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 없이 단번에 쓰는 글
#1
리나는 미술 교실을 나선다.
화통 속에 말려 있는 그림을 생각하며 내리막길을 걷는다.
횡단보도 앞에서 처음 본 강아지 두 마리가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금방이라도 달려갈 것 같다.
주인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강아지는 순종한다.
외제차 밑에서 고양이 대신 비둘기가 기어 나온다.
갓길에 정차되어 있는 트럭에서 액자와 군밤을 팔고 있다.
리나, 군밤을 굽고 있는 상인에게 묻는다.
얼마예여.
흰 수염을 기른 사내는 눈을 마주치지 않고 손가락으로 계좌번호가 적힌 종이를 가리킨다. 뜨거운 군밤을 두세 개씩 집어 봉투 안에 담는다.
셋, 다섯, 여덟, 열둘.
끝난 줄 알았는데 두 개를 더 담고는 봉투를 건네는 사내.
리나는 이체 화면을 보여주며 봉투를 받아 들고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돌아선다. 액자가 발에 차여 넘어질 뻔 하지만 걸음을 이어나간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군밤의 껍질을 까고서는 알맹이를 손가락으로 짓이긴다. 부스러기를 길바닥에 뿌린다.
비둘기, 날개를 몸에 붙인 채 군밤 부스러기가 흩뿌려진 쪽을 향해 걸어온다.
리나, 무릎을 땅에 붙인 채 상반신을 숙인다. 양팔을 뒤로 젖히고 길 위에 놓인 군밤 부스러기를 향해 입술을 가져다 댄다.
#2
진짜로 아는 사람이 나오면 안 돼.
그럼 뭘 보고 그려여?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 마구 샘솟는 컬러풀한 아이디어를 캐치하는 거야.
머야, 너무 불분명하잖아여.
원래 그런 거야. 불분명하고 흐릿하고. 그런 게 영감의 원천이 되는 거고.
저는 그냥 따라 그리는 게 좋아여.
그럼 거리의 행인이나 외국인 관광객이나 식당 점원 같은, 그런 사람들은 어때.
음. 별로예여.
애정이 담긴 대상은 위험해.
저는 아무도 애정하지 않아여. 그냥 알고 지낼 뿐이지.
그건 네가 아직 널 몰라서 그래.
내가 날 모르는 걸 어떻게 알아여? 내가 박쥐를 무서워하는 것도 목에 닿는 터틀넥의 까끌거리는 감촉을 좋아하는 것도 나만 알아여. 나는 혼자서도 잘 씻어여.
살아보니 사는 게 꼭 충치 같더라.
충치여?
치실로 열심히 이 사이를 닦아낸 줄 알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금니 사이에 검은 점이 피었더라.
그럼 열심히 닦은 게 아니져.
그니까, 그걸 그때 어떻게 아느냐는 거지. 아프지도 않은데. 나는 잘 닦고 있는 줄로만 알고 살았다고.
그래서 치과 가셨어여?
아니, 무서워서 아직 안 가고 있어. 진단을 받으면 진짜 충치가 되잖아. 아직은 가짜야, 가짜.
언니는 언니 이빨을 애정해여?
이쯤 되면 그냥 사는 거지 같이.
머야, 그냥 뽑아버려여 그럼.
#3
리나가 탄 지하철이 고장이 난다.
대학가 역에 멈춰 선 김에 내리기로 한다.
선배를 따라 몇 번 갔었던 오래된 식당 앞에 선 리나, 사진을 한 장 찍고 안으로 들어간다.
식당의 메뉴판은 그대로였고 반찬은 여덟 가지로 기억과 똑같은 차림이었고 주인은 아버지에서 아들 부부로 바뀐 것 같았지만 화장실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비누가 없다.
(조명이 푸른빛으로 바뀐다)
나는 단언하는 사람이 제일 싫어. 세상에서 제일. 지가 뭘 다 안다고 다 아는 것처럼 세상 다 살아본 것처럼. 그래봤자 너도 나도 그 뭐냐, 새파란 푸른 원? 거기에 사는 거 아니야.
창백한 푸른 점이여?
어어 그거 그거. 너 역시 확실하구나. 확실한 건 좋아. 벽처럼 단단하거든. 내가 어릴 적부터 벽에 기대는 걸 좋아했어. 내가 말한 적 있었나? 허리가 좀 안 좋아. 허리만 안 좋은 건 아니지만 여하튼,
간이 엑스레이 결과에서는 척추가 왼쪽으로 13도나 휘었다고 했는데 정작 대형 병원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해서 그런 줄로만 알고 있다가 십수 년도 더 지났을 때 다른 병원에서 척추측만증으로 진단받았다는 얘기여?
(박장대소하며) 취하긴 취했나 보다. 했던 얘기 또 하고 했던 얘기 또 하고.
(젓가락으로 과자를 집어먹으며) 안 취해도 그러잖아여. 이제는 그러려니 해여. 듣다 보면 묘하게 조금씩 레퍼토리가 달라지기도 하고.
레퍼토리?
의사한테 여태껏 치료 안 하고 뭐 했냐며 혼난 적도 있었는가 하면 그동안 불편하셨겠다면서 걱정해 준 적도 있고, 동네 형들한테 맞아서 휘었을 때도 있었는데 또 어떤 때는 옆으로 누워 자기 좋아해서 그렇게 된 거라고도 했었져.
내가 그랬나?
상관 없어여 근데. 어떤 버전이든 다 그럴 듯하니까여. 재밌으면 그걸로 됐어.
너는 그런 적 없어?
나 허리 안 휘었는데.
허리 말고. 너도 네가 뭘 어떻게 했는지 잘 기억 안 난 적 말이야. 분명 뭘 하긴 했고 결과물도 분명히 남았는데 어떻게 한지 기억이 안 났던 적 없어? 몽유병에 걸린 사람마냥.
음.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해 본 것 같아여. 하라니까 했고 하다 보니까 됐어여. 종이접기 하듯이. 1번에서 2번으로 2번에서 3번으로 따라서 접다 보면 학이 되고 사슴벌레가 되고 그러잖아여. 가위나 풀이 필요한 건 귀찮으니까 안 하고. 그렇게 살아왔는데여.
그래? 의외네.
머가여?
너는 뭐랄까, 항상 확실한 사람인데, 그게 너 자신을 되게 잘 알아서 그러는 줄 알았어. 종이를 척 보면 호랑이도 보이고 장미꽃도 보여서 막힘없이 접어 나가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말을 멈추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다. 벽에 몸을 기댄다.)
왜 말을 하다 말아여.
아 허리가 아파서 갑자기.
근데 나 종이접기 잘 못해여.
(조명이 빛을 잃는다)
먹고 남은 반찬을 한 그릇 안에 붓고 뒤섞는다. 식당을 나선다.
A+를 받은 무용 수업에서 배운 동작을 떠올리며 몸을 움직인다.
척추를 곧추세우고 양팔을 옆으로 나란히 펼친다. 이윽고 하늘을 향해 팔을 쭉 뻗으며 크게 원을 그린다. 발꿈치는 줄곧 세우고 있다. 양팔을 이리저리 휘저을 때마다 목도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꺾였다 바로 서기를 반복한다. 갑자기 동작을 멈추더니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끌어안으려는 듯 팔을 모으고 발꿈치의 긴장을 서서히 푼다.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무릎을 바닥에 꿇는다. 이마를 무릎 위에 댄 채 온몸을 둥그런 고치처럼 웅크린다. 팔은 다시 양 옆으로 뻗고서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게 만든 채 위아래로 팔을 움직인다.
표정과 몸짓 모두 자연스럽다.
#4
리나,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뛰지는 않는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고 나를 모르는데,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르는데 어차피 그렇게 흘러갈 사람들인데 아무렴 어때.
그런 마음으로 느긋하게 걸어갔는데 정각에 맞춰 도착한다.
집으로 돌아오니 장롱 문이 모두 활짝 열려 있다.
리나는 현관의 전등을 켜지도 않은 채 부츠를 벗는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비가 들이닥쳤는지 벽지가 젖어 있다.
방으로 들어서지 않고 현관 앞에 주저앉은 채 양말 한쪽을 벗고 하품을 하고 반대쪽 양말을 벗는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생각하다 보니 배가 고파오는 것을 느낀다.
나는 지금 배가 고프다. 왜냐하면,
마지막으로 점심을 먹은 것은 어제이고 그 사이에는 사람들과 함께 팝콘과 나초를 조금 나누어 먹은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배가 고프다는 생각을, 정확히는 배가 고픔에 대한 가능성 자체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팝콘과 나초는 먹는 동안 음식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눈앞에 있는 것을 집어 들어 입에 넣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동작과 동작 사이의 이음새 같은 것이었다. 대사와 다음 대사 사이의 호흡이나 표정.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배가 비어 있음을 느꼈고 서서히 배고픔을 느껴오고 있는 것이다.
배가 고픔을 느끼는 것처럼 어제 했던 말을 정연히 정리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을.
어떤 단어는 수백 번을 읽어도 외워지지 않고 어떤 표정은 뚫어져라 쳐다봐도 도통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리나는 이제 속옷까지 모두 벗었다. 모든 옷을 하나의 세탁 바구니에 집어넣고 화장실에 들어선다.
리나의 화장실에는 거울이 없다. 헤어드라이어도 없고 샤워 중에 바르는 촉촉한 로션도 머리를 묶는 고무줄도 없다.
몸을 닦은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어낸다.
화장실을 나서자 방바닥에는 옷가지들이 널브러져 있다.
가장 위에 쌓인 옷은 거실 형광등에 닿아 있다.
옷으로 만든 산기슭에 털썩 앉아 군밤이 담긴 봉투를 집어든다.
봉투를 거꾸로 뒤집으니 군밤들이 아래로 쏟아져 거실 곳곳으로 굴러간다.
리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군밤을 집어 입 속에 넣고 씹는다. 씹으면서 다음 군밤을 찾는다.
옷가지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화통 안에 말려 있는 그림을 걸어둘 곳이 있었는지 생각하다가 다음 군밤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