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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May 02. 2024

백야

퇴고 없이 단번에 쓰는 글

시에 대한 시를 쓰는 날이 오면

슬픔이 찾아올 것이라 말했지

시에 대한 시에 대한 시를 쓰면

슬픔보다 먼저 눈을 뜨는 오후


해가 뜰 때마다 겁이 났다

아침까지 우리는

먹은 만큼 배부르고 달린 만큼 숨차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슬픈 만큼만 울고

울다가 잠이 들면 탁자 위로 손을 뻗어 

뜨개질은 끝나지 않고 침대 밑으로 늘어진 목도리

사람은 마지막에 혀를 길게 늘어뜨린다는데

나는 가늠하지 않아

결국 한 땀도 맺을 수 없거든

어디까지 쓸 수 있는지 그런 것은 운에 맡겨

해가 뜨면 아침을 먹고 밤이 되면 몸을 씻는다

미지근한 마음으로 지내는 거야


시를 투명한 페트병에 넣고

위아래로 흔들면 거품이 뿌옇게 들어찬다

다 가라앉을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면

병 안에는 사람만큼의 거품이 있고 거품만큼의 슬픔이 있다

모든 거품의 수를 다 세면 슬픔이 멈출 거야

우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도둑맞은 오후를 찾는 아침이 이어진다


사람들을 태운 버스가 다리 위를 지난다

나는 시를 관찰한다 시도 나를 관찰한다

다리는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달리면 안 되는 길과 걸으면 안 되는 길

헤드폰을 쓴 채 문학이 쏜살같이 달려간다 나는 그의 꽁무니를 좇는다

버스가 멈춰 선다 하나도 빠짐없이 내리는 사람들

빈 행을 싣고 달린다 버스는 해가 뜨기 전까지 시동을 걸지 않는다


슬픔이 없는 사람은 한쪽으로만 다닌다

오후 내내 틀어놓은 수돗물이 페트병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뚜껑을 닫을 생각은 차마 하지 못한 채

해가 넘어가고 등 뒤로는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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