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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정 Mar 13. 2020

30년 동안 배운 사랑

따스한 멜로 영화의 주인공처럼

 생로병사, 희로애락. 간단히 정리될 수 없는 삶을 이토록 명료한 여덟 글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쉰이라는 나이는 그 말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를 비로소 가늠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2019년 11월 남편은 쉰한 번째 생일 전날, 암 진단을 받았다. 착한 암이라는 말이 결코 착하지 않다는 걸 절감했다. 호상이라는 말이 유족에게는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살 만큼 살았고, 고통스럽게 죽지 않았으면 다행이라는 의미를 간곡하게 표현한 말일 수도 있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슬픔과 깊은 상실감은 절대 ‘좋을 호’가 될 수 없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했고 남편 말마따나 ‘못생긴 혹 덩어리’를 절제하면 괜찮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어설프게 인터넷에서 검색한 글을 읽다가 심장이 쿵 떨어지는 줄 알았다. 산산이 부서진 것 같은 마음을 다시 추스르기까지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 남편은 자신의 병도 큰일이지만 지극히 예민하고 나약한 성정을 가진 아내가 받을 충격을 어떻게 달랠 것인가가 더 큰 문제였을 터. 아무렇지도 않은 척, 괜찮은 척 어설픈 연기 하느라 전전긍긍했다. 나는 나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남편을 걱정시키지 않는 거라는 사명감으로 씩씩한 척했다. 수술 날짜가 잡히고 두 주 넘게 기다리는 시간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우리는 감정의 오르내림을 최대한 티 내지 않고 철저히 서로를 위한 연기에 몰입했다.

그러던 어느 휴일이었다. 최대한 몸을 붙이고 서로의 온기에 의지하며 함께 책을 읽고, TV를 보고 낮잠을 잤다. 저녁 준비를 하려고 부엌에 나왔다가 거실에 깔아 놓은 러그 위에 잠시 몸을 뉘었다. 오후 햇살이 따스하게 비쳐 드는 창가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렀는데, 아, 안돼, 말릴 틈도 없이 어느새 흐느끼고 말았다. 남편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싱크대 구석 쪽으로 자리를 옮겨 웅크리고 고개를 묻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어느새 남편이 옆에 와서 등을 토닥여주다 가만히 안아주었다. 참았던 눈물을 다 쏟을 즈음 그제야 남편도 흑흑 울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둘이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울게 해 줘서 고마워. 나도 울고 싶었는데 당신 때문에 참았어.”

 나는 이 장면을 지인들에게 ‘한바탕 진한 멜로 영화를 찍었다’라고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해 주었다. 그날 이후 수술 전까지 우리는 다시 울지 않았다. 더 많이 안아주고, 수시로 입을 맞추고, 자주 사랑을 고백했다. 평소 그렇게 듣고 싶었던 '여보, 사랑해. 당신이 있어 다행이야. 당신만 있으면 돼. 고마워. 당신이 옆에 있어서 참 좋아'라는 말을 30년 만에 몰아 들은 나는 남편에게 여러 번 말해주었다.

“나는 이제 여한이 없어. 당신에게 100% 온전한 사랑을 받는 게 꿈이었는데 이제 그 꿈을 이뤘거든! 만세!‘

스무 살에 만나 쉰이 되었다. 두 살 연상의 과 선배였던 남편과는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 지나왔다. 지지고 볶고 싸우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또 아껴주었다. 외부적인 원인으로 수없이 냉전을 치렀고, 셀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아들 딸 두 마리 토끼를 키우느라 남편은 등골이 휘고, 나는 이제 겨우 어른이 되었다. 가끔은 서로를 희귀 동물 취급하며 놀리곤 한다. '아니, 30년 동안 한 여자, 한 남자만 바라보고 살았다니 그게 말이 돼? 뽀뽀도 서로가 처음이라니 도대체 무슨 이런....'눈을 흘기며 서로 투덜대곤 한다. 그러면서 지그시 눈을 맞추고 헤벌쭉 웃곤 한다. '지금이 제일 좋은데?' 하며.


 수술이 끝나고 남편은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고 뒤늦게 고백했다. 진통제가 잘 듣지 않았고, 어떻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옆에 있는 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한 발을 침대 끝에 대고 힘을 주고 버티느라 퇴원할 때는 절뚝거리며 나왔다. 남편은 직장을 두 번 옮겼다. 휴직 상태로 6개월을 보낼 때도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꼬박꼬박 주었던 사람이다.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하고 무심한 듯 보여도 정감 넘치는 사람이다. 순한 성정을 타고나서 아이들에게 큰 소리 한 번 낸 기억이 없다. 스물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해 가장으로 살아온 세월을 가늠해보며 나는 몹시 가슴이 아팠다. 그가 아픈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재발의 위험을 감수하며 처자식 걱정에 몇 배 더 부담을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게 미안했다. 두 번째 수술을 앞두고 병원 갈 짐을 챙기다 말고 이 글을 썼다.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모든 시름이 가만히 물러났다. '글쓰기는 내가 인생과 협조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라는 파커 할아버지의 말을 되새기며 그분이 내게 들려준 희망의 메시지, '가장 힘든 시기에도 우리 안에 가능성은 심어지고 있다'라는 문장을 가슴 깊이 품고 힘을 냈다.


 예상해 본 적은 있으나 설마 나에게 일어나진 않겠지 하며 두려움에 떨던 일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소식을 듣고 며칠은 몇 분마다 한 번 큰 숨을 내뱉어야 견딜 수 있을 만큼 힘들었다. 긴 터널이 눈앞에 있었고 그때 문득 그동안 내가 했던 말들, 신념, 의지가 진짜였는지 시험받는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라는 생각을 했지만 버거웠다. 당시 취소할 수 없는 중요한 외부 일정이 수술 날과 겹쳐 위염이 도질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다.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잡는 일정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별일 없이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 일을 통해 깨달았다. 일상을 누리는 게 당연한 듯 보이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매일을 사는 건 기적이나 다름없다.

 병원을 들어서며 남편과 두 손을 꼭 잡았다. 끝을 알 수 없는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심정이었지만 우리 안에 쟁여둔 빛들에 의지하며 한 발 한 발 힘차게 걸었다. 3박 4일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예상과 달리 그 속에서 일상을 누렸다. 남편과 그렇게 작은 공간에서 밀착된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불편한 잠자리와 생소한 일들을 하면서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마음 모아 기도해주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평안하고 자연스러운 내 모습을 보며 남편도 힘을 냈다. 남편은 그때 5인실에 고여 있던 죽음의 공포, 어르신들의 모습을 보며 느꼈던 연민, 줄어들지 않는 고통에 질려 있었다. 그나마 나의 해맑은 웃음과 수시로 얼굴을 쓰다듬어 주던 손길, 곁에 있어주는 것 자체로 견딜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병실에서 잠든 남편 옆에 앉아 기도하며 생각했다. 내 삶에 보여주신 감당할 만한 고난, 적절한 타이밍에 미리 보내주시는 경고, 어려움을 덮고도 남을 만한 은혜, 기막힌 도움의 손길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니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지금 우리가 여기 함께 있고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이전보다 더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했다. 선하신 그분은 문제를 해결해주시기에 앞서 늘 그 문제를 잘 통과해나가도록 내 곁에서 함께하셨다. 지인들의 다정한 응원 문자에 답을 할 때마다 이렇게 마음먹었다.

'매 순간 감사를 선택할게요.'

 얼마 전 시아버님이 우리 부부 사진을 인화해서 보내주셨다. 남편은 그 사진을 일기장에 붙이더니 펜을 들고 가장자리에 정성껏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근사한 액자 모양이었다. 그리고 무어라 끄적이길래 보여 달라고 졸랐다. 남편은 30주년 기념 헌사를 써 놓았다. 서로 다른 결을 가진 사람 둘이 만나 힘든 시간을 거쳐 여기까지 왔고, 이제는 아주 편안하고 잘 맞는 우리가 되었다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오늘을 떠올리며 고백하게 될 내 모습이 그려진다. 모든 게 감사했다고, 덕분에 잘 지나왔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것이다. 그때 내 마음은 잘 있었고, 고통 중에 있는 타인들의 마음도 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그런 시간이었다고 고백하며 말이다. 8년의 긴 시간 동안 암 투병을 하며 고통을 지나오신 이해인 수녀님이 그러셨다. '내가 오늘도 기꺼이 안아야 할 행복'은 바로 앞의 모든 것들이라고. ‘서로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이라고도 하셨다. 아끼는 책 <스토너>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도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

-존 윌리엄스, <스토너>, 알에이치코리아, 274쪽


 나는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오늘, 어제보다 더 많이 사랑하겠다. 두 번째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가던 날의 일기는 이렇게 끝난다.

'훗날 기억될 장면들이 아름다움의 기록으로 남기를 기도한다. 질병의 세계는 겨울이었어도 사랑했기에 우리는 봄 같았다고, 그렇게 쓰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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