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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정 Mar 13. 2020

나쁜 소식이 들고 온 선물

다시 사랑할 기회


 쉰이라는 나이가 될 줄 몰랐다. 50대라니. 더 이상 전진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일상을 이어가거나 체념할 일만 늘어나는 나이로 그려졌으니 말이다. 여자들에게 나이 앞자리 수가 바뀌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던 십 대를 제외하고는 '어서 30대가 되어야지', '40대가 기대 돼', '50대는 정말 근사할 거야' 따위의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속절없이 나이를 먹고 있다는 생각에 허둥거리기 시작한 건 코앞에 닥친 육아며 학업 뒷바라지를 얼추 끝낸 사십 대 중반이었다. 마흔을 맞을 때만 해도 조바심 같은 건 없었다. 이리저리 치이던 관계들 속에서 겨우 중심을 잡기 시작했고,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며 의지를 불태우며 전진할 동력도 있었다. 책을 열심히 읽었고, 독서 모임을 하며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일구는 데 주력했다. 훌쩍 40대 후반이 흘러갔고 2020년, 50대에 접어들었다.

 나의 50대는 어떤 모습일까, 아무리 상상해 봐도 지금의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만 들었다. 앞자리가 바뀐다고 갑자기 늙은 모습으로 변할 리 없고, 성격이 달라질 이유도 없었다. 그저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마흔아홉 살의 내가 쉰 살의 나로 하루하루 살아갈 뿐. 50대의 나를 명확하게 그려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건 2019년 11월이었다. 남편의 쉰한 번째 생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남편은 방광암 진단을 받았다. 그 날 이후 많은 게 달라졌다. 40대의 마지막 겨울이 혹한보다 더 매섭고 나쁜 소식을 몰고 온 것이다.


 30년을 봐 온 사람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기는 쉽지 않다. 20대, 환희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람을 30대는 애증의 눈길로 쳐다보며 살았다. 40대는 신의를 다지는 계기들이 하나 둘 찾아왔다. 문득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마다 남편의 도움에 의지해서 살아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새삼 고마웠다. 반려자로서 존중하며 살기로 다짐했었다. 아이들 키우고 각자에게 맡겨진 역할을 감당하느라 서로를 챙기지 못하고 살았다. 겨우 서로를 다시 바라보는 연습을 할 즈음 시련이 찾아왔다. 아니, 다시 사랑할 기회가 찾아왔다.

 내가 원하는 사랑의 방식과 남편이 사랑하는 방법은 자주 어긋났다. 자기로서는 최선의 사랑을 보여주었다고 믿는 남편을 원망하고 밀어낸 적이 많았다. 수시로 삐끗하던 관계가 40대 중반이 지날 즈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며 나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을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어떤 부분은 깨끗하게 포기하고, 상당 부분은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말이다. 그래도 다시 사랑이라니.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나쁜 소식 뒤에 선물이 따라왔다. 시작은 아픈 사람을 돌봐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안에 나도 알지 못했던 사랑이 고이고,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어려움 앞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 슬퍼하고 원망하고 두려움에 허우적거리는 길과 다시 사랑하고 감사하며 함께 견디며 헤쳐나가는 길. 다행히 나는 두 번째 길을 선택했다.

쉰의 나이, 하루하루를 반짝이는 날들로 기억하기 위해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열심히 예뻐하고 많이 사랑하기 위해 온 감각을 열어 주변을 살핀다. 기쁜 만큼 슬픈 일들이 수두룩하다. 눈부신 날들만큼 가슴이 무너지는 일들이 수시로 찾아온다. 그럼에도 삶의 역설을 인정하고 담담히 받아들이며 살아나가려 한다. 나쁜 것은 혼자 오지 않는다. 남편의 질병은 다시 제대로 사랑할 기회를 선물로 들고 왔다. 50대를 막 시작하며 나는 다시 사랑에 빠졌다. 모든 것이 애틋하고 소중하다.

그림 이야기

어느 휴일, 카톡으로 그림 한 장이 날아들었다. 낡은 사진 속의 나는 30대 후반 정도가 아닐까 싶다.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며칠 뒤 둘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받았다........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공평하잖아..... 자기는 20대로 그려 놓고 말이야.... 나의 닉네임은 '반짝이는 나날들', 그는 '노란몽'. 둘 중 누가 먼저 좋아하기 시작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확실한 건 1990년 3월,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2020년 3월, 30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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