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화정 Mar 13. 2020

서로를 고양시키는 존재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증인>이라는 영화의 대사 한 마디에 멈칫했던 순간이 있다. ‘좋은 사람이냐고?’ 이 질문에 앞서 누군가를 붙들고 묻고 싶었다. 좋은 사람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고. 지금껏 살아오면서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학교를 다녔고,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20년 넘게 노력하며 살았다. 좋은 이웃, 좋은 집사님이 되기 위해 눈치 보고 참은 적도 많았다. 그 좋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내 이름 앞에는 선뜻 붙일 수 없는 걸까?


 <낭만 닥터 김사부>라는 드라마가 있다. “좀 이상한 어른”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한 남자가 말했다. 어린 사람 앞에서 말을 함부로 내뱉은 건 어른스럽지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세상 무심한 척하면서 제자가 다친 곳에 쓸 약을 건네주는 선생도 있었다.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어 “제 마음입니다” 라며 간식을 내미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이상한 어른이라고 표현하는데 뭉클하면서도 이상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 미안한 일을 했으면 사과하는 것, 곁에 있는 사람이 아프면 걱정해주고 돌봐주는 것, 실수하면 만회하기 위해 애쓰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히 여기는 일 아닌가. 이제는 그런 사람이 이상해 보이고, 조금만 마음을 써주어도 감격하는 각박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쫌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그림책을 처음 봤을 때도 뭔가 당혹스럽고 서글퍼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림책에서는 더없이 선량하고 배려심 가득한 사람들을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기꺼이 남들 안 가는 딴 길로 가고, 자기는 져도 이긴 사람을 위해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사람, 나무를 아끼고 안아주는 사람, 무엇보다 잘 보이지 않는 것, 작고 연약한 생명, 소외된 존재에 마음을 쓰는 사람들을 쫌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아서 나는 쫌이 아니라 많이 이상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2020년 1월 16일, 2월에 열릴 [반짝이는 달력 모임] 안내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한 달에 걸쳐 천천히 시를 읽고 그림을 보며 일상을 돌보는 모임입니다. 2월의 주제를 생각하며 성의 있게 써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모임에 신청서를 받는 이유가 있다. 그 모임이 꼭 필요한지 점검해 보길 바라서다. 질문에 답하는 동안 자신에게 집중하며 생각할 시간을 보내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두어 시간 뒤 신청 메일이 날아들었다.


 은아 씨는 2019년 9월에 처음 만났다. [노른자 책방]에서 4회에 걸쳐 열었던 독서 모임에 대한 강의에서였다. 독서 모임 경험이 전혀 없는데 참석을 해도 되는지 오래 고민했다고 한다. 독서 모임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꾸리고 운영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기 때문에 선뜻 참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모임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을  점검하고,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강의를 진행했다. 그때 중요한 목표로 삼은 게 있었다. 설명하고 답을 제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기를 바랐다. 참여하신 분들이 좋은 독서 모임 자체를 그 자리에서 경험하도록 돕고 싶었다. 매시간 눈을 반짝이며 강의를 듣던 은아 씨는 이후 [반짝이는 달력 모임]과 주제 독서모임 [저항하는 책모임]에도 함께하며 책으로 일상을 힘차게 끌어올리고 있다. 은아 씨가 정성스럽게 쓴 2월 모임 신청서를 보면서 내가 그토록 고민하던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답을 구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1월 달력 모임의 여운을 마음에 품고 2월 달력 모임 신청서를 작성합니다. 학교 다니면서 배웠던 시들은 시 그대로 감상할 수 없던 분위기였지요. 그래서 처음 1월 시화집을 받아 들었을 때 교과서에 실려 있던 시인들의 이름을 보면서 순간 긴장하기도 했어요. ‘이론적인 배경 없이 그냥 시를 읽어도 될까?’하는 마음이 컸지요. 하지만 성인이 되어 다시 읽는 시는 그때의 시들과는 전혀 다르게 다가왔어요. 틈나는 대로 홀짝홀짝 마시던 커피처럼 책장도 그렇게 넘겼어요. 눈에 띄는 시를 읽고 식탁에 항상 놓여있는 수첩에 적어 보기도 하고, 그림도 가만히 바라보기도 했구요. 모임 다음날 적었던 글처럼 저에게 시는 '노을'이에요. 그날그날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거든요. 계속해서 시를 읽어보고 싶어요, 그림책과 함께요. 선생님! 제가 이번 달력 모임에서 최근 몇 달 동안 선생님 모임에 흠뻑 빠져들었다는 마음을 좀 과하게 표현했지만 화르르 달아올랐다 푹 꺼지는 마음은 절대 아니에요. 오늘 하상욱 시인의 글귀를 읽었는데, ‘나에게 가장 좋은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도 아니고 내가 나를 좋아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하더라구요. 읽자마자 선생님이 떠올랐어요. 전 자존감이 정말 떨어지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선생님 모임에 참여하며 책도 읽고, 선생님 이야기와 인생 선배 분들의 이야기도 듣고 종종 혼자 끄적거리기도 하는 시간을 통해 점점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좋아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선생님께서 새로운 멤버(?)분들을 맞이할 기회를 줄이는 것 같지만 저는 모임에 계속 참석하고 싶어요.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싶은 이유가 뭘까?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좋아서가 아닐까? 늘 못마땅하고, 부족한 것 투성이어서 의기소침해지던 내가 독서 모임에 가면 조금은 ‘괜찮은 나’로 느껴지는 건 소중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책을 읽으며 나를 수긍하고 인정하는 연습을 하고, 늘 구박하던 자신과 화해하는 법을 독서 모임에서 배우곤 한다. 아직은 연약한 모습이지만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주고자 서로 북돋우다 보면 진짜 좋은 사람이 되는 그런 자리가 독서 모임이다.『그리운 메이 아줌마』에 나오는 메이 아줌마처럼 말이다.

아줌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했고, 누가 어떻게 행동하든 간섭하지 않았다. 아줌마는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를 다 믿었고, 그 믿음은 결코 아줌마를 저버리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아줌마를 배신하지 않았으니까. 아마도 사람들은 아줌마가 자신들의 가장 좋은 면만 본다는 점을 알고, 아줌마에게 그런 면만 보여줌으로써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했던 모양이다.

- 신시아 라일런트, 『그리운 메이 아줌마, 사계절, 26쪽


 하상욱 시인이 말한 ‘내가 나를 좋아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구절을 보는 순간 떠오른 메이 아줌마는 나의 이상형이자 롤모델이다. 결국 좋은 사람은 나의 ‘좋지 않음’ 속에서 스스로는 발견하기 힘든 나의 ‘좋은 점’을 발견해주고 끌어내 주는 사람이 아닐까. 그 사람이 멀리 가버리거나, 나를 좋아해 주던 마음이 사그라들더라도 여전히 그 좋은 점들이 나로부터 솟아 나온다는 걸 알게 해주는 그런 사람. 그런 신의가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로 발돋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인물이 또 있다. <랩걸>을 쓴 호프 자런과 그의 동료 빌이다. 자신의 존재가 고양되는 느낌을 받을 때는 언제일까? 오랜 노력 끝에 큰 성취를 이루거나 명성을 얻었을 때일까? 큰 부를 누리며 살면 그럴까?


 고양, '정신이나 기분 따위를 북돋워서 높임'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랩걸>에 여러 번 등장하는 그 말의 의미는 내 삶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호프 자런은 책에서 자신이 연구하는 나무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명한 과학자가 되기까지의 험난한 여정과 보람, 여성 과학자로서 감당해야 했던 부당함을 밝히기도 한다.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이라는 부제답게 엄마, 아빠, 할머니, 남편과 아들, 동료와 제자 등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돌아보며 사람과 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는지를 고백한다. 그중에서도 나는 동료인 빌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 호프 자런이 빌에 대해 말할 때, 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헌사를 읽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빌의 바로 앞에 앉아서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봤다. 빌이 지금 하고 있는 일, 빌이라는 인간, 그리고 그 순간의 모든 것을 똑바로 목격하는 증인으로서 그를 바라봤다. 그곳, 세상의 끝에서 그는 끝이 없는 대낮에 춤을 췄고 나는 그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닌 지금의 그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를 받아들이며 느껴진 그 힘은 나로 하여금 잠시나마, 그 힘을 내 안으로 돌려 나 자신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도록 했다.

-호프 자런,『랩 걸』알마, 287쪽

     

 상대방을 선입견 없이 세심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는 사람, 한 번도 드러내지 못한 깊은 상처를 꺼내보여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 독특한 취향과 방식에 대해 함부로 고치려 하거나 참견하지 않는 사람,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을 지켜보고 있을 뿐인데 그 사람 덕분에 나 자신도 좋아지는, 그런 사람을 마주하고 있다면 내 존재감이 한껏 고양되지 않을까? 서로를 고양시키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일까? 나에게 빌 같은 사람이 있던가? 이 질문을 마주하고 한참 골똘히 생각했었다. X라는 친구? 아니면 Y? 그러다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이제 내 나이에는 빌 같은 사람을 기다리기보다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는 게 맞지 않겠냐고.

 은아 씨의 글을 읽으며 ‘좋은 사람’에 대한 정의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쉰이라는 나이는 이제 '그 사람이 참 어떻다'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야 할 나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굴 표정이나 말투, 사소한 행위에서도 그 사람이 드러난다. 드라마와 영화, 그림책에서 말하는 조금은 이상한, '좋은 사람'을 종합해 보며 내가 되고 싶은 사람에 대해 적어보았다. 빌 같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 호프 자런처럼 깊고 그윽한 시선으로 상대방을 바라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50대를 여는 올 한 해 어쩌면 마지막 기회라 여기고 최선을 다하고 싶다. 아직은 부자연스럽고 내 것 같지 않은 ‘좋은 사람’의 요건들을 부지런히 내 몸과 마음에 장착하며 말이다.

-상대방이 빛날 수 있는 조명판 역할을 해주는 사람
-홀로 있어도 은은히 빛나는 사람
-돌아보면 늘 그 자리에 있다가 마주 웃어주는 사람
-신호를 보내면 제때, 적절한 방식으로 감응해주는 사람
-따뜻한 사람 (손 잡아주는 사람, 안아주는 사람, 뜨거운 국물을 후루룩 같이 먹어주는 사람)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만큼 자신을 아끼게끔 하는 사람
그리고
-뒷모습까지도 아껴주는 사람                                              


(고은아 님의 허락을 받고 썼습니다.)

이전 02화 30년 동안 배운 사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