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 없이 단번에 쓰는 글
전광판의 숫자가 바뀌었다
오늘의 교통사고 현황
86명에서 87명
다음 이어질 노래를 고민한다
어제 먹은 저녁 식사 메뉴를 기억한다
비둘기 두 마리가 발치에서 나란히 걷는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라디오 진행자가 방송을 그만두었다
나는 이내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싶어진다
물구나무를 서도 달라지는 건 없기에
편지지 위에 떠오르는 말을 받아 적는다
문구점에서 한 시간 넘게 연필을 고르다
울고 웃던 기억이 각막 위에 판박이처럼 붙어
기억보다 적게 울고 조금 웃는다
이름과 성과 풀네임과 이니셜을 고민하다
진행자의 이름을 몸에 새겨 넣는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모르고 당신은 나의 존재를 모르지만
몽당연필이 되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되면
그럼에도 기억은 짧아질 뿐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며
수빈이에게 혼이 났다
너는 슬픔을 모르는 사람이니
판다처럼 눈이 퉁퉁 부어서는
새로운 아이가 또 너에게로 다가올 거야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말릴 새도 없이 우는데 차마
웃을 수는 없어서
분명 많이 보고 싶을 거야
허락도 없이 황급하게
마음을 단정한다
구급차 한 대가 횡단보도를 가로지른다
어깨를 들썩이며 수빈이가 그쳤던 울음을 반복한다
베란다 한구석에 놓인 쇼핑백을 들고 분리수거에 나선다
마대자루 안에 아파트 주민의 책과 종이가 모여 있다
공무원 시험 서적과 대학교 입시 자료와 지난해의 달력을 하나씩 꺼내 자루 한 켠에 모아둔다
빈손으로 돌아오는 데는 실패했다 절반으로 접힌 초대장과 기억이 안 나는 명함 속 이름을 들고
책장 빈틈에 꽂아둔다 방은 지난주 오늘과 똑같은 무게
어린 동생이 현관문을 두드렸다 혼자서 집까지 걸어왔다
수화기 너머에서 엄마는 아직 울고 있다 시장바닥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동생의 이름을 부르는데
얘는 여기서 빙글빙글 웃는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엄마의 슬픔을 멈출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
천사는 종착역에서 일어난다
어제 다친 발목이 오늘은 아프지 않다
커피를 한 손에 들고 서로의 자식 이름을 지어주며 웃는 사람들
누가 더 웃기게 짓는지 대결하다 커피를 쏟는지도 모르고
사무실로 복귀한 사람들 언제 웃었는지도 모르고
소매 밑단에서 검은 물이 뚝뚝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