많고 사람도 많은 해안가 쪽에서 점차 제주도의 중앙으로 향했고 인도조차 없는 좁은 산길을 몇 분 간 달리니 숙소가 위치한 선흘리에 접어들었다.
우리가 선택한 한 달 살기 숙소는 제주 조천읍의 선흘리라는 중산간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선흘리는 대부분의 육지 사람들은 처음 들어보는 지역일 것이다. 제주 사람들도 ‘시골'이라고 부르는 작은 산골 마을이고 편의점보다는 ‘상회'가 익숙한 마을 사람들이 살고 계시는 곳이다. 당연히 배달 음식은 꿈도 못 꾸는 곳이다. 식당이나 카페가 밀집되어 있지 않고 교통편도 불편하다. 하지만 그만큼 유동 인구가 많지 않아서 전반적으로 조용하고 관광지화 되어 있지 않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는 둘 다 공통적으로 사람이 북적거리지 않는 지역에서 머무는 것을 원했기에 선흘리를 고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곳이 그저 조용하고 한산해 보이기만 한 동네였다면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J와 나는 둘 다 도시와 힙플을 놓치지 못하는 시티걸(..)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템플 스테이를 갔을 때도 돌아오는 길에 속세가 너무 그리워서 기어이 힙한 카페를 하나 찾아서 오픈런을 했었다.)
일단 선흘리는 이것저것 뭐가 많은 함덕이나 구좌 방향으로 이동하기에 나쁘지 않은 나름 제주 동쪽의 중심에 위치한 지역이었다. 또한 열심히 찾아보니 차로 15분 이내 거리에 베이커리, 식당, 카페 등 요즘 감성(?)의 공간들도 있었다. 어차피 차가 있으니 이 정도면 평화로운 제주도의 산을 만끽하며 우리의 속세에 대한 욕구도 조금은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숙소 예약 후 로드뷰로 몇 번 살펴보기는 했지만 선흘리는 정말 산골 마을이었다! 간간히 작은 건물들이 보이긴 했지만 이리 두리번 저리 두리번 해도 주변엔 나무가 가득했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차를 렌트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안 했으면 진짜 고립될 뻔했다.)
중산간 지역에 속한 선흘리는 평지인 듯 아닌 듯 오르락내리락하는 길이 많았고 그렇게 운전을 하다 보면 갑자기 바닷가가 보이는 순간이 있는데 산속에서 바라보는 바닷가는 감격스러울 정도로 멋있는 광경이었다.
다시 체크인한 순간으로 돌아와서,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았던 숙소 컨디션에 짧게 감탄했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었기에 모든 가구 및 소품들의 상태가 거의 새것에 가까웠고 무엇보다 정말 없는 것이 없었다. 또한 업무가 가능한 책상이 있는지, 업무 공간과 자는 공간을 분리할 수 있는지, 요리가 가능한 환경인지 등 다양한 요소들을 꼼꼼하게 따져본 후 약 28일간 머무를 숙소를 선정하였기 때문에 한눈에 보아도 ‘아, 잘 예약했다.’ 싶었다.
우리는 사장님에게 몇 가지 주의 사항들을 안내받은 후 바로 짐을 풀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 달 동안 생활하기 편하게 가구의 위치를 적당히 변경하고 옷을 모두 꺼내 행거에 걸어두었다. 숙소를 구석구석 살피며 주방 기구들은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각자의 업무 환경을 세팅했다.
각자 들고 온 캐리어와 백팩에서 짐이 끝도 없이 나와서 조금 당황했지만 가져온 것들을 전부 꺼내서 정리를 하면 할수록 실시간으로 ‘숙소'에서 ‘우리 집'이 되어감을 느끼며 역시 부족한 것보다는 넘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업무용 노트북을 거치대와 함께 책상에 올려두고 와이파이와 줌(Zoom)이 잘 작동하는지까지 확인을 하고 나니 비로소 우리가 ‘Work’ation을 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와 나 진짜 여기서 일해도 되는 건가? 갑자기 회사한테 고마웠고 이 회사에 입사한 나 자신이 기특했다. 입사 일주일 차에 사라졌던 회사뽕이 3년 만에 부활했다.
제주 한 달 살기 첫째 날. 제주 공항에서 숙소까지 오는 과정과 숙소 도착 후 짐을 정리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물 흐르듯 막힘없이 자연스럽고 효율적이었다. 버리는 동선과 시간이 없었고 의견 충돌도 없었다. 숙소의 위치도 숙소 자체에 대한 첫인상도 좋았다. 과연 우리는 이곳에서 한 달간 잘 지낼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잘 지내는 것은 당연한 거고 ‘얼마나 재밌게 잘’ 지낼 수 있을 것인가. 제주도에 오기 전에 갖고 있었던 걱정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설레고 기대되는 마음이 그를 대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