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문학이 풀어낸다면

봄햇살 같은 책

by 이화정

연희동에 있는 [밤의 서점]에서 고른 책들은 내 책장의 '즐겨찾기' 목록에 여러 권 올라 있다. 책방을 지키는 두 분의 점장님이 쓴 추천글을 읽고 책을 고르는 경우가 많은데, 앤드루 포터가 쓴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띠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두 점장이 다 좋아하는 책입니다. 그냥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나온 첫 말이 “아, 다시 읽어야지”였다. 남편에게도 꼭 읽어보라고 당부를 했다. 4월 15일 이후 이 책 리뷰를 어떻게 쓸까 고민하는 사이 남편은 이미 다 읽고 블로그에 리뷰를 올렸다. 그저 나는 점장님들처럼 이 한 마디면 딱 좋겠다 싶었다.

“그냥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글을 쓰기 전에 다른 사람이 쓴 리뷰를 찾아보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이 책은 궁금했다. 골라 읽은 몇 편에 충격을 받았다. 너무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글에는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하지만 공감의 진폭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아, 그럴 수도 있구나' 하면서도 여전히 '아니 왜?' 하고 안타까워하고 있을 뿐.

대부분 화자의 어조가 담담하다. 그럼에도 몇몇 장면은 머릿속에서 영화 필름이 돌아가듯 강렬하다. 여운이 길고 무겁다. 쉬이 다음 편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다음 이야기를 읽고 싶어 허겁지겁 페이지를 넘기며 빨려 들어갔다. 작가가 그리는 인물들의 모습이 실제처럼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그들이 함께 있는 공간의 팽팽한 긴장감, 혹은 따스한 기류가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서였다.


이 책에 실린 열 편의 단편을 읽으며 어릴 적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불안과 긴장의 실체를 가늠해보기도 했고,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근거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나를 다시 만나기도 했다.

‘만약 어머니가 그 여름 무엇을 견디고 있었는지 알았다면, 어쩌면 나는 어머니를 보다 연민했을 것이다“(35쪽/ 코요테)라는 구절에 예리한 통증 같은 게 느껴졌다. 그 무언가를 '견디는' 삶은 나에게뿐 아니라 엄마와 아빠, 그 누구에게도 있었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은 각자가 짊어지고 사는 상실감과 아픔에 대한 근원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가시처럼 박힌 기억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드라마기도 하다.

'내가 아는 것은 우리 삶의 뭔가가 돌이킬 수 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37)라는 고백에서 묻어나는 쓸쓸한 정서가 책 전반에 배어있다.

남편과 이 책을 읽고 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참 좋았는데, 그러면서도 미세한 슬픔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같은 지점이라도 각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어서인지 모르겠다. 사랑에 대한 정의도, 사랑하는 방식도 달라 긴 시간을 다른 방향을 보고 이야기하느라 진을 빼다가 이제야 제대로 서로를 들여다보며 맞춰가고 있는 중이어서인지도.

어떤 문장들은 천천히 반복해서 다시 읽고 또 읽었는데, 문장에서 배어 나오는 따스함과 아련함을 오래 지속하고 싶어서였다.

그때도 알았듯이, 그저 형식상 하는 질문이었지만, 나는 그가 내 대답에 보여주는 관심이 고마웠고 내가 말을 할 때마다 차분하면서도 사려 깊은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 고마웠다. 그는 나를 편하게 해 주기 위해 각별히 노력하는 듯 보였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아래쪽을 흘끗 내려다보는 살짝 불안한 습관이 이상하게도 내 자신감을 북돋워주었다. 강의실 밖에서는 얘기라곤 나눠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미 핏속부터 편안하고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의 친구분들, 농담을 주고받기 쉬운 나이 많은 남자들,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앞에 두고 부끄러워하는 모습 때문에 무해한 존재가 되는 그런 남자들과 있을 때 느껴지는 따스함이었다. (91쪽/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무해한 존재, 온전히 나를 받아주는 존재에 대한 갈망은 현실에서 쉬이 이루어질 수 없기에 소설 속에서나마 이런 느낌을 주는 사람을 만나는 건 기쁘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장 좋았던 작품을 꼽으라면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나 『폭풍』 중 하나를 고를 텐데, 아마도 ‘가슴속에서 따뜻한 일렁임’(93)을 느끼게 해주는 인물이 나오기 때문이리라.


“있잖아,” 누나가 테라스 바닥에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너는 나를 받아준 유일한 사람이야, 앨릭스. 내 평생. 너는 나를 이해해준 유일한 사람이야.” (243쪽/폭풍)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유년 시절의 깊은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거나(구멍), 어쩌다 변해버린 마음들 앞에서 한없이 서성이며(코요테) “나는 더 이상 그 시절을 낭만적으로, 일부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는 바라보지 않지만, 이따금은 그 시절이, 대기에 흐르던 그 에너지와 그때의 낙관과 희망이 그립다. (아술 51)고 말하는 이들이다.


어떤 이들은 섣불리 불륜이라는 잣대를 들이밀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이유와 상황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 아닐까. 남편, 약혼자, 아들 혹은 부모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내밀한 감정과 설명하기 힘든 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았을 때 이런 느낌이 든다면 윤리적인 기준을 뛰어넘어 바라보아야 할 지점이 있다는 뜻일 게다.

우리는 삶의 내밀한 사정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우리를 배신한 스러진 사랑들, 우리가 배신한 스러진 사랑들, 추억하기조차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유년의 순간들, 우리가 나누는 이런 대화에는 자유가 있었다. 우리가 그곳에서 하는 얘기는 절대 그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콜린에게 언급할 수 없었던 일들을 로버트에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어떤 일도, 아무리 우스꽝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어도, 모두 다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그 아파트에서 나누는 모든 말들은 그 바깥의 세상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을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105-106쪽/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나는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는 문외한이지만 이 소설을 통해 서로 다른 존재가 어떻게 서로를 수용하거나 배척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깊은 교감을 나누는지, 왜 아무리 애써도 서로의 마음에 가닿을 수 없는지를 탐구하는 심정으로 읽었다.

내가 그곳에 가는 이유는, 지금껏 그 어떤 곳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이, 그의 작은 테두리 안에 있을 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104쪽/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제목만 보고 긴장하며 읽다가 스르르 마음이 풀어진 이유는 내게는 이 소설집이 안전하고도 비밀스러운 나만의 작은 테두리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단단하고 조밀한 언어로 짜인 문학이라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가만히 울고 싶었던 심정이랄까.

마음에 한기가 들거나 모든 게 시들해져서 다 체념하고 싶은 날 몰래 꺼내보고 싶은 문장들이 많다. 비상약을 쟁여놓듯 이곳에 기록해둔다. 최근 어떤 책의 리뷰를 보고 소개한 문장이 좋아 덜컥 책을 구입해서 읽고 후회를 많이 했다. 좋은 문장을 발췌한 것만 보고 샀다가 그게 전부여서 허탈한 적이 많았다.

여기 적어두는 문장들은 좋은 영화의 스틸 컷 같은 것이다. 이 문장들 너머, 인물과 인물 사이에 흐르는 따스한 기류를, 어떤 장면 뒤에 깃든 다정한 추억을, 한 사람을 추억하는 마음의 깊이를 나는 도저히 전할 방법이 없다. 다만 4월 15일 이 책을 들고 기뻐하던 내 모습을, 이 책을 소개할 생각에 부풀었던 마음은 고이 간직하려고 한다.


나는 그제야, 우리 사이에 지금껏 말을 넘어선 교감이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119


그가 그 순간,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이해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120


로버트가 채워준 나의 일부는, 내 생각에, 지금도 콜린은 그 존재를 모르는 부분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쉽게 파괴도 시킬 수 있는 나의 일부다. 그것은 닫힌 문 뒤에 있을 때, 어두운 침실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제일 편안하다고 느끼는, 유일한 진실은 우리가 서로 숨기는 비밀에 있다고 믿는 나의 일부다. 125


나는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청중 가운데서 간간이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와 다정하게 이어지는 박수 소리는 들을 수 있다. 가게 안쪽은 따뜻하게 불이 밝혀져 있고, 호의가 느껴지고, 그 빛이 내 가슴을 따뜻하게 채운다. 214


그러나 따뜻한 밤이었고, 폭풍이 치기는 했지만 익숙한 곳에 돌아와 있다는 사실에서 얻게 되는 위안 같은 것이 있었다. 225


잠시 나는, 어린 시절 그곳에 앉아 아버지가 일터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지난날의 늦여름 오후로 돌아간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언덕 아래로 아버지의 자동차 전조등 불빛이 보일 때 누나가 미소 짓던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기쁨처럼 보였다. 그 불빛, 자동차,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안다는 그것은. 245-246


그렇지만 나는, 그 저녁, 벤틀리 부인이 떠난 그 저녁이 자꾸만 떠오른다. 어머니가 이윽고 자신을 추스르던 모습, 부엌으로 들어가 설거지를 하던 모습, 방에서 내려온 누나에게 미소를 짓던 모습, 그리고 그 후, 개수대가에 서서, 마치 누군가가 자기에게 와주리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마치 저 멀리 있는 그림자가 뜰의 가장자리에서 걸어 나와 자기를 되찾아갈 것이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그렇게 간절하게 서 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277