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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정 Aug 26. 2024

여러분은 무엇을 쓰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미 쓰고 있는 것들


우리가 이미 ‘쓰는’ 것들  

학부모 동서 동아리 모임에서 글쓰기를 배우고 싶다고 강의를 의뢰했다. 어떤 강의보다 반갑고 기쁜 주제, 글쓰기.

자료를 만들다 문득 이 말이 떠올랐다.

'우린 이미 많은 걸 쓰고 있어요.'

다이어리를 펴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 내려갔다. 금세 한 페이지가 가득 찼다. 나는 또 '쓰고' 있었다.


    몸을 쓰다 :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를 일으켜 세우는 일부터 밥을 짓고, 살림을 하는데 내 몸을 쓴다. 나를 움직여 살게 하는 몸. 하루종일, 잠잘 때도 쉴 새 없이 몸을 쓴다.


마음(정신/애)을 쓰다: 돌봐야 하는 존재들. 얼마나 많은지? 자식, 배우자, 부모, 이웃, 친구, 반려동물이나 식물....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 줘야 할지 마음과 정신을 쓰고 갖은 애를 쓰며 살고 있지 않은가. 이 마음이란 건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서 내 안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고, 가장 마음 쓰는 일은 거의 바깥을 향하고 있기 일쑤다. 그렇게 마음과 정신을 하루종일 쓰며 산다.


시간을 쓰다 : 평생 쓰는 것 중 하나. 쓴다는 의식 없이 펑펑 쓰는 것 중의 하나. 가끔 아주 많은 시간이 뭉텅 사라지고 난 뒤에야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거나 놓쳐버렸는지 알게 되는. 매일 주어지는 24시간 중에 온전한 나의 시간은 얼마나 될까? 내가 나를 위해 시간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내가 따로 떼어내어 내가 좋아하는 것, 나를 위한 것에 쓰는 시간. 난 충분히 쓰고 있을까?


돈을 쓰다 : 삶의 커다란 숙제. 사는 동안 굽이굽이 용을 쓰며 넘어가야 하는 산. 때로 버겁고, 슬프고, 지긋지긋한. 그럼에도 좋아하는, 늘 갈망하는 것. 잘못 쓰면 망치게 될 게 뻔한 이 돈이라는 건 삶의 목표와 수단에 두루 얽혀 있는 것이므로 정말 잘 써야 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돈을 어떻게 생각하는 사람이며, 어떻게 쓰고 있나?


   신경을 쓰다 : 이 말은 하루 뒤쯤 추가한 말이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메모했던 말. 아아,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이 쓴 건 이거였구나. 그날은 하루종이 아랫집 천장 누수로 시작된 공사와 비용 처리, 부당한 청구서와 보험 처리의 불합리한 관행 등에 대해 하루종일 신경을 쓰고 속을 끓였더랬다. 어디서부터 개선을 해야 되는 걸까 뒤척이다 떠오른 이 말. 나는 정말 신경 쓰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신경 쓰고, 내가 한 말에 오해할까 신경 쓰고, 내가 쓴 글의 반응이 어떨까 신경 쓰고, 내 행동이 어떻게 보일까 신경 쓰고, 그들의 모임인데 상관없는 내가 신경 쓰고, 내 모임인데 관심 없을 그들을 신경 쓰고, 아직 당도하지 않은 슬픔과 불행을 신경 쓰고..... 아, 이건 좀 안 쓰고 싶은 것일 테다.


그리고 이미 쓰이고 있는, 어쩌다 쓰는, 앞으로는 꼭 썼으면 하는 것.


글을 쓰다.


이 모든 것을 '쓰는 나'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는 계기. 글을 쓰면 명확히 알게 된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뭘 하며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그러니 매일 쓰이고 있는 나를, 어쩌면 조금씩 닳아 없아지고 있는 나를 붙들어 흔적을 남기는 글쓰기는 마땅히 써야 할 것 중의 하나인지 모른다.

내가 나로 온전히 존재하는 시간을 되찾고 싶다면 글을 '쓰면' 된다. 내가 비로소 나를 제대로 '쓰는' 기회를 글쓰기에서 얻을 수 있다.


닳아 약해지는 몸과, 때로 소진되어 헛헛해지는 마음과 뭉텅 사라지는 시간과 써도 써도 모자란 돈과 위벽의 쓰라림으로 남는 신경을 쓰는 것보다 이제는 조금 다른 것을 열심히 써보면 어떨까?

나를 쓰는 글쓰기, 내가 되는 글쓰기, 나로 남는 글쓰기.


당신은 요즘 무엇을 제일 많이 쓰고 있나요?

지금 여기, 당신을 위한 질문을 놓아둡니다.

부디 첫 문장을 쓰실 수 있기를.


글을 쓰다, 나를 쓰다.

저는 이렇게 시작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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