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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Apr 11. 2024

피크닉

퇴고 없이 단번에 쓰는 글

지하철이 줄에 매달린 채

강 위를 건너간다 흔들림 없는 속도로

천둥은 반복한다

성실한 아이는 자라서 스무 번째 생일을 맞았다


반의 반의 반의 반으로 접힌 돗자리를 펼친다

흙먼지가 날리고 죽어 있는 벌레가 발견된다

과자가 담겨 있던 빈 봉투에서는 땅콩 냄새가 흘러나온다

땅콩 껍질 같은 드레스를 입은 가수가 무대 위에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드레스가 휘날렸고 사람들은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베이스의 현이 끊어졌다

입맛을 다시면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다

대자로 누워 고개 숙인 나무를 거꾸로 올려다본다

끊겼던 꿈이 다시 재생된다


강아지는 서로 눈을 맞추며 화를 낸다

으르렁거리며 인사를 한다

볼을 핥다 입맛을 다시다

반대 방향으로 헤어진다

주인은 제 강아지만 바라본다

손으로 줄을 꼭 잡은 채


외할머니는 비닐봉지의 매듭을 풀 줄 몰랐다

짧은 손톱으로 낑낑거리고 있으면

묶인 매듭을 풀어 주었다

그 안에는 콩나물이며 더덕이며

저들끼리 이리저리 엉켜 있었다

고맙다고 손을 꼭 붙잡고는 했다 전화번호부의 숫자를 대신 읽을 때도

현관문을 미리 열어둘 때도

젖먹이 아이처럼 꽉 움켜쥔 채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천둥은 반복한다

흔들림 없는 속도로

다음이 오기 전까지 고요를 키우며


꽃잎을 주워 외투 앞주머니에 넣어둔다

지금을 기억하기로 한다

기억하기로 한 순간을 기억하기로 한다

가방 밑바닥에 깔린 책을 꺼내 목차를 읽는다

계절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항상 다음 계절의 한중간이었다


소파에서 잠이 든 엄마를 깨우지 않고

불을 끈다

밤이 찾아왔다

텔레비전에서는 정치인이 연설을 한다

눈물을 흘린다 주먹을 불끈 쥐고 펴지 않는다

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간다

텔레비전을 끄자 거실에는 아무도 없다

리모컨을 꼭 쥔 손이 홀로 단단하다

쿠션에 등을 기댄 채 잠이 든 엄마를 두고

방으로 들어온다

한쪽에 접어둔 돗자리에서 일정한 박자의 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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